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넘게 감자가 아팠다. 인혜도 나도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틀 정도는 아예 밤을 새웠다. 감자가 아플 때마다 내 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몇년 간 냉담하는 처지이지만 감자가 아프면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는 나약한 심신에 직접적인 위로가 된다. 다시금 깨달은 바는 어느 정도 설왕설래하는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또는 계기가 되는 시점을 만나게 되면 성당에 다니면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무란 움직이지 않는 존재. 뿌리를 땅 밑 깊숙히 뻗고 바람과 햇빛과 어둠 속에서 자아를 의식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는 존재. 가장 편안하고 쾌적한 이미지를 그리라고 하면 첫번째 이미지가 바로 그런 그림이다. 설렁이는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고 그 바람을 맞아 바람의 방향대로 저항 없이 가지들을 흔들고 이파리들이 춤추는, 평화로운 그림.
그림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뜻도 이미 함축돼 있다. 오장육부가 작동하는 한, 감정이 수시로 바뀌고 욕망이 잠재하는 한, 나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무는 자신이 나무인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것. 그런 식물성, 그 지점에 도달하고 싶다. 허나 당위성을 말하는 것 뿐이다. 더 늙고 늙으면 그 지점의 부근쯤에 도달해야 한다는.
감자는 다 나았다. 써야 할 글과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 있는데, 게으른 게 문제다.
그제 180석을 이뤄냈다.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는 입지에 서 있다. 몇 년 뒤에 이 날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손홍규 단편 <투명인간>, <증오의 기원>
<투명인간>-
한 가정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생일에 시작된 연극이 점차 깊은 구렁에 빠져드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생일에 어머니와 다 큰 아들, 딸이 생일케이크를 놓고 아버지를 기다린다. 순전히 우연히 장난스럽게 아버지를 곯려주자고 한다. 모두 정말 그러자고 한다. 아버지가 오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자고, 아버지를 놀래주자고.
아버지가 도착하자 정말 연극을 시작한다. 특히 딸의 연극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완벽하다. 그러자 어머니도 나도(아들) 혼신을 다해 연극을 한다. 정말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는 처음에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앞에 와서 손을 들어보기도 하고 답답함에 핸드폰으로 아들과 부인에게 전화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가족 모두 자신이 보이지 않는지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을 남겨둔 채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아버지는 황당함과 좌절감에 어찌할 줄 모르다 혼자 케잌을 먹고 와인을 마신다.
그런데 어머니도 아들도 딸도 그 연극을 그만 둘 수가 없게 된다. 너무 연극에 몰두했기 때문에 갑자기 그 분위기를 깰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연극에 몰입하고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사실 그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오랫동안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로 어떤 압박을 해 온 경향이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자 그들은 그걸 깨달은 것이고 정말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연극을 먼저 그만두지 않자 아버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가족 모두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번뇌 끝에 그는 결국 자신만 실재하는 존재고 나머지 가족은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게 된다. 그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마음대로 생활한다. 아버지는 우울하게 혼자 살아가고, 나머지 가족들 또한 각자만의 삶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각자 살게 된다.
아버지의 생일날 시작된 연극이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자신들 전부를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작가가 남자이고 가장이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린 발상같다. 현대의 아버지에 대한, 가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였다.
<증오의 기원>-
증오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주인공은 이 사회와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증오의 기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기원은 아주 오래전, 과거와 과거로 소급할 수 있다. 물론 증오심은 자신의 안에서 자라난 것이다. 하지만 내장돼있는 증오는 바깥의 대상이 있어 자라날 환경이 만들어지고 구현된다. 하지만 시각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증오가 아니라 그 뒷면의 연민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도 그런 시각을 몇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증오와 연민은 같은 말일 수도 있으니. 재미에 비해 공감은 별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은 아니었다는 식의 부정적 표현일 뿐이다. 두 번 읽어야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한 면이 큰 것 같다. 그래도 두 번 읽기는 싫었다.
이승우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이미, 어디>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A4 17장, 소챕터20, 시점-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 상황에 따라(작가의 편의와 작의에 따라) 일인칭, 삼인칭으로 바뀐다.
