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어제 이어 <로시니, 혹은 누가.....> 의 중반부터 끝까지를 기록하기로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의 뒷부분들인데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 중 일부를 옮겨온다.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헬무트 카라제크와 헬무트 디틀의 대담
카라제크 이 영화는 뭘 다루고 있는 건가요? 멜로드라마? 코미디? 비극? 아니면 허영의 전시장인가요?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인생 무상에 대한 안타까움인가요? 아니면 공허함이나 시간에 대한 눈물을 조롱하는 건가요?
디틀 한편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요. 인생이 항상 그렇듯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서로 뒤엉켜 하나의 멜로드라마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아주 나쁜 일과 코믹한 일, 진부한 일과 추악한 일, 감동적인 일이 서로 뒤엉켜서 말입니다. 물론 그것들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문제들입니다.
그 시구는 볼프 본드라체크의 장편 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라는 영화 부제목에 대한 답변)
사람들은 마치 허기나 갈증을 달래듯이 인생도 그런 식으로 달래거든요. 뜨거운 열정이나 욕정도 그런 식으로 계속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 그건 일종의 진정제라는 사실을 배웠지만요.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지요.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물론 그 영화는 코믹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극적이지요. 그 영화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파트리크와 저는 순차적으로 하나씩 보여 주는 걸 피했습니다. 그건 너무 지루하니까요. 그 대신 우린 하나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다른 것도 그 안에 포함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의 감정, 하나의 분위기가 갖고 있는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경험을 전형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약간 고상하게 말하면 그는 현실에서 진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실제 인생, 현실의 인생과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주인공들에 대한 당신의 애정과 헌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애정과 헌신이 맹목적이지 않다는 점이지요. 애정과 헌신은 오히려 당신이 사랑하는 인물들의 약점, 결핍, 잔인함, 우스꽝스러움 등을 철저하게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은데요.
나는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환경, 즉 그 발생학적인 모범의 희생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환경이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 그러면 어느 누구도 완전히 저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환상의 희생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뭔가를 믿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거요. 한편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 것은 특히 낭만적인 맹목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은 날마다 환상을 잃어버리고 또 항상 새로운 환상을 찾아 나섭니다.
환상은 물론 기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촛불은 가장 아름다운 조명이더군요. 촛불은 아름다움과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 또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입니다. 그녀의 경우에는 개인 생활과 직업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배우이고, 어디까지 그냥 여자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므로 백설공주라는 인물을 전통적인 도덕관념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그녀를 파악할 수없습니다.
....멀리는 니체의 생의 도덕이 연상될 정도로요.
영화에서는 조명, 의상, 변장, 화려함을 통해 동화적 특성이 생겨납니다. 동화는 비유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항상 동화를 넘어서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지요. 가끔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운이 좋을 경우에는 일종의 시적 현실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물론 시적 현실 역시 주관적인 진실로 나아가지만요.
난 <로시니>가 풍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상세한 성격 묘사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풍자를 즐겨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치면 풍자는 캐리커처 같은 거지요. 모든 것을 그렇게 단순화시키면 실제적으로, 즉 다층적이고 미세하게 인간과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간격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 난 발전이라는 걸 믿었고, 나 자신도 믿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매번 난 새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시나리오)
이 작품은 자세한 줄거리를 꿰어낼 수 없다. 대략적인 스케치 정도만 알아두어도 괜찮겠다.
<로시니>라는 레스토랑에서 며칠 밤(잘 모르겠다. 하루인지 이삼일인지)에 일어나는 단골 고객들과 주인인 로시니와의 여러 사건들. 물론 로시니에서만 이야기가 다 진행될 수는 없고 최소한의 장소들, 치고이너의 네번째 부인은 멀리에서 남편과 전화를 하고 그녀의 연인인 장 뤽이 옆에 있다. 발레리가 죽었을 때 그녀의 욕실 장면, 반디슈의 집도 두어번 등장하고 칠리와 백설공주가 함께 기거하던 극장과 극장 뒤 허름한 주거지도 나온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음란하고 코믹하고 엉뚱한 삼각관계, 그러나 그 결과는 발레리의 자살로 귀결된다. 그리고도 그 두 남자는 그 후에도 잘 살면서(?) 다시 백설공주가 발레리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생의 유치함이여! 씁쓸하고 무상하다.
백설공주는 단번에 반한 치고이너와의 삶을 코앞에 두고 그를 배신한다. 그녀에게는 안락한 가정과 열정적인 사랑(참사랑)보다 배우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크고 중요하였으므로.
백설공주에게 한 눈에 반한 로시니는 가루약. 물약, 알약, 그리고 좌약까지 먹고 집어넣는다. 그녀와의 섹스를 위해서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그러니 발기하는 약?). 그러나 그녀는 그의 바로 레스토랑 옆에서 갑자기 치고이너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칠리는 레즈비언으로서 백설공주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은 다시 로시니에서 이전과 유사한 행동들을 하며 산다. 마스터와 치고이너는 영화제작을 위한 대화를 나누고, 반디슈는 웨이트리스 세라피나를 무서워하면서도 별실을 드나들고 백설공주는 마스터와 크리크니츠 사이에 앉아 있다. 샤를로테는 남자를 밝히지만 그녀는 그래도 일하는 기자로써의 본분을 갖고 있고. 성형외과 의사는 장차 고객이 될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로시니는 고객들을 모시며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고, 그런데도 그런 흐름들은 영원히 지속된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의 시나리오 뒤, 맨 마지막 몇십 장은 실제 영화 속 장면들이 스틸로 실려있다.
그러니까 이 책 <로시니, 누가......>는 영화의 전부터 후까지의 모든 것을 문자로 담고 있는 셈이다. 영화학도들이 보아도 좋을 책인 것 같다. 쥐스킨트에게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