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이 책은 버라이어티하다.  

 작가와 영화감독 둘이서 <로시니 혹은 누가 누가와 잤는가....> 시나리오를 썼다.  이 책 뒤에 시나리오가 실려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는 과정이 몇 년 걸렸다.

 촬영이 끝난 후 작가는 그 과정 전부를 에세이로 썼다. 이 책 맨 앞에 실린 에세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이다.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감독은 영화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그게 바로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챕터이다. 

그러니 이 책은 친구인 두 남자가 영화 <로시니 혹은....>를 만들기 위한 시작과 과정 그리고 그 후까지를 상세히 담고 있다고 할 만하다.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


 1992년 여름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헬무트 디틀은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우리 다시 한번 공동 작업을 해보는 게 어떨가? ........올 가을에 몇 주 정도만 시간을 내면 될 거야!" 그러나 계획은 "어떤 달갑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지 그 당시에는 확실하게 몰랐다."

 1993년 7월 29일 쥐스킨트는 달력에 <제 1장 완료(약 26페이지)>라고 기록했다. "여덟 달 동안 고작 26페이지밖에 안 썼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수백 페이지 넘게 시나리오를 썼다. 열 번 넘게 구상을 했고 그 구상에 따라 어렵사리 초고를 만들어 냈으며, 그 후에는 그 원고를 수정하고 새로운 구상을 덧붙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고를 포기했다. "우리가 다시 시나리오 초고를 타이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1년 2개월이 더 지나서였다."

 "1995년에 우리는 두,세,네 번째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몇 번째 원고인지 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실린 원고는 1995년 11월에 완성된 것으로서, 여덟 번째 원고이다. 물론 그게 확실한지는 모르겠고 높다랗게 쌓여 있는 원고 더미에서 더 이상 그걸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마지막 원고에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원하는 것은 많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존재다." 대작가와 유명감독이 공동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 이렇게 어렵고 혼돈 자체였다니 나로선 놀랍고 한편 아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보라! 흡입력이 무서운 작가 쥐스킨트와 노련한 감독도 이렇게 시나리오 한 편을 힘들게, 발걸음을 떼었다는 데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창작의 길은 멀고 험난하고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알려준다. 그러니 근심은 넣어두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라는 지상명령이 엄혹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우리는 냉정하고 고통스럽고 더 이상 아무 즐거움도, 희망도 없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게댜가 이 단계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날마다 오전 열한 시부터 책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마티니 대신 홍차를 마시면서 인물을 구상하고, 인물들의 관계를 설정해 보고, 장면들을 생각해 내고, 장면과 장면들을 연결시켰다. 가끔 영화 줄거리의 흐름이나 소위 트리트먼트라고 하는 전체적인 개요도 작성해 봤다.

 ........한 달 반 뒤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우리가 써놓은 것을 읽어 보았다. 완전히 실패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 원고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지루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초보자의 실수투성이었다. 가장 진부한 실수는 바로 장면마다 모두 발단 전개 지체 절정 하강의 단계를 갖는 독립적인 촌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근본적인 실수는 인물들을 너무 자세하게 반복적으로 그렸다는 점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아마추어가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마지못해 성공적인 인물이나 장면들과 이별했다! 작가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들을 붙잡아 끌고 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은 좋은 장면 하나를 구하려다 영화 전체의 구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혹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위해서 이 아름다운 장면을 꼭 버려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에 부딪힌다. 이것은 결코 수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전체 구성을 위해 마음에 드는 인물이나 장면을 버려야 할 겨우가 여러번 생겼고 그로 인해 점차 불안감과 불쾌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좋은 장면들만으로는 결코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벌써 경험으로 알고 있잖아. 바로 그것 때문에 실패한 적이 있었던 걸 잊었어?""


 수많은 우여곡절과 좌절을 겪으면서 그들은 결국 배역을 결정하고 영화를 찍었다. 그 과정 또한 시나리오를 쓰던 때와 다르지 않게 어렵고 진빠지는 일이었다. 쥐스킨트는 촬영장에서 사라져 혼자 이 에세이 '영화는 전쟁이다!'를 써야했다. 그러니 촬영장에서의 선봉장의 역할은 디틀이 대부분 했다고. 감독이라는 자질도 태어나는 것 같다. 쥐스킨트가 작가로서의 자질을 지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잘 하고 해야될 역할이 따로 있다.

 쥐스킨트는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가 얼마나 살아있는 작품의 주요 요소인지를 깨닫게 된다. 배우의 눈빛 하나만 앵글에 잡혀도 이야기의 전후가 설명되어지니 말이다. 몇 장의 시나리오보다 배우의 뒷모습 하나, 표정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주제를 전할 수 있다. 그것을 이 작가는 깨닫고 자신들의 시나리오는 기본적인 설계일 뿐, 촬영장에서는 또다른 이야기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불안과 놀라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또, 어쩌면 더 놀라운 것은 다 찍은 필름을 편집해놓고 보니 자신들이 썼던 시나리오의 모든 것이 영상에 모두 표현돼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작품의 인물에 녹아 연기를 펼치기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배우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는지 나로서도 충분히 추측이 되었다.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로 한 작품의 구성요소가 되는 걸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역할이 있고 그걸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전제도 믿음도 필요하다. 저번에 읽은 <콘트라베이스>의 주자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 혼자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살고 있다는 건 오만이며 망상이다. 


이 책은 정말 유익한 책이므로 다음에 또 읽을 작정이다. 뒤의 대담과 시나리오는 내일 다시 다루어야겠다. 지금 나는 나갈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쥐스킨트는 비둘기 첫 작품부터(내가 읽기로 첫) 내 최애 작가의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나는 이 작가를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닮고 싶고 그의 작품 전부를 읽고 싶다. 나는 쥐스킨트를 이제야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내 보물 작가가 됐다. 이 작가는 내게 절망과 한숨을 자꾸 선물한다. ㅠㅠ 안녕, 쥐스킨트,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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