도입 1. 나는 1년밖에 살지 않을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결말 20.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나(그)는 어떻게 아주 오래 살 수 있게 된 것인가? 나는 사업이 망했었고 그 때 무릎을 꿇리고 모욕을 당했다. 최선을 다해 사업을 했고 파산은 나의 잘못보다 시대적,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그 뒤부터 불면에 시달린다. 아내와 딸이 나 때문에 마음을 써준다. 딸이 나에게 목공학교를 다니라고 했다.
나는 적참나무 목재로 탁자와 화분대, 의자 등을 만들고 난 후 우연히 널 비슷한 걸 만들게 된다. 그게 널인지는 나도 처음에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직오면체('그런게 있다면')는 우연하게 널이 된다. 그는 널 속에 누우면 잠이 온다. 그 안에서는 아주 편안히 수면하게 된다. 점점 그는 널 속에서 아예 생활한다. 그의 일상용품들이 점점 널 안으로 들어가고 그는 아예 그 곳에서 살게 된다.
그는 1년밖에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 아주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널 속에서 사니 아주 오래 살 것이라고.... 널은 죽은 후에 담기게 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세상을 잊으니 수면을 취할 수 있고 목숨이 보전될 수 있다. 역설과 아이러니, 삶과 죽음의 자연스런 합체.
이번에 무엇보다 이승우의 단편에서 깨달은 것은 사태(사건)를 기술하는 데 있어 단선적인 한 번의 묘사나 서술로 이야기를 죽 이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번의 <칼>도 (완전히)그렇고, <아주 오래 살 것이다>도, <이미, 어디>도 (완전히)그렇다. 하나의 사태(사건 묘사)를 기술하면서 그 사태를 입체적으로 인식해 한 면과 다른 한 면을 같이 기술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사태에 대해 두 번 이상 기술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서술의 단점은 이야기가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 허나 장점으로써는 이야기가 왠지 관념적으로 느껴지고 상징성을 많이 띠게 된다는 점이다.
몇 문장으로 예를 들면(예를 들려고 보니 <아주 오래 살 것...>은 예문 삼을 게 별로 없고 <이미, 어디>에서 발췌해야겠다).
<이미, 어디>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일인가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잔디밭을 달리는 개 역시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잔디 공원을 달리지만 잔디 공원을 달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달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잔디공원을 달린다는 의식 없이 달린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의식이 발을 지배하는지/ 발이 의식을 지배하는지 말할 수 없다.
중간에 슬러쉬를 치지 않고 그냥 한 문단을 옮겨본다.
의자에 앉으면,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책을 읽을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거나 잔디공원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있기 위해 의자에 앉거나 잔디공원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도 가만히 있는 것 같고 가만히 있을 때도 책을 읽는 것 같다. 어떤 사람 눈에는 책을 읽는 모습이 가만히 있는 것 같고 가만히 있는 모습이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걸을 때도 앉아 있는 것 같고 앉아 있을 때도 걷는 것 같다. 어떤 사람 눈에는 걷는 모습이 앉아 있는 것 같고 앉아 있는 모습이 걷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주제문단
시간은 이미를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간은 쉬지 않고 조금씩 흐르며 이미를 지나갔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시간이 워낙 눈치채지 못하게 흐르기 때문이었다. 이미는 사라지지 않지만 희미해질 것이다. 이미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러나 지나간 시간으로 전재할 것이다. 시간은 나아갈 것이고 이미는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므로 이미는 시간의 뒤에 머물것이다. 그는 중앙도서관에서 이미를 지나간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읽었다. 이미를 지나간 시간은 어디에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이미는 시간의 뒤에서 살고 어디는 새로운 현재를 살 것이다. 그는 이미를 지나간 시간이 거주할 새로운 숙소인 어대에 대해 읽었다. 어디는 이미와 같지 않다고, 어디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거라고 그는 말했다. 무엇이 새로워질지는 모르지만, 이미와는 모든 점에서 다를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미, 어디>를 읽으며 소설의 상징성에 대해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칼>에서 느꼈던 것만큼 흥미로왔다. 또 손이 아프다. 그만 써야겠다. 하긴 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