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내가 이 책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리뷰나 소개에서 읽은 것 같은데 앨범에 스크린 샷이나 카메라로 찍어둔 게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분명 어딘가에서 이 책을 검색한 건 확실했다. 왜냐하면 '목잘린 닭'의 충격적인 장면이 잊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어서였다. 그래서 목잘린 닭의 어설픈 줄거리를 긴 문장으로 여기저기 사이트에 검색했다. 

처음에 작가이름과 책명을 몰랐으니 한강에서 바늘찾기?! 그러다 알라딘에서 누군가의 리뷰에 이 책이 언급돼있어 드디어 조우! 아! 다시는 나중에 사야지, 이러면서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필요하면 장바구니에 넣어두어야 한다는 사소한 법칙을 이제야 깨닫고 배웠다. 


  작가인 키로가에 대해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네이버 B북채널에 자세하게 소개돼있어 그걸 인용하기로 한다. 

  키로가의 삶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경험으로 점철되었다. 태어난 지 두달 되던 무렵, 아버지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발 사고로 죽고 이후 의붓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비극을 맞고 엽총으로 자살한다. 열일곱 살 키로가가 그 죽음을 목격한다. 1902년에는 키로가가 총을 살펴보던 중 오발되어 친구 페에리코 페란도가 즉사한다. 1910년에는 누나와 형이 장티푸스로 죽고, 1915년에는 아내 아나 마리아가 음독자살을 시도해 사경을 헤매다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다. 1933년 후원자 역할을 한 발타사르 브룸 대통령이 쿠데타에 항거하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 1937년 키로가는 위암 판정을 받은 뒤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그런데 평생 그의 주변에 드리워져 있는 듯 보이던 죽음의 그림자는 그 몇 년 뒤 장녀인 에글레, 장남인 다리오의 자살로 이어진다. 

  이런 죽음과 비극적 사건은 키로가의 작품세계에 독특한 색채를 부여했다. 그는 삶을 생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으로 보았으며,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포스러울 정도의 비극성을 안고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을 보려고 책을 펼치려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난 지독하게 유아적으로 겁이 많다. 1878년 12월 31일에 우루과이에서 태어났으니 년도로나 지리상으로나 나와는 아주 먼 간극의 작가인데도 혹시 내게 어떤(?) 초월적인 텔레파시를 보내면 어쩌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멀쩡하게 독후감을 쓰고 있으니 키로가가 나라는 하찮고 평범한 독자에게는 아무 감응도 느끼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긴 하지만 약간 서운... 


  이 책에는 18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제목대로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5편은 거르고(앞으로도 모든 단편소설집에서 전부다 읽기는 목표하지 않을 작정이다) 13편을 읽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몇 편만 간단하게 살펴본다.



  목 잘린 닭

  이 작품 때문에 이 책을 사게 되었으니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키로가를 가장 유명한 유루과이 작가로 매김한 것이 이 작품과 '깃털 베개'때문이라고 한다.

  놀라울 정도로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로 시작되는 문구가 압도적이다. 이 부부는 서로를 사랑했고 건전한 삶의 목표가 있는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부는 첫 아들를 낳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최선을 다해 양육한다. 그러나 20개월 째, 아이는 열이 끓고 발작을 일으키더니 백치가 되어버린다. 무슨 저주인지 둘째 아들도 세째인 쌍동이 아들들도 똑같은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여기서 첫째 아들이 백치가 되었을 때 집에 들른 의사의 말은 두고두고 독자에게 어떤 징후를 보게 하고 그 비극적 씨앗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의사는 이렇게 주의 겸 선언을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부계유전에 의한 병 같다. 또한 아이 엄마가 폐 한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이의 병은 아이 문제가 아니라 이 가정 전체에 드리운 원죄에 대한 문제이며 그것은 어른들인 그들이 해결하든지 떠맡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하긴 어느 경우에도 아이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언제나 부모나 환경의 문제가 결정적인 이유지 아이 혼자 문제를 만들지는 않는다. 

  부부는 좌절 중에도 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열심히 산다. 그러다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 처음 건실하고 다정했던 부부는 이제 서로의 탓을 하며 싸우고 상대를 흠집내기 위해 더 막말을 던진다. 그러다 그들은 화해하고 또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결국 딸이 태어난다. 아이는 제 오빠들과 다르게 아주 잘 자라준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백치 아이들은 마당에서 벽을 보며 앉아있다가 하녀가 닭을 잡아 목을 따고 피를 내자 부엌으로 달려와 그 광경을 목격한다. 그리고 부모와 여동생이 외출하고 돌아오던 중, 여동생이 먼저 들어와 담 위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던 백치들은 순간 동생의 머리채를 닭의 머리처럼 잡아채 부엌으로 끌고 들어가 하녀가 하던 대로 생명을 서서히 앗아간다. 부엌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원래의 목표나 의미에서 퇴행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왜곡된 삶은 누구의 탓이 아닌 바로 그 자신(나자신)의 몫이며, 그로 인해 일어난 비극은 바로 자신에게로 향하는 화살이 되기에 남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어찌보면 원죄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비극을 이미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네 백치 아이가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하루종일 방치된 채 벽돌담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데에서는 사랑받으며 응석어린 막내딸의 처지와 상반되어 이 가정의 환한 빛 뒤에 음험한 어둠이 도사리고 똬리를 튼 채 언젠가 무서운 폭발을 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네 아이들이 하루종일 바라보던 벽돌담, 그들은 갇힌 아이들이며 방치되고 버림받은 수인인 존재들이다. 그들 앞에 버티고 선 벽돌담은 어디로도 탈출로가 없는 네 백치 아이들을 정말 백치로 만 남게 한다. 백치가 스스로 되지 않은 이상, 그 책임을 어린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인데도... 부부는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액세서리로 여겼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이 단편에서 작가는 인생의 부조리와 모순이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태도와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키로가의 대표단편이 될 작품으로서 완벽하게 잘 짜인 플롯과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상징이 일품이었다. 


