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1) 조나단 노엘은 오십이 넘은 남자로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비둘기 사건'을 겪게 된다.

그의 이력이 간단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 그는 아주 어려서 부모가 사라졌고(수용소인것 같다, 1942년이라고 ) 누이동생과 시골 아저씨집에 내려가게 된다. 그는 아저씨의 뜻에 의해 군에 다녀오고 제대해 돌아와보니 누이동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아저씨는 이웃 마을 처녀와의 결혼을 권했고 그는 단 하나, 평화를 기대하며 결혼하지만 아내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간다. 그는 사람을 불신하게되고 홀로 파리로 떠나온다.

 파리에서 그는 그나마 운이 좋아 은행 경비원으로 취직하고 코딱지만한 방 하나를 얻어 살게 된다. 그는 일터와 자신의 방만을 왕복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지키고자 한다. 그는 혼자 사는 삶에 만족스러워하며 그 방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모았고 벌써 많은 돈을 지불했다. 비둘기 사건이 일어나기 전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다.  12쪽까지


2) 아침에 일어난 그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복도 끝 공용화장실) 현관문에 귀를 대고 바깥 상황을 주시하다(이웃의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그의 문밖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걸 보게 된다. 납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갈퀴 발톱을 한 빨간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그는 공포로 몸서리를 치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망상에 빠지고 만다. 그는 처음 기도를 하고, 세면대에다 볼일을 보고 세제로 닦아낸다. 두려움 때문에 저녁에 어디로 가야하고 밤엔 어디에서 보내야할지 걱정을 하며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짐을 싸서 집을 나선다.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 그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건물 관리인인 로카르 부인에게 대답 이상의(그는 그동안 그녀와 어떤 의미있는 대화도 한 적이 없었다), 요구하는 말을 하게 된다. 비둘기가 복도에 있으며, 푸르뎅뎅한 똥이 복도에 여기저기 깔려 있고 그것은 주택 관리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4) 그는 출근해 경비업무를 선다. 그는 언제나 똑같이 성실하고 바른 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불안하고 똑바로 서 있지 못하며 땀을 계속 흘리며 몸은 참을 수 없이 가렵다. 그러다 뢰델 씨(지점장인것 같다)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만다. 


5) 점심시간에 그는 가방과 외투와 우산을 옷장에서 갖고 나와 생플라시드 거리의 작은 호텔을 잡아둔다. 55프랑이나 되는 돈을 미리 지불한다.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원으로 가 벤치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 거지가 다른 벤치에 앉아 음직을 먹고 잠을 잔다. 그는 그의 태평스러움에 질투를 느낀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가을, 그는 그 거지가 주차된 차량 사이에서 용변을 보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인간적인 자유가 적어도 복도의 공동변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그런 필요 불가결한 자유를 자기가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속 깊이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를 보자 다시 이상한 불안감 같은 것이 생겨나는데 그건 경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게 저 사람이 나이 오십이 넘도록 살 수 있었는지가 의문스럽다. 그러면서 자신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가 그런데 왜 자신은 지금 겨우 빵 따위를 뜯어먹고 있는가. 점심시간이 30분 남아 있지만 그는 공원을 나선다. 


6) 세브르가까지 다 갔는데 벤치에 빈 우유 팩을 두고 왔다는 생각에 그는 공원으로 다시 향한다. 우유 팩을 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벤치에 뾰족하게 나와 있던 나사에 바지 주머니 끝부터시작하여 넓적다리를 죽 타고 내려가며 옷이 찢어진다. 그는 급하게 백화점 한 구석에있는 여자 재단사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밀린 일감 때문에 당장 그의 옷을 수리해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스카치 테이프로 뜯어진 자리를 붙이고 경비를 보러 직장으로 가야한다.


7) 뜯어진 바지 때문에 그는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자기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세상 바깥으로 퍼져 나간다. 길 건너 노천카페의 웨이터와 손님들에게 그 증오가 뻗어가고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에게도. 급기야 그는 비둘기빛 청회색의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후 5시경, 그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고 차라리 자신이 붕괴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뢰델 씨의 승용차가 나가게 되자 그는 자동적으로 문을 열어주고 인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8)그는 계속 쉬지 않고 걷는다. 보행은 마음을 달래준다. 


