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예전부터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었노라고 생각했었다. 누가? 내가. 언제? 글쎄. 줄거리는? 잘 모르지만 누가 몇 마디 하면 알 것 같아. 이런 식의 안일하고 근거없는 자신이었다. 

 혹시나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시간이 자유로워진 두어 달 전 두 작품의 줄거리를 찾아 읽었다. 그랬더니 제인에어는 읽었고 폭풍의 언덕은 읽지 않았다. 혹시 진짜 치매가 아닐까? 그런데도 치매는 아니란다. 치매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태까지, 그런 인식능력에까지 퇴행하는 거라고 한다(내 표현방식에 의하면).

 

 <폭풍의 언덕>은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중 하나이며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다시 서머싯 몸을 인용하면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그 잔인함을 이토록 강렬하게 표출해낸 작품은 없었'다고.

  

 장편소설의 처음 페이지를 열 때 나는 불안한 정서에 빠진다. 장편소설 독서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가고 그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피곤함을 느낄 때가 많아서이다. 

 이런 나이지만 폭풍의 언덕은 읽기에 어렵지 않았다. 미리 영화를 봤기 때문에 내용도 상황도 쉽게 이해된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그런 편이다. 

 그러나 중반부가 넘어가면서부터 히스클리프 때문에 괴로웠고 불편했다. 어떻게 이렇게 악랄하고 치사할까. 아무리 어려서부터 트라우마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오빠에게, 그 딸에게, 조카에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짜증 때문에 빨리빨리 읽고 싶어서, 끝은 봐야겠기에 할 수 없이 읽은 페이지도 많았다. 

 그래서 결말에 이르고보니 히스클리프 때문에 이제는, 그 외롭고 무뚝뚝하고 열정적인 어리석기까지한 무모함 때문에 가슴이 또 미어지고 만다. 달래 영문학 3대비극으로 꼽힌 것이 아니지 싶다. 

 오랜 기간 사랑하는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실제 많은 커플들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섭고 괴기스런 사랑의 정서는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한데도 마지막에 히스클리프 자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대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랬다는 고백을 들으니 갑자기 허허로와지고 먹장같던 구름이 연기처럼 금새 풀려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고전 명작한테는, 나같이 감성이 얇으면서 충만한, 변덕스럽기가 조삼모사인 나로선 당해낼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죽은 에밀리는 어떻게 이런 남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연애도 해보지 않았다는 작가가 사랑에 눈이 멀고 마음이 꽉 막히고 삶 전체가 그것에만 집중됐던 히스클리프라는 사나이를 어떻게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지하고 놀라운 상상력, 생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어지럽고도 단순함을 통찰해낸 젊은 여자, 에밀리 브론테.... 히스클리프에 대한 미움이 연민으로 변한 건 한 남자의 순정한 사랑 자체가그대로 눈물겨워서였다. 

 

 나는 참 세속적인 사람이다. 에밀리 브론테가 일찍 죽은 것, 그녀의 이 작품이 당대에 전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가 죽은 게 안타깝다. 어떤 예술가라도 그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나로선 기분이 좋다. 죽은 후 유명작가로서 길이 이름을 남긴다 해도 그게 작가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폭풍의 언덕>을 읽은 소감이 이렇게 끝났다. 나는 참 속물적인 인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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