  깃털 베개

  신혼인 젊은 아내가 차갑고 냉정한 성격의 남편 때문에 불안한 일상을 보내다 깃털 베개를 베고 자다 죽는 이야기. 아주 짧은(책 6쪽 반) 내용이지만 함축하는 바는 무진장 크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고 남편을 사랑했다. 남편 또한 사실 속으로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너무나 차갑고 냉정해 그녀는 남편에게 다가가기 힘들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차츰 우울해지고 점차 병이 되어간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매일 잠을 자는데 점점 더 일어날 수 없이 병은 중해진다. 결국 그녀는 창백하게 여위어 죽음에 이르고. 

  하녀가 그녀가 베고 있던 베개를 집어들자 베개가 너무 무겁다. 남편과 하녀가 베개를 들고 나와 그걸 갈라보니 그 안에 다리가 여럿 달린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 괴물이 밤낮으로 그녀의 피를 빨아먹어 괴물은 공처럼 커져있고 그녀는 그렇게 하얗게 말라 있었던 것.

  그녀는 혹시 괴물에게 피를 빨리면서 빈혈이 야기하는 환상과 몽상으로 신혼의 단꿈을 대신 꾼 건 아닐까. 이럴 때 이 단편은 성적 환타지라는 보이지 않는 주제를 담게 될 수 있다.

 또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에게 흡혈벌레가 기회를 타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떼어버리려고 하기보다 그 속에 파묻혀 그 불행을 놓지 않고 습관처럼 살아가면서 그걸 받아들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비전이 없는 삶의 루틴.

 마지막, 그녀는 왜 일어나지 않고 벌레를 잡지 않고 그렇게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을까. 이건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그녀는 차라리 남편의 차가움보다 흡혈벌레와의 동거가 편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으리라.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뇌막염에 걸린 친구의 여동생이 열이 나고 착란 증세에 빠지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는다. 그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그녀가 낫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병이 낫자 그는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그녀곁에서 매일 한 두 시간 그녀의 열오른 얼굴과 지나치게 착란으로 반짝거리던 아름다운 그녀의 눈을 더 볼 수 없다는 것. 그녀가 정신이 돌아오면 그를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것. 그는 점점 그녀 몰래 그녀를 바라보고 병중에 있던 그녀의 눈빛과 그 손을 그리워한다... 그러다 그녀가 고열 중에 그를 부르던 게 마냥 다 기억에서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두 남녀의 서로의 애정을 탐하고 그러면서도 자존심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밀고 당기고 절망하고 화를 내고, 그러다 끝내 돌아서려는 그에게...

  두 남녀의 연애심리가 세심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해피엔딩 러브스토리. 심리묘사가 무척이나 길고 디테일하다. 다시 읽어볼 만한 작품.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세 편만 다루기로... 페이퍼, 허리 아프고 기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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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게임 1,2
박상우 지음 / 해냄 / 2020년 11월



  내가 아는 인류는 지구상에서 태어나 살다 죽은 수많은 인간들이다.  그 인류 중  하나가 나이고 나의 조상들이 그들이다.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이 어떤 의식세계를 살았을지 짐작은 되지만 구체적으로 추측하기는 힘들다. 최초의 인류는 동물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해서 문명인인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건 의외로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쯤의 사람들은 상상이 된다. 그들은 대부분 늙어가면서 점점 비슷한 생각들을 하게 됐을 것이다. 늙어가면서,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비슷비슷한 번민을 하다 해답을 찾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특이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그런 고민을 안고 살았다. 이 책이 그런 나의 오랜 사유에 답을 해준다. 운명이 무엇인지, 사는 동안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해준다.

 

  일단 이 책의 형식이 특이하고 흥미롭다. 1권과 2권이 맥락으로는 연결되지만 달리 보자면 1권이 이보리와 어르신의 문답적, 구도적 소설처럼 느껴지고, 2권은 잉카와 작가, 상위자아가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우주적인 전쟁과 그 해결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더구나 챕터가 아예 두 형식으로 나뉘는데,오롯이 소설 자체인 챕터와 소설 밖 작가의 시점인 #이 붙는 챕터. 그래서 이 소설은 1권과 2권, 챕터의 두 다른 버전. 이런 식으로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분리되고 심화되다가 서로 교차되고 서로 만나고 영향을 끼치면서 점점 더 큰 우주적인 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특히 #이 붙는 챕터는 작가 자신의 장인데,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마주하게 되는 정신적, 소설적 난관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독자로서는 작가의 사적 생활과 소설 쓰기의 지난함이 그대로 느껴져 소설보다 더한 현실을 보게 되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더구나 작가는 책 말미에서 <운명게임>은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면서 소설이다,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은 이 소설의 성격과 그 주제의 깊이가 단순한 서사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기에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언사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적인 서사와 더불어 우주적인 생의 비의를 함축하고 있다.

 

  살면서 과연 내 삶이 진짜 내 삶인지, 운명이 어떻게 정해져 있길래 나의 삶이 이렇게 전개되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았다. 오래전부터 운명이 나에게 강요하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비관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작품 속의 잉카나 상위자아, 그들의 설파를 들으면서 이해되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한 셈이다. 생에 대한 비의 아닌 비의. 그 엄정하면서도 논리적인 시스템. 옆만 보지 말고 위를 보고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함을, 사소한 것에 충실하면서도 나의 앞으로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로 바뀌는 것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겠다는 자각. 

 

 수많은 명문 중, 나를 각성시킨 몇 구절을 옮겨본다. 


이보리: 바로보기가 이루어지면 모두 스러질 망상들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를 끊임없이 되뇌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의식은 닭이 품은 알처럼 깨어나기 위한 부화를 시작합니다. 자기 망상으로부터 깨어나는 방편이 그토록 간단명료한데, 그조차 안 하면서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엄살을 부리다니요.(37쪽)


"그럼 제가 창조된 이유나 앞으로 펼쳐지게 될 미래에 대해서도 지금 알 수 있나요?"

뜻밖의 질문.

