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향수>를 읽었다. 당연히 쥐스킨트의 대표작이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또 소설적 완성도나 예술성에서 <향수>는 문학예술의 최고봉을 점하고 있다. 이 책은 85년 출간되어 3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적으로 15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향기 하나로 인생을 점철한 한 남자의 고독하고 불행한 이야기가 향수의 스토리이다. 

 

 1738년 7월 17일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태어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모질게 불운한 여자가 다섯 번째 어린애를 시장통 구석에서 낳고 스스로 태를 자른다. 그녀는  네 번이나 애를 낳았고 그 애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이 다섯 번째 애도 죽을 거라 생각해 잘린 생선 머리들 사이에 처박아버린다. 그러나 그녀가 쓰러지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생선 속에 버려진 아이가 구출된다. 아이 엄마는 아이들을 넷이나 죽였다는 죄로 광장에서 처형되고 아이는 수도원 신부가 유모를 구해 키워준다. 아이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런데 아이는 이상하다.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냄새가 없다는 것. 그래서인지 아이는 귀엽고 불쌍한 게 아니라 끔찍하고 공포스러웠다. 여덟 살이 되자 아이는 버려지고 이후로 무두장이의 심부름꾼이 되어 큰다. 그러다 그르누이는 열악한 작업장에서 탄저병에 걸려 목숨이 끊어질 만큼 위태로운 가운데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키가 작고 등에 혹이 있는 것처럼 구부정한데다 얼굴과 목과 어깨에 얼룩덜룩한 반점마저 있어 일반인들에게 기피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놀라운 재능이랄까 특이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냄새나 향기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다. 그는 냄새나 향기를 맡으면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하는 비상함과 남들은 맡지 못하는 아주 실낱같이 멀리서 날아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점점 향을 맡으러 도시를 돌아다니고 냄새를 수집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자기 안에서 분류하고 조합한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왜 그르누이는 냄새가 없을까. 인간이면 누구나 특유의 냄새가 있고 땀을 흘리면 땀내가 나고 피를 흘리면 피냄새가 난다. 근데 작가는 어째서 냄새 없는 주인공을 창조해냈을까. 그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결핍'이라는 문제를 '향기'로 끄집어낸 게 아닐까. 자신을 다른 인간들에게서 소외시키고 평생 외로움과 열등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르누이는 동일시될 만한 인간상이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무두장에서 커다란 향수판매점으로 옮겨가고 거기서부터 자기만의 재능을 홀로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는 증류하는 법과 수많은 향수의 재료를 알게 되고 향기를 찾아 도시를 배회하다 너무나 특별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우연히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향기를 지닌 소녀를 죽이게 된다. 그는 오직 그녀의 향기를 가지려고 살인을 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전무했다. 


 배울 걸 다 배운 그는 향수점을 떠난다. 그리고 7년간 산에서 혼자 산다. 그는 그만큼 인간을 증오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혼자만의 낙원에서 살던 그는 어느날 안개에 갇혀 헤매는 꿈을 꾼다. 그 안개는 그의 체취. 그런데 그의 체취 자체인 안개에서는 어떤 냄새도 없다. 그는 안개 속에서 괴로워 날뛰다 비명을 지르고 깨어난다. 그로써 드높은 산 위에서의 안락한 삶은 끝난다.


 그는 세상으로 내려와 다시 향수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해졌다. 그가 만들고 싶은 향수는 사람냄새. 다른 이들과 같은 냄새를 가진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가지의 다양한 인간의 냄새. 남들에게 관심을 받지 않는 약하고 흐린 인간의 냄새, 누구나 맡으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마법같은 향기로운 냄새 등....

 

 그는 그런 향기를 만들어 자신에게 바른다. 그러자 그의 오랜 컴플렉스였던 무취의 그가 타인들과 같은 사람이 된다. 그러다 오래 전 향기를 독차지하기 위해 한 소녀를 죽였던 것처럼 소녀에서 여인이 되려는 여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그녀들을 죽이고 냄새를 채취하면서 살인은 스물다섯 번 자행된다. 목표였던 모든 향수를 결국 다 만들게 그르누이.