9)호텔 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천천히 빵과 포도주를 음미하며 마신다. 내일 자살해야지. 그는 잠에 빠져든다.


10) 그날 밤 악천후는 별안간 천둥번개를 몰아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뜸을 한참씩 들이면서 힘을 오랫동안 질질 끄는 악천후였다. 그러다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천둥이 친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경악을, 그는 경험한다. 천둥 후에 세상은 아주 고요해진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공포에 떤다. 그러다 긴 시간이 자나자 그는 그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구조되기를 기다린다(몽중 또는 선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무슨 소리인가 난다.

 북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요란해지더니 좍좍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는 옷을 입고 호텔을 나간다. 그는 자유 속으로 걸어 나갔다.


11) 그는 비가 그친 길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간다. 그는 젖은 평평한 신발을 가차 없이 철벅거렸고, 물이 한쪽은 가게의 쇼윈도로 또 한쪽은 주차된 자동차로 튀었으며 입고 있던 바짓가랑이로도 튀었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이 비웅덩이 놀이는 아주 어려서 했던, 그의 추억어린 유치한 놀이였다). 

 집 복도에 다다르자 닫혀있는 창문과 공동변소 옆의 대야 위에 말리려고 펼쳐 놓은 걸레가 보인다. 비둘기는 흔적도 없다. 오물도 다 치워져 있고 깃털도 없다. 그가 처음 로카르 부인에게 했던 요청들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그는 누구에게 그렇게 긴 말을 할지도 모르거니와 누군가와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것도 할지 모르던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타인에게 요구하는 말을 했던 것이고 그것은 의외로 다 이루어져 있었다. 스스로도 놀라웠을 것이다)!!




*** 과장된 부분도 있었지만(비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쳤다고 하는 부분) 자신의 방과 경비를 서는 은행 앞 계단 세 칸밖에 모르던 쉰이 넘은 남자가 끔찍한 비둘기 때문에 자신의 방을 처음 떠나게 되고 호텔에 묵으면서 천둥소리에 놀라 죽음을 경험하고 아침에 내린 비로 청순하게 씻긴 건물을 보며 빗물이 웅덩이진 길을 걸으면서 아주 어려서 했던 유치하고 즐거운 물장난을 한다. 그는 이제 꽉 막힌, 언제나 작은 방에만 갇혀 있던 그 답답하고 요지부동인 조나단이 아니다. 심리묘사의 끝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이 희망적이어서 기분이 좋고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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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



 우리 인혜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은 스콧 피츠제럴드라고 한다. 주절주절 관념이나 말장난처럼 늘어지는 문체가 아니라 깔끔하게 서사만 진행되는 게 제일 좋다고. 워낙 책을 안 읽는 아이라 그 애가 제일 좋다고 할 때, 그건 정말 제일 좋은 게 아니라 자신이 읽어본 것 중에 가장 제 스타일에 맞는 걸 말하는 거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보는 눈은 정확한 것 같다. 

 나로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어떤 문체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참 좋았었고 획기적인 내용과 문장이었다는 인식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그런 문체도 흥미로울 테니. 역시 재미있었다. 특히 처음 도입, 전개 부분은 압권이다. 

 아버지 로저 버튼이 아들 벤자민이 탄생한 그날 아침, 병원을 향해 가는 부분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어떤 탄생이기에 그렇게 요란하고 코믹스러운 이야기로 전개되는지 궁금함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경이롭고, 두렵고 혐오스러운, 그러나 과연 아기이 탄생이 어떻게 그렇게 희한할 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마주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희화화하고 로저 버튼을 쑥맥으로 만들어놓는다. 

 그 후의 전개양상은 아버지 로저 버튼이 아들에게 차츰 익숙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비극적인 일도, 경이로운 일도 화젯거리에 불과한 상류사회의 얇고 경박한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스캔들의 주인공도  화젯거리였다가 추락하고 타인들의 무관심 속으로 침잠하지만 그는 한 생을 살아가는 고귀하고 유일한 존재이다.

 삶은 그에게 있어 어떤 식으로든 진행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죽지 않는 한 그럴 수 밖에. 자신만의 삶을 살든, 남들이 살았던 방식을 좇아 살든.... 하지만 벤자민에게 삶은, 남을 좇아 산다해도 방식은 정반대일 수 밖에 없다. 일반적인 삶과는 역행되게 돼있는 그만의 이상한 프로그램 때문에.