"누구나 그런 걸 궁금해 하지만 그런 건 너를 창조한 나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미래는 언제나 확률적 가능성 속에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62)


이보리: 기막힌 논리로군요. 어느 누가 어르신께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나요?(75)


이보리: 어르신은 '나'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이 뿌리를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샤카무니의 바로보기가 필요한 것이고요.(76)


자연스럽지 못한 건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너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에 무조건 최선을 다해라. 네가 취사선택해 봤자 다시 돌아올 일들이니 기회를 되돌리지 말아라. (140)


  다 옮기려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중도중지...


 그런데 책 밖의 얘기면서 책 얘기인데 그동안 봤던 수 많은 책들 중 단연코 <운명게임>,이 책의 속지가 얇으면서도 매끄럽고 질이 좋다. 심백 페이지가 넘는데도 두껍지 않고 덜 무거우면서 만지면 손가락 끝 감촉이 좋다. 겉표지 또한 분홍색과 블루로 예쁘고 재미있는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해냄이 박상우 작가님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ㅎㅎ

 

  운명게임, 오랫동안 내 삶이 내 삶이 아니고 누군가 강요하는 삶 같아서 그에 분노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바뀐 논리적 감정은, 누군가 나에게 운명이라는 게임을 맡겼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게임 속의 캐릭터라면 나는 점점 진화하고 발전하는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상위자아와 기쁘게 만나고 싶다.

  너, 정말 공부 잘 했구나! 정말 열심히 잘 했어. 그러니까 우리 잠시 쉬자. 저기, 시원한 바람 불고 꽃들이 활짝 핀 초원에서 잠시 쉬고, 그 다음을 준비하자. 상위자아가 내게 그렇게 말했으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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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이 책을 펼칠 때 나는 이 소설이 장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 번에 기획하고 집필한 정석의 장편이 아니다. 해설을 보면 1부 '커다란 노트'는 1986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비밀노트), 2부 '증거'는 1988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타인의 증거), 3부 '세 번째 거짓말'은 1991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50년간의 고독) 쓰여졌다고 한다. 하나 이 세 작품을 한꺼번에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는 원제목과 조금씩 달리 제목을 달고 세 편을 하나의 소설처럼 묶어 펴냈다. 

 그래서 읽다보면 1부와 2부는 연관성을 느낄 수 있지만 3부에 이르면 모든 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내용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반어적이고 모순적이라 해도 문체마저 1부의 단순한 동화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보인다. 차별해보자면 1,2부가 동화적 리얼리즘, 3부는 추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3편(부)이 맥락으로는 한 소설이 될 수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완전히 각기 다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하다.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일단 표제부터 보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생각할 거리를 얕고 깊게 흔들어놓는 제목에 준한다. 작가가 처음 쓸 때 3부인' 세 번째 거짓말'을 염두에 두고 출판사가 다시 붙인 제목인데, 독자를 자극하는 데에는 성공적인 것 같다. 어딘가 불순하면서도 무언가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줄 것 같은 제목이 아니던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거짓'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면 얕게는 사람의 속살을 헤집을 것 같은 욕망을, 깊게는 불순하고 불온한 인간 내면의 음울하고 헛된 위선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간의 영화나 문학작품들에서 실제로 이 '거짓'이라는 단어를 표면에 띄운 작품들이 그렇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거짓'을 의식하기보다 그런 작품들이 전부터 나를 그런 감정에로 견인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나나 그들 작가나 독자들 대다수가 '거짓'이라는 단어에 어떤 불유쾌한 감성과 또 그 반향으로 인간 본연의 비밀이 탄로나기를 한편 기대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존재들에게 거짓이란 어디 세 가지 뿐이랴. 존재들은 매일 거짓과 진실 사이를 오간다. 그러니 3부의 헷갈리고 모호한 사실들 앞에서 처음엔 의심스럽던 감정들이 나중엔 생의 복잡다단함을 이해하려는 제스쳐로 바뀌어간다. 우리들 인생 자체가 모든 책을 용납하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모호한 책들을 용납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까닭이다. 그만큼 삶이란 부조리하고 모호 자체인 것이니까... 더구나 작가는 1,2부에서 루카스가 얼마나 모순에 찬 시대에 살고 있는지, 이미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우리를 세뇌시켜 둔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추천해준 사람은 호선님이었다. 감정에 얽매여 사적 진실을 나열하면 안 된다고, 주인공의 마음을 나열하지 말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쓰라고... 단문과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문체, 마음을 온전히 생략한 문장들이 참신하고 기발했다. 그런 글은 읽기에 수월하면서 부담이 되지 않는다. 아주 명백한,글쓰기의 총체적인 방법론이 갑자기 35쪽에 등장한다. 그 부분은 호선님이 내게 읽어준 부분이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름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 작풐을 읽으면서, 특히 1부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가만히 더듬어보니,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에서 전쟁의 참상을 어린 소년이 겪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였다. 그때도 참 마음 아프면서 읽었는데 이 소설 또한 전쟁중에 보호자를 잃고 떠도는 어린 아이들의 비참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소년소녀들 뒤에 보이지 않는 어른, 전장, 수용소에서 극악한 참혹함에 내던져진 어른 남자들이 죽어가는 장면이 보일 듯 다가온다. 또 남자들이 떠난 도시와 농촌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있으면서도 아이들과 노인들을 건사해야하는 여자들의 고통 또한 만만찮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을, 사람들에게 보호 받던 동물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 지금도 평생을 피난다니고 폭탄 속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인류 전체의 비양심 때문에, 또는 인류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살상과 파괴가 벌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누구의 삶도 하잘것없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고통을 받는 건 모두가 나서 도와야 될 일이기에...


 장편이 될 만한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페이지마다 녹아들어 있다. 그 한명 한명을 다 불러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몇 권의 장편소설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인물들 전부가 놀랍고 비밀스런, 그러나 전쟁중에는 다반사이기도 한 비극적인 서사가 곳곳에 산재한다.

 클라우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사라, 사라의 엄마와 그 부모까지, 이 한 집의 가족서사만 해도 만만찮은 분량이 된다. 거기에 클라우스의 할머니까지 채우면 국경지대에서 도시까지, 불륜과 이복남매간의 사랑까지, 소설의 소재는 넘쳐난다. 