 그르누이가 만든 최고의 향수는 결국 인간냄새.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스스로만 알게 된다. 그러니 그르누이의 불행은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인간다운 삶이라는 역설이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가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인간으로 태어났다해서 다 인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다. 향수를 뿌려서 자신의 악취를 덮고 인간다운 척 해봐야 그건 가면을 쓰고 자신의 얼굴을 가려야만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향수, 가면, 권위, 재산, 학식, 미모, 권력 등등...... 그런 것들에 자신을 기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자신 자체로 온전히 행복할 때라야 진정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 도를 닦는 일, 수련은 인간이면 언젠가는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죽기 전에 자신의 본질에 도달해야....

 

 다시 그르누이로 돌아가면, 

 그러나 그의 스물다섯 번째의 살인은 발각되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광장의 처형대에서(십자가 처형) 죽어야할 운명이 된다. 그러나 그가 광장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매료되고 그들은 그를 살인자가 아닌 사랑스러운 인간이라고 믿게 된다.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향수가 있지 않은가. 그 향수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환락을 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마법같은 향기로 인해 환각상태에 빠진 인간들에게서 죽음을 면한다. 그러나 그는 갈 곳이 없다. 산 위에서 혼자 7년을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자신을 그 곳에서 몰아냈다. 인간 세상에 돌아와서 살아봤지만 "사람들은 어디서나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죽기로 하고 파리를 찾아간다. 

 

 이노셍 묘지에 다다른다. 그곳은 갈 곳이 없는 천민들이 밤마다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가 향수병을 열자 그들은 그를 파란 옷의  천사라 생각하고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흡인력에 끌려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차지하려고 싸운다. 그리고는 그들은 종내는 그를 죽이고 잘라서 나눠먹는다. 그런데 그런 후에도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당당하다.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향기 하나를 소재 삼아 쓴 소설이 이렇듯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8세기의 파리와 지방 도시들, 당시의 사람들과 사회상을 재연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열심히 자료를 모았는지 알 만하다. 이 작품을 쓸 때 쥐스킨트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18세기의 파리 지도가 붙어있었고 향수의 도시 그라스를 몇 차례나 방문했다고 한다. 향수를 만드는 과정 또한 구체적이고 리얼하다. 치밀한 쥐스킨트의 작가정신이 이 작품에서 정말 향기롭게 폭죽처럼 터진다. top 10에 끼워둘 수작이다. 


 내일은 <향수>에서 경탄 그 자체였던 문장들을 옮겨 적으려 한다. 책 전체가 경탄 자체이지만 그래도 쥐스킨트의 놀라운 문장들을 다시 대면하기 위해 책을 들춰가며 베껴 적으련다. 쥐스킨트는 천재다. 예술가다. 그는 작가 아닌 다른 방면의 사람일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작가는 사람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도 쥐스킨트는 나의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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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2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 나무감사드립니다. 영화로만 봤는데 책 읽기에 추가합니다. 쥐스킨트의 단편만 봤었어요 :-)

lea266 2020-08-2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을 만한 책이예요 쥐스킨트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소재로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건 자신을 온전히 집중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할 거예요
별것 아닌 글에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아주 오래전,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그들의 문장은 어쩌면 그렇게 정갈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내가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도 완전하게 표현해주고 있는지, 눈에 보이듯 풍광과 사물을 그려내는 그들의 문장이 놀라웠다.

 아직도 나는 그런 글에 놀라워 하지만 이제는 지향이 조금 바뀌었다. 기막힌 상상력이나 세상을 아우르는 지식과 사유에 더 외경을 느끼고 부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 부러움은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그 부러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장 자체와 묘사, 그것을 배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제 배우려고 애를 써도 배울 수 없는, 과연 그 꼬리의 한 자락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지 아연한 것은 작가들의 방대한 지식과 사유, 그들의 머릿속에 차있는 의식들이다. 

 <소립자> 의 작가, 미셸 우엘벡은 역사와 과학과 철학과 풍속을 넘나든다. 포르노적인 묘사도 서슴지 않고 보통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물리학적 지식도 펼쳐놓는다. 그렇다고 모든 게 좋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브뤼노의 행태를 묘사하기 위해 수많은 성적 일탈이 이어지는데, 그게 브뤼노를 이해하기 위한 포르노인지 포르노를  위한 브뤼노의 일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범적으로 조용하게 살아온 이 땅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프랑스 지식인인 작가의 표현들이 자못 심각하고 신선하게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다 읽었고 밑줄을 그었고 놀라워했고 배운 게 많았다.


1.  두 주인공은 성격이 아주 다른 이부형제다.  