 그는 자신의 운명대로 늙은 몸으로 태어나 젊어지다 아주 어린 아기가 되어 죽는다. 역설이면서 동시에 비역설인 것은 그의 몸(외양)은 범인들과 정반대의 상태로 태어나고 죽지만 그 삶은 그래도 상당히 타인들과 비슷했다는 점이다. 

 어려서는(늙어서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외로웠고 젊어서는 쾌락과 일에 매진했으며 늙어서는(어려서는) 타인들의 보호를 필요로 하다 죽을 때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단계에까지 퇴락해 사라진다는 것(소멸)이 그렇다. 

 인간의 삶 대부분이 그러하고 정반대의 패턴으로 태어난 벤자민 버튼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런 삶을 살다 죽었다. ㅠㅠ


차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젤리빈

낙타엉덩이

도자기와 분홍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

......


 11개의 단편 중 위의 ''도자기와 분홍'을 뺀 네 개만 읽고 나머지는 그냥 덮었다. 다른 볼 책은 쌓여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넘어간다.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단편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이 작가는 돈을 벌기 위해(많은 다른 작가들도 그랬지만), 사람들이 읽을 만한 작품을 쓰기 위해 엄청 머리를 굴린 사람으로 보인다. 도가 지나친 향락과 사치를 일삼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내 젤다와의 애증이 얽힌 삶은 끔찍하고 한심하다. 돈과 명예에 집착한 것도 그렇지만 아내와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치졸한 남편이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남자가 여자들보다 훨씬 질투가 심하고 나약하고  치졸한 것 같다. 이런 남자들을 피츠제럴드가 제일 첨단에서 대표해준다.

 하지만 이해도 해볼 수 있다. 거대한 사회라는 벽 앞에 정면으로 맞선 남자에게 살아남기 위해 하는 일들이 어떻게 정의롭고 멋지기만 할 수 있을까. 여자가 세상의 Man이라면(아직 분명히 남자들의 세상이다) 여자들 또한 그렇게 이기적이고 치졸하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쓸지도 모른다.

 쨌든 사람은 동물보다 더 낫기는 고사하고 훨씬 못 미친다. 지성만으로 우월한 의식을 갖는다면 경박하고 얕은 사람이다. 나도 간혹 그런다. 어제는 그래서 동생과 싸웠다. 그애 또한 돈과 권력만 있으면 피츠제럴드 못지 않을 위인이다. 가난과 어려움이 강제되지 않았다면.... 성찰을 한다고 해서 그애와 잘 지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관계만큼 어려운 게 없고 절망할 게 없다.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다이아몬드 산을 둘러싼 한 가정과 그에 딸린 노예들과 그 골짜기...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를 생각하며 인생의 경박함과 슬픔과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게츠비'를 읽을 예정이다. 그러고보니 위대한 게츠비는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한 게츠비인지, 게츠비에게 위대함과 한심함은 앞뒤의 차이, 단순한 뒤집기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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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 넘게 감자가 아팠다. 인혜도 나도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틀 정도는 아예 밤을 새웠다. 감자가 아플 때마다 내 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몇년 간 냉담하는 처지이지만 감자가 아프면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는 나약한 심신에 직접적인 위로가 된다. 다시금 깨달은 바는 어느 정도 설왕설래하는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또는 계기가 되는 시점을 만나게 되면 성당에 다니면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무란 움직이지 않는 존재. 뿌리를 땅 밑 깊숙히 뻗고 바람과 햇빛과 어둠 속에서 자아를 의식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는 존재. 가장 편안하고 쾌적한 이미지를 그리라고 하면 첫번째 이미지가 바로 그런 그림이다. 설렁이는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고 그 바람을 맞아 바람의 방향대로 저항 없이 가지들을 흔들고 이파리들이 춤추는, 평화로운 그림. 

 그림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뜻도 이미 함축돼 있다. 오장육부가 작동하는 한, 감정이 수시로 바뀌고 욕망이 잠재하는 한, 나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무는 자신이 나무인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것. 그런 식물성, 그 지점에 도달하고 싶다. 허나 당위성을 말하는 것 뿐이다. 더 늙고 늙으면 그 지점의 부근쯤에 도달해야 한다는. 