 

 최초의 시작은 그러나 클라우스에게 전쟁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다. 클라우스와 루카스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최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자 어머니는 권총으로 남편을 쏘고 그 와중에 총탄이 루카스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런 클라우스에게 삶의 아이러니가, 어린아이가 어쩔 수 없는 배신적인 생의 폭력이 다가온다. 

 아버지는 죽고 남은 루카스는 재활원으로 떠나고 어머니도 정신병원으로 떠나 풍지박산이 된 후에 그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 안토니아가 데려다 돌봐주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안토니아는 딸 사라를 낳는데, 안토니아로서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과의 불륜 때문에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보호해주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를 낳았으니 그녀의 인생 또한 너무나 파란만장하다. 그녀는 그러나 죽은 연인의 아들을 돌보고 태어난 딸을 키우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이복 남매의 뜻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그녀는 클라우스를 내쳐야한다. 하긴 클라우스와 사라가 성인이 되어서도 만났다면 독자로서는 또 한편의 불륜 아닌 불륜을 보았을 테니... 그쯤에서 멈춘 게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어째서 삶은 이렇게 복잡하고 예기치 않은 시련들 뿐인지... 비록 한 집안을 붕괴한 불륜의 주인공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 만도 없는 여자. 사라. 사랑이 무어길래...


또 2부에서 마티아스의 엄마인 야스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야기 또한 믿고 싶지 않은 거짓말같은 서사로 시작된다. 그녀는 임신한 채, 루카스에게 발견되는데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이이다. 루카스가 그녀와 처음 섹스할 때 야스민은 "아버지, 아, 아버지..."라고 신음한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연인인 것이다. 그리고 야스민이 말한다. 아버지는 참으려고 노력했다고. 아버지를 원한 건 자신이었다고... 짧은 야스민의 서사이지만 그 사랑의 과정이 야스민의 입으로 진술되기에 진실성이 담보되는 편이어서 어느 정도는 나도 감정이입이 되었었다.


 그리고 1부에서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언청이의 안쓰럽고 기괴하기까지 한 짧은 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녀는 전쟁으로 광분한 적군을 스스로 불러들여 차례차례 그녀에게 성폭력을 자행하게 만든다. 그녀 스스로... 정말이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지독한 '거짓 리얼리티'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한다. '아, 좋아요. 좋아! 얼마든지 오세요, 또 한 사람, 또다른 사람!' 언청이는 이렇게 적군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벌린 양 다리 사이에 피와 정액이 뭉쳐져 말라붙어 있는 상태로 속눈썹들은 서로 엉겨붙었고 미소 짓고 있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까만 이빨들이 보이"는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랑할 사람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겨우 개에게 자신의 성기를 빨게하던(들에서) 그녀는 무자비한 적군의 광포한 성적 폭력조차 처음 당하는 여성으로서는,희열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어떤 관습이나 틀을 갖지 않는 작가의 무제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동적이면서(작가의 상상력이 감동적이라는 뜻이지 이 삽화 자체가 결코 감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힌 나의 의식이 기습당한 사건이었다.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틀에 갇히고 관습에 매이고 스스로의 도덕윤리에 침식당해 있는지 깨달았다. 


 작은 성당의 신부와 그를 도와주는 하녀, 할머니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쓰는 장교와 그의 당번병, 그리고 장교의 친구, 수확물을 받아가는 조제프 아저씨등, 인정 넘치고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약점과 자신들만의 비밀을 간직한 이들의 아주 작은 삽화들도 무척이나 재미있고 우수적이다. 가끔은 이런 삽화들로 인해, 그리고 쌍둥이의 악동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이야기들이 1부를 거의 동화처럼 만들어준다. 할머니와 구두장이 아저씨 등의 이야기도 동화에 나오는 어딘가 으스스하고 슬픈 이야기같아 잘 어울렸다. 


 대강의 인물들 이름만 거론해야겠다. 일단 너무 많다보니... 그리고 이들은, 그들로 인해 전쟁 중의 도시와 인간에 대한 거대한 그림이 묘사되었기 때문에 작건 크건 똑같이 중요한 소설적 요소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우고 할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래 묵은 소문의 주인공인 클라우스의 할머니, 서점주인과 페테르,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이까지 낳은 야스민, 야스민이 낳은 아이 마티아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추억 속에서만 살아가는 도서관 사서인 클라라, 이들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들이고 전쟁으로 인해 삶이 파탄난 사람들이다. 궁핍하고 불안한 시대에 살면서도 이들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잠 못 이루며 그들을 기다리고 회상한다. 그러고 보니 서점 맞은 편에 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노인도 중요인물이다. 그는 7년간을 거의 자지 못하고 자신이 살았던 집 가까이 있는 공원에 찾아가 벤치에 기대 잠시 쪽잠을 잔다. 그의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먼저 총살당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늙은 그의 형상이 가장 조용하게, 슬프게 내겐 다가왔던 것 같다. 엄청난 내적 서사의 인물이다. 

 

 시대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겐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는 운명이 그럼에도, 있다. 사랑하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운 것,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짧은 생을 헛되이 살게 되는(꼭 헛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운명의 일부이므로) 고질적인 마음의 병들. 그럼에도 다음 세대 또 역시 그렇게 헛된 마음의 병들을 앓는다. 사랑, 기다림, 그리움, 그리하여 절망, 그리고 가끔 솟구치는 욕망과 분노, 그러나 생은 그런 것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거나 무상으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이 있고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을 것이다. 어제 한숨을 쉬고 그러면서도 어젯밤 꿈을 꾸었고, 오늘 다시 일어나 무언가 하려 한다. 언제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일이 기다려주는 것처럼. 찰나를 살면서도 영원을 사는 것처럼. 저 어딘가로 날아오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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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2,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3주쯤 걸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다 읽고보니 이 위대한 작품을 대략만 읽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한편, 경이로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지 않을 수도 없다. 최선을 다해 이 위대한 작가의 내면에 깃든 성품과 고뇌와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애썼다. 밑줄을 긋고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 보기를 여러번 했다. 하지만 어제 읽은 것도 생생한 기억에서는 멀어져 있는 터에 며칠 전 읽은 부분은 오락가락 안개가 휘휘 젓고 다니는 날처럼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1,2 권에서는 어느 정도 줄거리를 꿸 수 있었다. 하지만 3권 법정 장면으로 들어가서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를 듣다보면, 증인들의 증언을 듣다보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서 앞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다. 