 형 브뤼노와 동생 미셀은 히피들과 만년을 함께한 어머니 잔느의 아들들. 브뤼노와 미셀은 부모없는 아이들처럼 할머니와 외할머니 손에 자란다. 브뤼노는 성공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기숙학교에서 심각한 외상을 입게 되는 왕따를 당하고 정신적 장애인(?)이 된다. 동생 미셸은 감정이나 욕구가 없는 사람처럼 건조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는 자신이 인간적 감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란다. 그는 공부벌레이다. 

2.  그 성격들처럼 그들의 애정관이나 삶의 방향도 완전히 대비된다.

브뤼노는 오랫동안 콤플렉스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한다. 미셸은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어떤 성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 결국 여자친구 아나벨은 자유롭고 이기적인 다른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3. 브뤼노는 나이가 들면서 여자를 찾아 떠도는 변태 아닌 변태적인 행위로 세월을 흘려보낸다.

미셸은 아나벨을 떠나보내고 연구자로써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외롭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외롭다. 그러나 그건 독자가 느끼는 감정일 뿐, 그는 아주 무심하고 평화로울 정도로 무감하다.

4. 그들도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섰다. 브뤼노는 드디어 사랑할만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크리스티안)는 너그럽고 다정한 여자다. 그녀는 브뤼노를 위해 천상의 섹스천국쯤 되는 곳으로 그를 이끌어준다. 그룹 섹스가 이루어지는 곳, 성이 공산주의 식으로 모두와 공유된다. 브뤼노는 자신이 원하던 최상의 것을 가진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쓰러진다. 그녀는 몸이 마비되고 아들과 임대아파트로 떠나지만 며칠 뒤 죽는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 그녀로 인해 자유를 누려보았고 가져보았다. 

 미셸은 아나벨을 20년(23년?) 뒤에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를 통해 따듯한 인간적 사랑을 되찾게 되지만 아나벨 역시 자궁암으로 죽는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5.  두 형제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된다. 브뤼노는 반미친 상태에서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을 뱉고 미셸은 아주 객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어머니를 지켜본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그들은 헤어진다. 서로 예감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6. 브뤼노는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미셸은 아일랜드의 연구소로 떠난다. 그 곳에서 미셸은 인간이 겪어야 되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조화를 이루지못하는 사랑과 성을 평화롭게 나눌 수 있는, 폭력과 전쟁을 내재한 인간의 DNA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리고 그 연구가 완성된 후, 그는 사라진다.

7. 미셸이 보낸 편지와 연구 논문은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와 실제 실험으로 몇 십 년 뒤 공식화되고 체제가 만들어진다. 미셸의 연구는 현 인류의 문제점을 개선한 새로운 인류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낸 것이다. 형상은 인류 그대로이지만 인류의 모든 악과 고통을 해결한 미셸.

8. 그 새로운 종은 미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어 이 책<소립자>를 지어 형상만으로는 자신들의 조상인 인류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없고 성차가 없다. 성감대는 몸 전체에 퍼져있어 충격적이고 가학피학적인 섹스가 없어도 쾌락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은 평화롭고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들은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다. 그들은 미셸을 잊지 않기 위해 <소립자>를 지었다. 


미셸은 작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가. 아무튼 놀라운, 기발하고 차원이 다른 작가다. 나야말로 그 새로운 종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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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8-23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아주 궁금했는데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읽고 싶어요. ㅎㅎㅎㅎ

lea266 2020-08-24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작가의 이과적 지식도남다른 것 같구요. 참 배울게 많은 작품입니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어제 이어 <로시니, 혹은 누가.....> 의 중반부터 끝까지를 기록하기로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의 뒷부분들인데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 중 일부를 옮겨온다.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헬무트 카라제크와 헬무트 디틀의 대담


카라제크 이 영화는 뭘 다루고 있는 건가요? 멜로드라마? 코미디? 비극? 아니면 허영의 전시장인가요?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인생 무상에 대한 안타까움인가요? 아니면 공허함이나 시간에 대한 눈물을 조롱하는 건가요?

디틀 한편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요. 인생이 항상 그렇듯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서로 뒤엉켜 하나의 멜로드라마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아주 나쁜 일과 코믹한 일, 진부한 일과 추악한 일, 감동적인 일이 서로 뒤엉켜서 말입니다. 물론 그것들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문제들입니다. 


