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단편 4 편이 묶인 소설집이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문학적 건망증
깊이에의 강요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여자 화가에게 어느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화가는 평론가의 말을 앶어버렸지만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린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화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뒤적여보고 유심히 살펴본다.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 비평가가 했던 말을 주고 받는다. 깊이가 없다고.다음 주 내내 그녀는 그림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려 시도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 번째 주 그녀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가장 깊이 있는 책을 산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점점 피폐하게 변해간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영락하게 됐다. 그녀는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은 스캔들이 되어 대중지들은 집중적인 보도를 한다.
그 비평가는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한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정말, 비평가, 때려주고 싶다.
승부
노련하고 끈기있는 늙은 체스의 고수와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과의 한판 승부.
고수는 정석대로 침착하게 하나하나 자신이 오랜 세월 두어왔던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하지만 청년은 둘러선 구경꾼들이 놀라워 할 체스를 둔다. 그것은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너무나 무모하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운 방식이다. 구경꾼들은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청년을 응원한다. 그러나 결과는 도전자의 완전한 패배. 그러나 청년은 애석해하지 않으면서 일어선다.
구경꾼들은 그를 응원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은 멋적어하며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체스의 고수인 노인은 체스에서는 이겼지만 다른 면에서는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그는 영영 체스를 두지 않는다.
노인의 해묵은, 습관적인 방식과 젊은이의 무모한 용기와 패배를 처음부터 끝까지 대비시킨 상징적인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
뮈사르라는 금세공사 장인이 말년에 정원을 만들다 발견하게 된 엄청난 비밀.
지구가 조개화되어간다는 놀라운 사실. 조개화되면 땅이 석회화되어 불모지가 되고....
작가에게는 재미있을 소재였겠지만 나로선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구가 터전인 우리로서는 끔찍할 일이다. 지구는 결국 멸망하겠지만.
문학적 건망증
단편 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에 속할 만한 글이다. 내게는 아주 위로가 되는 글이었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특히나 읽고 쓰기를 잘하고 싶은 문학을 업으로, 문학의 주변인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글.
"수치스러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30년 전 나는 글읽는 것을 배웠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웬만큼은 읽었다. 그런데 고작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소설 2권에서 누군가가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희미한 기억이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결말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처음을 잊어버린다."
but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