 물론 그 때마다 앞 페이지를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간 책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할 상황으로 전복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나는 나름으로는 이 작품을 열심히 읽었지만, 완전히 읽지는 못했다고 자평하는 것이다. 수박을 먹었으되 겉 껍질만 먹은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달큼하고 시원한 붉은 속살을 원없이 먹었으면서도, 나중 보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은 불만족...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모든 장르의 소설들의 모음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로맨스와 멜로, 심리, 범죄, 법정, 추리, 철학, 가족서사, 종교, 박애 등, 인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고 관념화, 담론되고 있는 모든 분야의 대부분의 일들이 층층이, 또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단 로맨스와 멜로로써의 소설로 정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인 친부살인의 발단이 그루셴카를 가운데 둔 아버지 표도르와 아들 드미트리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말에서도 그루센카는 드미트리와의 애정 때문에 고통받고 드미트리는 온전히 그루센카의 마음을 얻은 것으로, 극단의 불행 속에서도 지고의 행복을 쟁취했으니 그래도 지옥같은 불행에서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루센카는 삼각관계의 표본이며 그 중심인물인데, 매사에 그녀의 사랑은 단 둘의 흡족한 관계가 아닌 불안하고 불명료한 관계로 발전하고 소멸하다 다시 삼각관계로 빠져든다. 

 일단 그루셴카가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그는 삼소노프라는 노인 지주의 애첩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연에는 폴란드 장교였던,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잊지 못하는 비밀을 지닌 여자로서의 애첩이었다. 그러니 그루셴카는 삼소노프와 장교 사이에, 실제적이지는 않지만 그녀 자신은 삼각관계의 한 지점에 있었다. 

 그러다 표도르를 알게 되면서 표도르의 애정을 받게 되고, 이럴 때 그녀는 삼소노프와 표도르라는 두 남자에 잇닿아있는 삼각관계를 또 형성한다. 

 한데 이 상황에 드미트리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기 위해 이 도시에 오게 되자, 그리고 그가 그루센카에게 한 눈에 반해 주질러 앉게 되자 그녀는 또 표도르와 드미트리 사이에서 삼각관계의 핵이 된다.

 오죽하면 결말에서 미챠(드미트리)가 감옥에 있을 때조차 그녀와 미챠는 서로를 질투하느라 번번이 싸움을 하는데 미챠는 그녀가 옛 애인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질투하고, 그녀는 미챠가 카챠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질투한다. 그러니 그녀의 애정은 언제나 환희작약할 수 없는 괴로움과 불안을 동반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각관계의 핵심인 그루센카의 남자들 또한 사랑을 할 때마다 온전한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반편만 차지한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모든 사랑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너무나 애가 타는, 또 약이 오르고 벗어던지고 싶은 감정을 동반하게 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편, 드미트리와 그의 동생 이반은 카챠를 사이에 두고도 연적관계를 잠시 맺게 되는데, 카챠는 드미트리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4500루블을 모스크바에서 무상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카챠는 드미트리를 사랑한다고 믿고 그를 따라 그의 고향까지 왔다. 

 그러다 이반이 그녀 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이반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사랑은 오직 미챠에게만 한정된다고 자신을 속이고 절실하면서도 기만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녀에게 사랑은 미챠에게 향해야 하는 윤리적인 것이었다. 해서 그녀 자신만 자신의 진실을 모를 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야말로 쓸데없이 삼각관계를 만들어 자신과 이반마저 괴롭히는 연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법정에서야 카챠는 그 사실을 깨닫고 미친 듯, 저열하게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진지하고 고상한 카챠가 법정에서 벌인 희극적인 일화는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우습고 한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명명백백 위대한 소설에서 내가 찾아낸 미완의 사건은 아무래도 '로즈'건인 것 같다. 왜 로즈는 그토록 알료샤 앞에서 사랑한다고 하고 화를 내고 결혼한다고 했다가 안한다고 했다가 변덕을 부리고.... 로즈와 알료샤와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들이나 상황들에 비해 어이없게 맺지도 않고 끝이 나버린다. 아니 그냥 끝도 없이, 도마뱀 꼬리 자르듯 사라져 버린다. 이 대단한 입심과 도저한 사유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로즈를 어떤 인물로 그리려다 너무 피곤한 인물이라 슬쩍 잊어먹었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 이 작품이 멜로인지 이 정도  굵직한 애정관계만으로 설명을 끝내련다. 


 다음으로 이 소설이 얼마나 정통하고 얼마나 지루할 정도로 도저한 심리 소설인지를 따져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 한사람 인물이 출현할 때마다 그에 대해 최소 한 페이지 이상 간혹은 세 페이지 정도까지 그의 외모와 습관 그의 과거와 현재까지를 대략적으로라도 꼭 기술해준다. 표도르에 대한 도입부에서의 묘사와 설명은 정말 압권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도르와 드미트리, 이반, 알료사, 조지마 장로, 그루셴카, 카챠, 오흘라 부인, 스기료노프, 스메르자코프, 라키친 등이 너무도 상세하고 핍진하게 표현된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고 머리속에 그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있어지고 1600 페이지에 이르는 먼 독서의 길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도 작가는 중간중간에 인물들이 하는 행위를 설명하면서 또다시 그 인간이 왜 그런지를 설명해주는데 어느 순간 웃기고 어느 순간 서글프고 어느 순간 작가의 인간을 이해하는 통찰에 무릎을 꿇게 된다. 작가는 인간을 앞 뒤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쳐 과거와 현재의 그를 앞 뒤, 옆, 그 안에까지 들어가 클로즈업하듯 들이댄다.   