그 시구는 볼프 본드라체크의 장편 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라는 영화 부제목에 대한 답변)


사람들은 마치 허기나 갈증을 달래듯이 인생도 그런 식으로 달래거든요. 뜨거운 열정이나 욕정도 그런 식으로 계속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 그건 일종의 진정제라는 사실을 배웠지만요.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지요.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물론 그 영화는 코믹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극적이지요. 그 영화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파트리크와 저는 순차적으로 하나씩 보여 주는 걸 피했습니다. 그건 너무 지루하니까요. 그 대신 우린 하나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다른 것도 그 안에 포함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의 감정, 하나의 분위기가 갖고 있는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경험을 전형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약간 고상하게 말하면 그는 현실에서 진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실제 인생, 현실의 인생과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주인공들에 대한 당신의 애정과 헌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애정과 헌신이 맹목적이지 않다는 점이지요. 애정과 헌신은 오히려 당신이 사랑하는 인물들의 약점, 결핍, 잔인함, 우스꽝스러움 등을 철저하게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은데요.


나는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환경, 즉 그 발생학적인 모범의 희생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환경이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 그러면 어느 누구도 완전히 저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환상의 희생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뭔가를 믿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거요. 한편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 것은 특히 낭만적인 맹목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은 날마다 환상을 잃어버리고 또 항상 새로운 환상을 찾아 나섭니다. 


환상은 물론 기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촛불은 가장 아름다운 조명이더군요. 촛불은 아름다움과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 또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입니다. 그녀의 경우에는 개인 생활과 직업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배우이고, 어디까지 그냥 여자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므로 백설공주라는 인물을 전통적인 도덕관념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그녀를 파악할 수없습니다.


....멀리는 니체의 생의 도덕이 연상될 정도로요.


영화에서는 조명, 의상, 변장, 화려함을 통해 동화적 특성이 생겨납니다. 동화는 비유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항상 동화를 넘어서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지요. 가끔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운이 좋을 경우에는 일종의 시적 현실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물론 시적 현실 역시 주관적인 진실로 나아가지만요.


난 <로시니>가 풍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상세한 성격 묘사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풍자를 즐겨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치면 풍자는 캐리커처 같은 거지요. 모든 것을 그렇게 단순화시키면 실제적으로, 즉 다층적이고 미세하게 인간과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간격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 난 발전이라는 걸 믿었고, 나 자신도 믿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매번 난 새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시나리오)


이 작품은 자세한 줄거리를 꿰어낼 수 없다. 대략적인 스케치 정도만 알아두어도 괜찮겠다.

<로시니>라는 레스토랑에서 며칠 밤(잘 모르겠다. 하루인지 이삼일인지)에 일어나는 단골 고객들과 주인인 로시니와의 여러 사건들. 물론 로시니에서만 이야기가 다 진행될 수는 없고 최소한의 장소들, 치고이너의 네번째 부인은 멀리에서 남편과 전화를 하고 그녀의 연인인 장 뤽이 옆에 있다. 발레리가 죽었을 때 그녀의 욕실 장면, 반디슈의 집도 두어번 등장하고 칠리와 백설공주가 함께 기거하던 극장과 극장 뒤 허름한 주거지도 나온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음란하고 코믹하고 엉뚱한 삼각관계, 그러나 그 결과는 발레리의 자살로 귀결된다. 그리고도 그 두 남자는 그 후에도 잘 살면서(?) 다시 백설공주가 발레리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생의 유치함이여! 씁쓸하고 무상하다.

백설공주는 단번에 반한 치고이너와의 삶을 코앞에 두고 그를 배신한다. 그녀에게는 안락한 가정과 열정적인 사랑(참사랑)보다 배우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크고 중요하였으므로.

백설공주에게 한 눈에 반한 로시니는 가루약. 물약, 알약, 그리고 좌약까지 먹고 집어넣는다. 그녀와의 섹스를 위해서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그러니 발기하는 약?). 그러나 그녀는 그의 바로 레스토랑 옆에서 갑자기 치고이너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칠리는 레즈비언으로서 백설공주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은 다시 로시니에서 이전과 유사한 행동들을 하며 산다. 마스터와 치고이너는 영화제작을 위한 대화를 나누고, 반디슈는 웨이트리스 세라피나를 무서워하면서도 별실을 드나들고 백설공주는 마스터와 크리크니츠 사이에 앉아 있다. 샤를로테는 남자를 밝히지만 그녀는 그래도 일하는 기자로써의 본분을 갖고 있고. 성형외과 의사는 장차 고객이 될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로시니는 고객들을 모시며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고, 그런데도 그런 흐름들은 영원히 지속된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의 시나리오 뒤, 맨 마지막 몇십 장은 실제 영화 속 장면들이 스틸로 실려있다. 