 감자는 다 나았다. 써야 할 글과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 있는데, 게으른 게 문제다.

 그제 180석을 이뤄냈다.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는 입지에 서 있다. 몇 년 뒤에 이 날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손홍규 단편 <투명인간>, <증오의 기원>


<투명인간>- 

 한 가정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생일에 시작된 연극이 점차 깊은 구렁에 빠져드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생일에 어머니와 다 큰 아들, 딸이 생일케이크를 놓고 아버지를 기다린다. 순전히 우연히 장난스럽게 아버지를 곯려주자고 한다. 모두 정말 그러자고 한다. 아버지가 오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자고, 아버지를 놀래주자고.

 아버지가 도착하자 정말 연극을 시작한다. 특히 딸의 연극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완벽하다. 그러자 어머니도 나도(아들) 혼신을 다해 연극을 한다. 정말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는 처음에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앞에 와서 손을 들어보기도 하고 답답함에 핸드폰으로 아들과 부인에게 전화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가족 모두 자신이 보이지 않는지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을 남겨둔 채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아버지는 황당함과 좌절감에 어찌할 줄 모르다 혼자 케잌을 먹고 와인을 마신다. 

 그런데 어머니도 아들도 딸도 그 연극을 그만 둘 수가 없게 된다. 너무 연극에 몰두했기 때문에 갑자기 그 분위기를 깰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연극에 몰입하고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사실 그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오랫동안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로 어떤 압박을 해 온 경향이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자 그들은 그걸 깨달은 것이고 정말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연극을 먼저 그만두지 않자 아버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가족 모두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번뇌 끝에 그는 결국 자신만 실재하는 존재고 나머지 가족은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게 된다. 그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마음대로 생활한다. 아버지는 우울하게 혼자 살아가고, 나머지 가족들 또한 각자만의 삶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각자 살게 된다. 

 아버지의 생일날 시작된 연극이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자신들 전부를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작가가 남자이고 가장이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린 발상같다. 현대의 아버지에 대한, 가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였다. 


<증오의 기원>-

 증오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주인공은 이 사회와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증오의 기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기원은 아주 오래전, 과거와 과거로 소급할 수 있다. 물론 증오심은 자신의 안에서 자라난 것이다. 하지만 내장돼있는 증오는 바깥의 대상이 있어 자라날 환경이 만들어지고 구현된다. 하지만 시각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증오가 아니라 그 뒷면의 연민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도 그런 시각을 몇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증오와 연민은 같은 말일 수도 있으니. 재미에 비해 공감은 별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은 아니었다는 식의 부정적 표현일 뿐이다. 두 번 읽어야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한 면이 큰 것 같다. 그래도 두 번 읽기는 싫었다.



이승우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이미, 어디>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A4 17장, 소챕터20, 시점-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 상황에 따라(작가의 편의와 작의에 따라) 일인칭, 삼인칭으로 바뀐다. 

도입 1. 나는 1년밖에 살지 않을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결말 20.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나(그)는 어떻게 아주 오래 살 수 있게 된 것인가? 나는 사업이 망했었고 그 때 무릎을 꿇리고 모욕을 당했다. 최선을 다해 사업을 했고 파산은 나의 잘못보다 시대적,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그 뒤부터 불면에 시달린다. 아내와 딸이 나 때문에 마음을 써준다. 딸이 나에게 목공학교를 다니라고 했다.

 나는 적참나무 목재로 탁자와 화분대, 의자 등을 만들고 난 후 우연히 널 비슷한 걸 만들게 된다. 그게 널인지는 나도 처음에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직오면체('그런게 있다면')는 우연하게 널이 된다. 그는 널 속에 누우면 잠이 온다. 그 안에서는 아주 편안히 수면하게 된다. 점점 그는 널 속에서 아예 생활한다. 그의 일상용품들이 점점 널 안으로 들어가고 그는 아예 그 곳에서 살게 된다.

 그는 1년밖에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 아주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널 속에서 사니 아주 오래 살 것이라고.... 널은 죽은 후에 담기게 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세상을 잊으니 수면을 취할 수 있고 목숨이 보전될 수 있다. 역설과 아이러니, 삶과 죽음의 자연스런 합체.