 중심 주인공이 아닌 스네기료프와 그 아들 일류샤에 대한 묘사조차 정말 눈물겹고 인간적인 서글픔의 끝을 보여준다. 아들을 향한 무한한 부정의 스네기료프, 그는 너무 고결하고 아름다운 아버지인데 한편으로는 우스울 정도로 강박적이고 무지하며 주정뱅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아들 일류샤는 이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신뢰하는데 착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비정함과 너무도 다정한 아버지 때문에 속을 끓이는 모습 때문에 독자는 코를 훌쩍이지 않을 수 없다.

 또 무지하고 몽매한 민중인 농부들이나 장사치, 하녀와 길거리의 이름 없는 인물들의 천연덕스러운 교활함과 광폭함, 그리고 순진성 또한 군데군데 등장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오직 한 사람, 순결하고 선하면서 진실을 한 눈에 식별 할 줄 아는, 그러고도  인내와 의지를 겸비한 알료샤를 내세워 신과 인간에게 헌신적인 그를 희망의 등대처럼 추켜세운다. 알료샤는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려면 아이와 같아져야 한'다는  성경 구절처럼 아이들에게도 신의와 존중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선하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알료샤의 이토록 투명한 심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오히려 평면적이고 다채롭지 못한 심리묘사만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사심이 없고 탐욕이 없는 사람을 설명할 때 우리는 이런저런 수많은 어휘들이 필요치 않음을 느낀다. 어떻게 그렇게 깨끗한 사람에게 할 말이 많겠는가. 오직 경탄과 존경 외엔 특별한 서술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작가는 알료샤에게만은 심리묘사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달리 말하면 그 외의 모든 인물들은 완전한 심리소설의 오롯한 주인공들이라 해도 좋겠다. 


 



 어제(9월 15일) 시간이 없어 일부만 쓴 것에 나머지를 더 얹어서 끝맺어야겠다. 오늘은 9월 16일이다.


 또 이 소설은 범죄소설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 표도르가 드미트리에게 살해당한다는 전제하에 서사가 시작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때문에 가능해지는 분류이다. 그런데 이 살인은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의 범죄학적인 요소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영리하고 치밀한 계산하의 살인행위,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살인의 이유와 동기 등이 범죄소설 장르로도 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범죄로 인해 결국 법정에서 실제 범인을 밝히려는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가 맞붙고 수많은 증인들과 증언들, 증거품이 제시되는 것은 이 소설이 범죄소설이면서 동시에 법정소설이 되는 이유가 된다. 내 역량이 이런 쪽에서는 심히 부족하기에 간단히 언급만 하고 이 부분은 넘어가야겠다.


 다음에 짚고 싶은 것은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비되는 사상이다. 

 조시마 장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하의 관계로, 그러나 신은 인간을 억누르는 존재가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은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6편 '러시아의 수도승'에서 알료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조시마는 죽기 전에 자신이 수도승이 된 과정과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사상을 조용하지만 열렬하게 말한다.

 "속세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하느님의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는 온 세상, 거기서 하느님의 얼굴과 그분의 진실이 왜곡되어 있진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과학이 있지만, 과학 속에는 오직 감각에 종속된 것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정신적인 세계, 인간 존재의 드높은 반쪽은 완전히 거부되어 증오마저 깃든 어떤 의기양양함과 함께 추방되어 버렸습니다. 세계는 자유를 선언했지만, 특히 최근에 더더욱 그러했지만, 그들의 이 자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로지 노예적인 굴종과 자살뿐입니다! 세상은 "어떤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실컷 충족시켜라, 왜냐면 누구나 아주 명망있고 아주 부유한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두려움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증대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자 바로 이것이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자유를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욕구 증대의 권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부유한 자들에게는 고립과 정신적인 자살, 가난한 자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이 있을 뿐이니-- 이는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수도승의 길은 다른 것입니다. 복종과 금욕과 기도가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오직 이런 것들 속에만 그야말로 참된 진짜 자유로 가는 길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쓸데없고 불필요한 욕구들을 떨쳐 내고 나의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오만한 의지를 복종으로써 다스리고 채찍질하여 이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정신의 자유에, 그와 더불어 정신적인 명랑함에 다다르는 것입니다!"(2권, 76~78)

 이 조시마 장로의 대척점에 이반이 지었다는 '대심문관'이라는 서사시가 있다. 이반은 이 서사시를 알료샤에게 들려 주는데 그 요지는 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들은 길을 잃고 헤매이며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수 밖에 없으니 인간의 악행과 그 불행에는 하느님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하느님이 존재하고 그가 만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걸, 또 하느님을 결코 믿고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신념을 펼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은연 중 퍼져있는 생각인 것 같다. 실제로 무신론자들도 많지만 그 반대쪽에는 신이 있다해도 인간의 삶과 세상법칙에 신은 그다지 영향력이 없으며 오히려 신이 인간의 불행을 방조하기에 신뢰할 수 없고 나아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극소수는 그래서 신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반의 사상에 완전히 동감할 것이다. '대심문관'의 두 문단만 인용해 보면(대심문관이 인간으로 다시 온 예수에게 하는 말), 여기서 '우리'는 대심문관과 그 소수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신들의 자유를 우리의 발 아래로 갖다 바치면서 우리에게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여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니까! 또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될텐데, 왜나하면 그들은 나약하고 악덕하고 하찮은 반역자들일 뿐이니까...."(1권, 533~534)

 "맹세코, 인간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저급하게 창조되었단 말이다. 인간이 네가 행한 것을 행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너는 마치 그를 더 이상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꼴이 돼 버렸고, 이는 인간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그자, 바로 그 자가 말이다! 인간을 덜 존경했더라면, 그래서 인간에게서 더 적은 것을 요구했더라면, 이것이 더 사랑에 가까웠을 것인데, 인간의 짐이 더 가벼웠을 테니까 말이다."(1권, 539)

 하지만 이반의 말을 다 듣고 난 알료샤가 지적한다. 결국 형(이반)은 신을 인정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고 그가 만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을 분명히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 반대의 측면, 신이 인간에게 끼친 긍정적인 면은 또 수없이 찾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몰입해 읽다보면 대부분은 이 두, 서로 다른 이념에 공감하고 말 것 같다. 어느 쪽의 의견이든 잘 들어보면 이해 못할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흥미롭고 긴장감이 지속되는 한편 지루하기도 한 법정에서의 장면이 결말에서 펼쳐지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작가로서 가장 고통스럽고 애를 먹은 집필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사람들의 수는 정말 많고 그 증언 또한 일일이 기록되는데 그들의 처지와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그들의 위선 또한 아주 신랄하고 희극적이다. 