그러니까 이 책 <로시니, 누가......>는 영화의 전부터 후까지의 모든 것을 문자로 담고 있는 셈이다. 영화학도들이 보아도 좋을 책인 것 같다. 쥐스킨트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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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이 책은 버라이어티하다.  

 작가와 영화감독 둘이서 <로시니 혹은 누가 누가와 잤는가....> 시나리오를 썼다.  이 책 뒤에 시나리오가 실려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는 과정이 몇 년 걸렸다.

 촬영이 끝난 후 작가는 그 과정 전부를 에세이로 썼다. 이 책 맨 앞에 실린 에세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이다.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감독은 영화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그게 바로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챕터이다. 

그러니 이 책은 친구인 두 남자가 영화 <로시니 혹은....>를 만들기 위한 시작과 과정 그리고 그 후까지를 상세히 담고 있다고 할 만하다.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


 1992년 여름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헬무트 디틀은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우리 다시 한번 공동 작업을 해보는 게 어떨가? ........올 가을에 몇 주 정도만 시간을 내면 될 거야!" 그러나 계획은 "어떤 달갑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지 그 당시에는 확실하게 몰랐다."

 1993년 7월 29일 쥐스킨트는 달력에 <제 1장 완료(약 26페이지)>라고 기록했다. "여덟 달 동안 고작 26페이지밖에 안 썼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수백 페이지 넘게 시나리오를 썼다. 열 번 넘게 구상을 했고 그 구상에 따라 어렵사리 초고를 만들어 냈으며, 그 후에는 그 원고를 수정하고 새로운 구상을 덧붙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고를 포기했다. "우리가 다시 시나리오 초고를 타이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1년 2개월이 더 지나서였다."

 "1995년에 우리는 두,세,네 번째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몇 번째 원고인지 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실린 원고는 1995년 11월에 완성된 것으로서, 여덟 번째 원고이다. 물론 그게 확실한지는 모르겠고 높다랗게 쌓여 있는 원고 더미에서 더 이상 그걸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마지막 원고에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원하는 것은 많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존재다." 대작가와 유명감독이 공동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 이렇게 어렵고 혼돈 자체였다니 나로선 놀랍고 한편 아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보라! 흡입력이 무서운 작가 쥐스킨트와 노련한 감독도 이렇게 시나리오 한 편을 힘들게, 발걸음을 떼었다는 데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창작의 길은 멀고 험난하고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알려준다. 그러니 근심은 넣어두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라는 지상명령이 엄혹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우리는 냉정하고 고통스럽고 더 이상 아무 즐거움도, 희망도 없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게댜가 이 단계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날마다 오전 열한 시부터 책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마티니 대신 홍차를 마시면서 인물을 구상하고, 인물들의 관계를 설정해 보고, 장면들을 생각해 내고, 장면과 장면들을 연결시켰다. 가끔 영화 줄거리의 흐름이나 소위 트리트먼트라고 하는 전체적인 개요도 작성해 봤다.

 ........한 달 반 뒤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우리가 써놓은 것을 읽어 보았다. 완전히 실패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 원고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지루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초보자의 실수투성이었다. 가장 진부한 실수는 바로 장면마다 모두 발단 전개 지체 절정 하강의 단계를 갖는 독립적인 촌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근본적인 실수는 인물들을 너무 자세하게 반복적으로 그렸다는 점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아마추어가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마지못해 성공적인 인물이나 장면들과 이별했다! 작가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들을 붙잡아 끌고 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은 좋은 장면 하나를 구하려다 영화 전체의 구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혹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위해서 이 아름다운 장면을 꼭 버려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에 부딪힌다. 이것은 결코 수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전체 구성을 위해 마음에 드는 인물이나 장면을 버려야 할 겨우가 여러번 생겼고 그로 인해 점차 불안감과 불쾌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좋은 장면들만으로는 결코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벌써 경험으로 알고 있잖아. 바로 그것 때문에 실패한 적이 있었던 걸 잊었어?""


