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늦은 가을학기 첫 작품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벨킨이야기, 스페이드 여왕>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 푸슈킨의 소설답게 삶이 인간을 속이기도 하고 의외의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왜 삶이 그대를 속이는지, 왜 삶이 의외로 그대에게 행운을 주는지....
차례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
발사
눈보라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
스페이드 여왕
1930년대의 소설이라 디테일과 핍진성에서 현대소설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과 '이야기'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 작품이 갖는 매력은 오히려 세련된 요즘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설이 더 친밀할 수도. 소설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독특한 인물을 보여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형상화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인물들을 좀 훑어보자면,아니 그보다 프롤로그 형식부터 보아야겠다. 일단은 고인이 된 페트로비치 벨킨이 쓴 이야기를 간행하기 위해 벨킨의 아버지의 친우였던 이웃의 증언이 담긴 편지가 그대로 게재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며 여러 인물들에게서 벨킨이 직접 들었다고 하는 대목이다.
그런 후에 위의 5편이 차례로 이야기된다. 이 단편들 각 장마다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데 그 인물들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한 유형을 대면하게 된다.
'발사'의 실비오는 겉으로는 무척 여유로운 사람처럼 비치지만 내면은 황량하다. 그는 매일 총쏘는 연습을 반복해서 사격술은 대단하지만 자폐적인 사람이다.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더 유능하고 여유로운 장교를 만나자 그는 그를 질투하고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는 매일 사격연습을 하면서 그를 죽이기를 소망하지만 막상 그를 죽이러 가서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다.
'눈보라'의 마랴 가브릴로브나는 프랑스소설에 빠져 어떤 환상적인 사랑을 꿈꾼다(마담보봐리도 그렇고 많은 여자들이 현대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환상에 속고 만다). 가난한 소위보와 사랑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는 로맨틱한 삶을 꿈꾸었지만 상대는 일면 계산적인 남자였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 그녀는 혼자가 된다. 정절을 평생 지킬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또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우연히 교회에서 아주 잠깐 그녀와 혼인식을 치른 남자였다. 둘은 행복한 결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런 기적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내게서 가장 먼 곳에서, 어쩌다 딱 한 번 소문으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장의사'의 장의사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있지만 이웃집 파티에서 자신에 대한 비하적인 농담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자신이 묻어준 영혼들과 차라리 파티하기를 원하게 된다. 술김에 혼잣속으로 한 상상. 그런데 정말 그는 그들과 조우한다. 꿈이었다. 별로 행복하지 않은 꿈..... 꿈에서 깨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역참지기'의 역참지기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존적인 삶을 사는 아버지 이야기이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와 떠나자 그의 삶은 엉망이 된다. 그는 딸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불행해질 딸을 기다린다. 그러나 딸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의 애타던 마음은 단지 딸을 향한 의존에서 비롯된 무지와 오해일 뿐이었다.
'귀족아가씨'는 유쾌하고 유머스런 콩트 한 편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한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용기와 귀여운 일탈....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다' 같아서 일견 어이없을 정도.
그리고 두 번째 작품'스페이드 여왕'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사랑을 이용한 게르만이 종내는 정신병동에서 죽어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이길 수 밖에 없는 카드 세 장을 가르쳐달라고 하소하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총을 빼어든다. 늙은 백작부인은 지레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그는 살인자에다 순정한 여자의 사랑마저 잃게 되는데 그러고도 꿈에서조차 백작부인에게서 그 비밀을 전수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걸 잃고 미쳐서 카드의 숫자를 부르며 정신병동에 갇혀 죽어간다.
이 작품들 (귀족아가씨 한 편을 제외하고) 대부분 주인공들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실체(자아)와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실비오, 소설같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랴 가브릴로브나, 어린애같은 자의식에 빠져 상상을 불러일으킨 장의사, 자신의 딸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그 딸을 제대로 책임질 줄 모르는 역참지기 등...
이들은 미성숙한 어른들이다. 아이를 벗어난 지 오래지만 정신은 크지 못한 미숙한... 자신의 어떤 중독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과 마주하려니 버겁고 괴롭다. 미숙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로 자신을 힘들게 하고 간혹 상대에게 그 여파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상대는 얼마나 또 곤혹스러울까....
소설 속 인물은 나 자신과 동일시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들처럼 괴롭고 한심스러우니 그들을 통해 저절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감정이나 감성이 유달리 예민하거나 부풀려진 사람들은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일을 괜히 붙잡고 자신을 그곳에 함몰시킨다.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누군가 지목해서 '너'라고 한 적도 없건만.... 공연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떡줄 사람이 없는데 김칫국을 마신다.... 그러고나니 한심하고 주책스럽다. 문자를 통해 감정을 익히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음성언어로 직접 언표된 게 아니라면 믿어서는 곤란하다. 행위가 없는 일은 없는 일이다. 있는 행위가 있는 일이고 사실이다. 나머지는 모두 환상에 가깝다.
미성숙을 벗어나는 일은 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에 싸여서는 안된다는 것. 성숙해지려고 노력해봤자 평생 안 될 사람은 오직 현실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 어떤 의미도 다른 의미와 상통된다. 비슷한 의미들은 엮이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들은 하나의 세계면서 무한한 세계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