 특히나 카챠의 증언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녀의 원래의 성격(우아하고 진지하고 솔직한)에도 불구하고 이반을 사랑한다는 여실함이 그 자리에서 돌발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카챠는 자신은 미챠를 사랑한다는 명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미챠를 사랑해야한다는 윤리에 매여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이반이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공범이며 교사자라고 밝히자 카챠는 거의 미친 듯 아니라고, 범인은 바로 미챠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심연에는 이반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반의 미래는 자신의 미래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카챠가 이반의 형 미챠가 범인이라고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른 것은 이반을 향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카챠의 심연에서는 전부터 미챠를 증오하고 있었고 그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챠는 자신을 쫓아 자신의 고향까지 온 여인 카챠에게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그루셴카와 떠나려고 작정했으니,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뻔뻔한 배신이었던 것이다. 이 카챠의 증언은 미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미챠는 카챠의 배신에 찬 증언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간의 과정에서 그녀에게 늘 미안했고 그래서 당연히 그녀의 히스테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처럼 묘사된 검사의 논고는 연설문을 능가하는데 그는 아버지를 죽이는, 갈수록 역사라는 의미가 희미해지고 패륜이 극악한 당시의 러시아를 빗대면서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임을 부각시킨다. 이 검사는 사회적 책임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마지막 작품처럼 돼버린 이 논고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원없이 피력한다. 몇 달 후 그는 병으로 사망하는데 왜 그가 이렇게 열정적이었는지가 의미 깊게 다가온다.

 또 알료샤의 친구이며 신학생이었던 라키친의 증언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인데 그는 이 법정이 일종의 데뷰무대라고 여긴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을 탐색하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까 모색해온 전형적인 성공지향적 인물이다. 이 법정에서 그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여러 면에서 자신을 드러냈지만 탁월하게 명석한 변호사로부터 무안을 당한다. 

 이 변호사는 겨우 삼일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왔지만 그 삼일 간 여러 사람들의 행태와 그 심리를 꿰뚫어보았고(하긴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그는 자료를 어느 정도 수집했던 것도 같다) 그들이 하는 증언이 단지 그들의 무지와 깊이 없는 의식에서 나온 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청중들이나 사법부에 일깨워준다. 그 변호사의 명망은 괜한 게 아니었고 법정의 누구보다 사태를 빨리 알아채고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꿰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3000루블의 행방과 그 돈의 행적을 쫓는 것이었다. 여기에 재판의 진짜 승패가 걸려있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란 건 다른 한편의 함정도 있다. 돈이 자신의 목소리로 '내가 바로 표도르가 갖고 있던 그 돈이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반이 실제 스메르자코프가 갖고 있었던 3000루블을 갖다 냈는데도 그것은 중요한 증거물이 되지 못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이반이 자신의 형을 구하기 위해 그 돈을 구해 그냥 가지고 온 거라고 짐작하고 넘어갔다. 진실을 안다면 이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지만 아무도 애석할 건 없었다. 이반 외엔 진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또 농부들이나 하인, 점원 등 많은 시민들이 3000루블에 대해 증언에 나섰는데 사실 이들은 아무도 이 돈을 제대로 보거나 세어본 적은 없었다. 단지 미챠가 떠벌인 돈과 소문으로 돈의 액수를 들었기에 사실로 여기고 믿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증언은 명백한 진실이라고 믿기도 어렵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는 진위를 판가름 할 수 없는 이 돈의 증언에 대해 그 증언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증인이 올바른 성품의 소유자인가를 대신 피력한다. 이런 변호사의 공격은 사람들이 얼마나 사실이 아닌 것을 정황상 사실로 믿는지에 대한 우매함에 대한 조소였다. 하지만 수많은 우매한 증언들이 진지하게 쌓이고 보면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그건 현재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뉴스, 우매함을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조악한 조작인데도 그걸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미챠에게 이 증언들이 끼칠 악영향은 불을 보듯 훤하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미챠 스스로 떠벌리고 다닌 결과인 것을. 자신이 진중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허상에 빠져, 쓸데 없는 영웅심에 들떠 떠벌리고 다녔던 것을 후회해야 할 뿐.....


 지금까지 쓴 감상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가니 저녁밥을 지으러 가야겠다. 혹시 내일 시간이 된다면 나머지를 또 쓰고 싶지만 여유가 없다면 이것으로 끝을 낼 수도 있겠다.

 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민중이며 쓸데없이 허랑방탕하게 나다니다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쓴 드미트리이며 지식에 얽매여 헛된 논리에 빠져든 이반이며 자린고비면서도 여색에 눈이 멀어 무절제해진 표도르이며 자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모르고 허망한 윤리의식에 빠져있는 카챠이며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는 그 상대가 죄인이 되어버린 불구적 사랑의 그루셴카이며 자신의 지성과 특별함을 뽐내고 싶어 안달하는 라키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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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르누이가 죽으려고 찾아간 이노셍 묘지, 그곳은 바로 자신이 태어난 곳이었다. 어젯밤 페이퍼를 쓰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그가 그라스에서 파리로 떠나온 이유는 자신이 태어났던 그 곳으로 돌아가 죽기 위해서였다. 악취가 가장 심한 그곳에서 그는 태어났고 죽기 위해 그곳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소설에서 이유없는 설정이나 사건은 없다. 모든 사건과 정황은 먼저의 원인을 거느리고 있다. 그르누이가 태어난 해는1738년인데 이때까지도 이노셍 묘지는 그대로 페르 거리와 페론느리 거리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몇몇 무덤이 위태롭게 무너져 버렸고, 그 결과 묘지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참다못한 주민들이 단순한 항의를 넘어 진짜 폭동을 일으킨 후에야 비로소 묘지가 폐쇄되었"다.