 수많은 우여곡절과 좌절을 겪으면서 그들은 결국 배역을 결정하고 영화를 찍었다. 그 과정 또한 시나리오를 쓰던 때와 다르지 않게 어렵고 진빠지는 일이었다. 쥐스킨트는 촬영장에서 사라져 혼자 이 에세이 '영화는 전쟁이다!'를 써야했다. 그러니 촬영장에서의 선봉장의 역할은 디틀이 대부분 했다고. 감독이라는 자질도 태어나는 것 같다. 쥐스킨트가 작가로서의 자질을 지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잘 하고 해야될 역할이 따로 있다.

 쥐스킨트는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가 얼마나 살아있는 작품의 주요 요소인지를 깨닫게 된다. 배우의 눈빛 하나만 앵글에 잡혀도 이야기의 전후가 설명되어지니 말이다. 몇 장의 시나리오보다 배우의 뒷모습 하나, 표정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주제를 전할 수 있다. 그것을 이 작가는 깨닫고 자신들의 시나리오는 기본적인 설계일 뿐, 촬영장에서는 또다른 이야기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불안과 놀라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또, 어쩌면 더 놀라운 것은 다 찍은 필름을 편집해놓고 보니 자신들이 썼던 시나리오의 모든 것이 영상에 모두 표현돼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작품의 인물에 녹아 연기를 펼치기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배우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는지 나로서도 충분히 추측이 되었다.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로 한 작품의 구성요소가 되는 걸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역할이 있고 그걸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전제도 믿음도 필요하다. 저번에 읽은 <콘트라베이스>의 주자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 혼자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살고 있다는 건 오만이며 망상이다. 


이 책은 정말 유익한 책이므로 다음에 또 읽을 작정이다. 뒤의 대담과 시나리오는 내일 다시 다루어야겠다. 지금 나는 나갈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쥐스킨트는 비둘기 첫 작품부터(내가 읽기로 첫) 내 최애 작가의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나는 이 작가를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닮고 싶고 그의 작품 전부를 읽고 싶다. 나는 쥐스킨트를 이제야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내 보물 작가가 됐다. 이 작가는 내게 절망과 한숨을 자꾸 선물한다. ㅠㅠ 안녕, 쥐스킨트,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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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단편 4 편이 묶인 소설집이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문학적 건망증



깊이에의 강요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여자 화가에게 어느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화가는 평론가의 말을 앶어버렸지만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린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화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뒤적여보고 유심히 살펴본다.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 비평가가 했던 말을 주고 받는다. 깊이가 없다고.다음 주 내내 그녀는 그림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려 시도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 번째 주 그녀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가장 깊이 있는 책을 산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점점 피폐하게 변해간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영락하게 됐다. 그녀는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은 스캔들이 되어 대중지들은 집중적인 보도를 한다. 

그 비평가는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한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정말, 비평가, 때려주고 싶다.




승부


노련하고 끈기있는 늙은 체스의 고수와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과의 한판 승부.

고수는 정석대로 침착하게 하나하나 자신이 오랜 세월 두어왔던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하지만 청년은 둘러선 구경꾼들이 놀라워 할 체스를 둔다. 그것은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너무나 무모하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운 방식이다. 구경꾼들은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청년을 응원한다. 그러나 결과는 도전자의 완전한 패배. 그러나 청년은 애석해하지 않으면서 일어선다.

구경꾼들은 그를 응원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은 멋적어하며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체스의 고수인 노인은 체스에서는 이겼지만 다른 면에서는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그는 영영 체스를 두지 않는다.


노인의 해묵은, 습관적인 방식과 젊은이의 무모한 용기와 패배를 처음부터 끝까지 대비시킨 상징적인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


뮈사르라는 금세공사 장인이 말년에 정원을 만들다 발견하게 된 엄청난 비밀.

지구가 조개화되어간다는 놀라운 사실. 조개화되면 땅이 석회화되어 불모지가 되고.... 

작가에게는 재미있을 소재였겠지만 나로선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구가 터전인 우리로서는 끔찍할 일이다. 지구는 결국 멸망하겠지만.




문학적 건망증


단편 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에 속할 만한 글이다. 내게는 아주 위로가 되는 글이었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특히나 읽고 쓰기를 잘하고 싶은 문학을 업으로, 문학의 주변인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글.


"수치스러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30년 전 나는 글읽는 것을 배웠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웬만큼은 읽었다. 그런데 고작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소설 2권에서 누군가가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희미한 기억이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결말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처음을 잊어버린다."

but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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