 

 이번에 무엇보다 이승우의 단편에서 깨달은 것은 사태(사건)를 기술하는 데 있어 단선적인 한 번의 묘사나 서술로 이야기를 죽 이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번의 <칼>도 (완전히)그렇고, <아주 오래 살 것이다>도, <이미, 어디>도 (완전히)그렇다. 하나의 사태(사건 묘사)를 기술하면서 그 사태를 입체적으로 인식해 한 면과 다른 한 면을 같이 기술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사태에 대해 두 번 이상 기술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서술의 단점은 이야기가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 허나 장점으로써는 이야기가 왠지 관념적으로 느껴지고 상징성을 많이 띠게 된다는 점이다. 

 몇 문장으로 예를 들면(예를 들려고 보니 <아주 오래 살 것...>은 예문 삼을 게 별로 없고 <이미, 어디>에서 발췌해야겠다).




<이미, 어디>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일인가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잔디밭을 달리는 개 역시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잔디 공원을 달리지만 잔디 공원을 달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달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잔디공원을 달린다는 의식 없이 달린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의식이 발을 지배하는지/ 발이 의식을 지배하는지 말할 수 없다.


중간에 슬러쉬를 치지 않고 그냥 한 문단을 옮겨본다.


의자에 앉으면,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책을 읽을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거나 잔디공원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있기 위해 의자에 앉거나 잔디공원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도 가만히 있는 것 같고 가만히 있을 때도 책을 읽는 것 같다. 어떤 사람 눈에는 책을 읽는 모습이 가만히 있는 것 같고 가만히 있는 모습이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걸을 때도 앉아 있는 것 같고 앉아 있을 때도 걷는 것 같다. 어떤 사람 눈에는 걷는 모습이 앉아 있는 것 같고 앉아 있는 모습이 걷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주제문단


 시간은 이미를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간은 쉬지 않고 조금씩 흐르며 이미를 지나갔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시간이 워낙 눈치채지 못하게 흐르기 때문이었다. 이미는 사라지지 않지만 희미해질 것이다. 이미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러나 지나간 시간으로 전재할 것이다. 시간은 나아갈 것이고 이미는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므로 이미는 시간의 뒤에 머물것이다. 그는 중앙도서관에서 이미를 지나간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읽었다.  이미를 지나간 시간은 어디에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이미는 시간의 뒤에서 살고 어디는 새로운 현재를 살 것이다. 그는 이미를 지나간 시간이 거주할 새로운 숙소인 어대에 대해 읽었다. 어디는 이미와 같지 않다고, 어디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거라고 그는 말했다. 무엇이 새로워질지는 모르지만, 이미와는 모든 점에서 다를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미, 어디>를 읽으며 소설의 상징성에 대해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칼>에서 느꼈던 것만큼 흥미로왔다. 또 손이 아프다. 그만 써야겠다. 하긴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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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예전부터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었노라고 생각했었다. 누가? 내가. 언제? 글쎄. 줄거리는? 잘 모르지만 누가 몇 마디 하면 알 것 같아. 이런 식의 안일하고 근거없는 자신이었다. 

 혹시나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시간이 자유로워진 두어 달 전 두 작품의 줄거리를 찾아 읽었다. 그랬더니 제인에어는 읽었고 폭풍의 언덕은 읽지 않았다. 혹시 진짜 치매가 아닐까? 그런데도 치매는 아니란다. 치매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태까지, 그런 인식능력에까지 퇴행하는 거라고 한다(내 표현방식에 의하면).

 

 <폭풍의 언덕>은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중 하나이며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다시 서머싯 몸을 인용하면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그 잔인함을 이토록 강렬하게 표출해낸 작품은 없었'다고.

  

 장편소설의 처음 페이지를 열 때 나는 불안한 정서에 빠진다. 장편소설 독서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가고 그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피곤함을 느낄 때가 많아서이다. 

 이런 나이지만 폭풍의 언덕은 읽기에 어렵지 않았다. 미리 영화를 봤기 때문에 내용도 상황도 쉽게 이해된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그런 편이다. 