 

*********

 

 바로 그곳, 프랑스 왕국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그곳에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태어났다. 그날은 그 해의 가장 무더웠던 날들 중의 하루로서 뜨거운 열기가 납덩이처럼 묘지를 내리누르고 있었고 썩은 참외와 불에 탄 쇠뿔이 섞인 듯한 부패 가스가 근처의 거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르누이의 어머니에게 진통이 찾아온 것은 페르 거리의 생선 좌판 뒤에 선 채로 좀 전에 꺼낸 대구의 비늘을 손질할 때였다. 아침에 세느 강에서 잡았다는 그 생선들은 벌써 악취를 풍기고 있어 오히려 시체의 냄새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생선 냄새도 시체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코는 냄새에 대해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을 분 아니라 더욱이 진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진통으로 인해 그녀는 외부의 모든 자극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버렸다. 그녀는 단지 진통이 빨리 끝나기를, 가능한 한 빨리 이 구역질 나는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그전에도 전부 이곳 생선 좌판 뒤에서 일을 끝냈었다. 아기들은 전부 죽었거나 반쯤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 태어난 핏덩어리들은 주변에 널려있던 생선 내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고, 게댜가 생명이 그다지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는 다같이 쓰레받기에 담겨 치워졌다. 그리고는 수레에 실려 묘지나 아래쪽 강가에 버려졌다. 오늘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뻔했다. 

.......... 그녀는 마지막 진통이 찾아오자 커다란 도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앞서 네 번의 경우처럼 생선칼로 핏덩이의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백합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수선화가 가득한 좁은 방에 있을 때처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참을 수 없이 자신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옆으로 쓰러지더니 길 한가운데 쌓여 있는 생선 더미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12)


 가이아르 부인은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여자였다. 겉모습은 실제 나이와 비슷하게 보였지만 어떤 때는 두 배, 세 배, 혹은 백 배 정도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처녀 미라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이미 죽어 있는 여자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부지깽이로 이마를 맞은 때문이었다. 코와 이마가 만나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후각을 상실했고, 그와 더불어 따뜻함이나 냉정함 등 모든 인간적 감정도 잃어버렸다. 그 한번의 매질로 인해 그녀에게는 친절과 혐오가 동시에 낯선 일이 되어버렸다. 기쁨과 절망 역시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후일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조차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낳았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이 죽어 갈 때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남편이 그녀를 때려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그가 시립 병원에서 콜레라로 죽었을 때에도 아무런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다.(34)


 그곳에는 사람냄새와 짐승 냄새, 비누 냄새, 갓 구워낸 빵 냄새, 초에 넣고 끓인 계란 냄새, 국수 냄새,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놋그릇 냄새, 샐비어와 맥주와 눈물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마르거나 젖은 지푸라기 냄새 등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55)

가령 다림질한 비단 냄새, 쿠엔델 차의 향기, 은실로 수를 놓은 비단천의 냄새, 진귀한 포도주병의 코르크 마개 냄새, 자라 등 껍데기로 만든 빗의 냄새 등이(57)

마치 장사꾼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고 야채나 계란이 가득 담긴 바구니들과 포도주와 식초가 들어 있는 통들, 양념 재료나 감자, 혹은 밀가루가 가득 든 자루들, 못과 나사가 담긴 상자들, 정육점의 고기 자르는 도마, 옷감이나 구두, 구두창, 혹은 낮에 팔던 수백 가지 다른 물건들로 가득 찬 판매대...... 그 모든 활동들이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공기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일이 다 끈난 후에 냄새로 인식하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소음이나 과장, 육체를 지닌 인간들의 구역질나는 체취 등 그 당시의 통상적인 속성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원래의 본질, 즉 정신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57)



그때 그르누이의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공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제가 모르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것말고는 다 알고 있어요!"

"모든 향수의 시작과 끝이 바로 공식이야." 

발디니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117) 



위대한 것, 끔찍한 것, 아름다운 것 앞에서도 눈을 감을 수는 있다. 달콤한 멜로디나 유혹의 말에도 귀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냄새는 호흡과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236)


사실 외로운 진드기이자 잔혹한 괴물 그르누이는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 보거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3월의 어느 날 그라스의 성벽에 기대어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랑으로 그는 행복했다. 물론 그 대상은 사람, 성벽 뒤편의 집에 살고 있는 그 소녀가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향기뿐이었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그 향기, 미래의 자신의 냄새로써의 그 향기를 사랑할 뿐이었다. 그는 일년 후 반드시 그 향기를 가지러 오겠다고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자기 자신과 미래의 자신의 향기에 헌신하겠다는 이런 이상한 맹세를 한 후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287)


군중들은 동요하거나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람들은 드디어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마차는 오히려 성공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용을 익히 알고 있던 작품이 극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공연되었을 때 높은 평가를 받는 것과 같은 경우였다. 심지어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끔찍스러운 범죄자는 보통과 다른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식이었다. 살인마를 길거리의 시시한 도둑처럼 쇠사슬에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와 죽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랬다면 구경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352)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눈물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 놀랍게도 저항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녹여 쓸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순수한 액체 상태였다. (354)


그들은 모두 그의 손길이 자신들의 가장 예민한 곳, 가장 민감한 성감대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손이 만 개라도 되는 양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국부에 손을 뻗어 여자든 남자든 그들이 은밀한 환상 속에서 열렬하게 갈망해 온 그대로 그들을 애무해 주었다.(357)


그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과 바보 같은 존경심을 보여 주듯이 그 역시 자신의 증오를 보여 주고 싶었다. 단 한 번만, 꼭 한 번만이라도 그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감정인  증오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날은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360)


정오가 되자 광장은 마치 깨끗이 청소라도 한 것처럼 모두 사라졌다. 시내에 돌아온 사람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길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망치듯 바삐 인사를 한 후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전날, 그리고 지난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렇게 치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모두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모두가 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라스 시민들이 그때처럼 일치 단결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마치 살얼음판을 디디듯이 생활했다.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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