 그러나 중반부가 넘어가면서부터 히스클리프 때문에 괴로웠고 불편했다. 어떻게 이렇게 악랄하고 치사할까. 아무리 어려서부터 트라우마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오빠에게, 그 딸에게, 조카에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짜증 때문에 빨리빨리 읽고 싶어서, 끝은 봐야겠기에 할 수 없이 읽은 페이지도 많았다. 

 그래서 결말에 이르고보니 히스클리프 때문에 이제는, 그 외롭고 무뚝뚝하고 열정적인 어리석기까지한 무모함 때문에 가슴이 또 미어지고 만다. 달래 영문학 3대비극으로 꼽힌 것이 아니지 싶다. 

 오랜 기간 사랑하는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실제 많은 커플들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섭고 괴기스런 사랑의 정서는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한데도 마지막에 히스클리프 자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대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랬다는 고백을 들으니 갑자기 허허로와지고 먹장같던 구름이 연기처럼 금새 풀려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고전 명작한테는, 나같이 감성이 얇으면서 충만한, 변덕스럽기가 조삼모사인 나로선 당해낼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죽은 에밀리는 어떻게 이런 남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연애도 해보지 않았다는 작가가 사랑에 눈이 멀고 마음이 꽉 막히고 삶 전체가 그것에만 집중됐던 히스클리프라는 사나이를 어떻게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지하고 놀라운 상상력, 생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어지럽고도 단순함을 통찰해낸 젊은 여자, 에밀리 브론테.... 히스클리프에 대한 미움이 연민으로 변한 건 한 남자의 순정한 사랑 자체가그대로 눈물겨워서였다. 

 

 나는 참 세속적인 사람이다. 에밀리 브론테가 일찍 죽은 것, 그녀의 이 작품이 당대에 전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가 죽은 게 안타깝다. 어떤 예술가라도 그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나로선 기분이 좋다. 죽은 후 유명작가로서 길이 이름을 남긴다 해도 그게 작가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폭풍의 언덕>을 읽은 소감이 이렇게 끝났다. 나는 참 속물적인 인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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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이 작가가 글을 쓰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천천히 기억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쌓여있던 작고 희미한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낸다. 걸려나온 편린들은 작가의 책상 앞에서 서서히 아련하지만 크고 진중하지만 고요한 과거의 시간들로 탈바꿈한다. 

 허나 작가는 그것을 과거의 생생했던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하지 않는다. 조금 사이를 띄고 바라본다. 여유를 가지고 스케치한다. 천천히 그렇게 한가지 한가지 기억을 들추어내면서 그 의미를 지금 시점에서 평가하고 또 과거에 지나쳤던 의미를 되살린다. 뭐랄까. 기억하되 그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간다할까. 

 정직하게 회고되지만, 진정성있게 그려지지만, 한꺼풀 보드라운 천으로 씌워진 듯한, 날 것인 감성이 아니라 잘 숙성된 치즈같이 부드럽고 원숙하고 한편으로는 착한 어린아이같은 문장들로 흥분을 일으키지 않는다. 기억나는 대로 두루뭉실 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읽고나면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글쓰기는 작가의 성격이나 성향 때문에 저절로 형성된 부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글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거리두기에 성공한 까닭이기도 한 것 같다.  

 

 주 사건은 오래전,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닷새간 내 병문안 겸 간호를 위해 들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랫동안 서로의 진심을 나눌 수 없었던 어머니와 내가 이런저런 기억을 서로 나누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가족사를 되새겨보게 된다. 한 가족이면서도 비정상적인 가족이었던 그들의 가난과 고달픔, 열등감 등이 조금씩 독자의 뇌리에 안타깝게 쌓여간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루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들을 떠나왔고, 어느덧 어느정도 성공한, 평범한 중산층 주부가 되어있다. 그리고 서서히 작가로서의 입지도 다지고 있다. 

 어머니와 딸인 루시는 닷새동안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는 나누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녀의 이별은, 정상적인 중산층 모녀의 이별과 아주 다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그런 가정도 꽤 많다. 독자로서는 루시 바턴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면서도 생의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다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페이지 221, 여백이 많아 장편치곤 아주 짧았다. 대부분의 문장이 심심하면서 담백한, 몸에 좋은 나물과 밥으로 한 상 차린, 소박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식사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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