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2,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3주쯤 걸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다 읽고보니 이 위대한 작품을 대략만 읽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한편, 경이로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지 않을 수도 없다. 최선을 다해 이 위대한 작가의 내면에 깃든 성품과 고뇌와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애썼다. 밑줄을 긋고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 보기를 여러번 했다. 하지만 어제 읽은 것도 생생한 기억에서는 멀어져 있는 터에 며칠 전 읽은 부분은 오락가락 안개가 휘휘 젓고 다니는 날처럼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1,2 권에서는 어느 정도 줄거리를 꿸 수 있었다. 하지만 3권 법정 장면으로 들어가서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를 듣다보면, 증인들의 증언을 듣다보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서 앞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다.
물론 그 때마다 앞 페이지를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간 책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할 상황으로 전복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나는 나름으로는 이 작품을 열심히 읽었지만, 완전히 읽지는 못했다고 자평하는 것이다. 수박을 먹었으되 겉 껍질만 먹은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달큼하고 시원한 붉은 속살을 원없이 먹었으면서도, 나중 보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은 불만족...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모든 장르의 소설들의 모음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로맨스와 멜로, 심리, 범죄, 법정, 추리, 철학, 가족서사, 종교, 박애 등, 인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고 관념화, 담론되고 있는 모든 분야의 대부분의 일들이 층층이, 또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단 로맨스와 멜로로써의 소설로 정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인 친부살인의 발단이 그루셴카를 가운데 둔 아버지 표도르와 아들 드미트리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말에서도 그루센카는 드미트리와의 애정 때문에 고통받고 드미트리는 온전히 그루센카의 마음을 얻은 것으로, 극단의 불행 속에서도 지고의 행복을 쟁취했으니 그래도 지옥같은 불행에서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루센카는 삼각관계의 표본이며 그 중심인물인데, 매사에 그녀의 사랑은 단 둘의 흡족한 관계가 아닌 불안하고 불명료한 관계로 발전하고 소멸하다 다시 삼각관계로 빠져든다.
일단 그루셴카가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그는 삼소노프라는 노인 지주의 애첩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연에는 폴란드 장교였던,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잊지 못하는 비밀을 지닌 여자로서의 애첩이었다. 그러니 그루셴카는 삼소노프와 장교 사이에, 실제적이지는 않지만 그녀 자신은 삼각관계의 한 지점에 있었다.
그러다 표도르를 알게 되면서 표도르의 애정을 받게 되고, 이럴 때 그녀는 삼소노프와 표도르라는 두 남자에 잇닿아있는 삼각관계를 또 형성한다.
한데 이 상황에 드미트리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기 위해 이 도시에 오게 되자, 그리고 그가 그루센카에게 한 눈에 반해 주질러 앉게 되자 그녀는 또 표도르와 드미트리 사이에서 삼각관계의 핵이 된다.
오죽하면 결말에서 미챠(드미트리)가 감옥에 있을 때조차 그녀와 미챠는 서로를 질투하느라 번번이 싸움을 하는데 미챠는 그녀가 옛 애인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질투하고, 그녀는 미챠가 카챠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질투한다. 그러니 그녀의 애정은 언제나 환희작약할 수 없는 괴로움과 불안을 동반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각관계의 핵심인 그루센카의 남자들 또한 사랑을 할 때마다 온전한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반편만 차지한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모든 사랑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너무나 애가 타는, 또 약이 오르고 벗어던지고 싶은 감정을 동반하게 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편, 드미트리와 그의 동생 이반은 카챠를 사이에 두고도 연적관계를 잠시 맺게 되는데, 카챠는 드미트리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4500루블을 모스크바에서 무상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카챠는 드미트리를 사랑한다고 믿고 그를 따라 그의 고향까지 왔다.
그러다 이반이 그녀 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이반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사랑은 오직 미챠에게만 한정된다고 자신을 속이고 절실하면서도 기만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녀에게 사랑은 미챠에게 향해야 하는 윤리적인 것이었다. 해서 그녀 자신만 자신의 진실을 모를 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야말로 쓸데없이 삼각관계를 만들어 자신과 이반마저 괴롭히는 연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법정에서야 카챠는 그 사실을 깨닫고 미친 듯, 저열하게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진지하고 고상한 카챠가 법정에서 벌인 희극적인 일화는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우습고 한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명명백백 위대한 소설에서 내가 찾아낸 미완의 사건은 아무래도 '로즈'건인 것 같다. 왜 로즈는 그토록 알료샤 앞에서 사랑한다고 하고 화를 내고 결혼한다고 했다가 안한다고 했다가 변덕을 부리고.... 로즈와 알료샤와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들이나 상황들에 비해 어이없게 맺지도 않고 끝이 나버린다. 아니 그냥 끝도 없이, 도마뱀 꼬리 자르듯 사라져 버린다. 이 대단한 입심과 도저한 사유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로즈를 어떤 인물로 그리려다 너무 피곤한 인물이라 슬쩍 잊어먹었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 이 작품이 멜로인지 이 정도 굵직한 애정관계만으로 설명을 끝내련다.
다음으로 이 소설이 얼마나 정통하고 얼마나 지루할 정도로 도저한 심리 소설인지를 따져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 한사람 인물이 출현할 때마다 그에 대해 최소 한 페이지 이상 간혹은 세 페이지 정도까지 그의 외모와 습관 그의 과거와 현재까지를 대략적으로라도 꼭 기술해준다. 표도르에 대한 도입부에서의 묘사와 설명은 정말 압권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도르와 드미트리, 이반, 알료사, 조지마 장로, 그루셴카, 카챠, 오흘라 부인, 스기료노프, 스메르자코프, 라키친 등이 너무도 상세하고 핍진하게 표현된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고 머리속에 그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있어지고 1600 페이지에 이르는 먼 독서의 길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도 작가는 중간중간에 인물들이 하는 행위를 설명하면서 또다시 그 인간이 왜 그런지를 설명해주는데 어느 순간 웃기고 어느 순간 서글프고 어느 순간 작가의 인간을 이해하는 통찰에 무릎을 꿇게 된다. 작가는 인간을 앞 뒤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쳐 과거와 현재의 그를 앞 뒤, 옆, 그 안에까지 들어가 클로즈업하듯 들이댄다.
중심 주인공이 아닌 스네기료프와 그 아들 일류샤에 대한 묘사조차 정말 눈물겹고 인간적인 서글픔의 끝을 보여준다. 아들을 향한 무한한 부정의 스네기료프, 그는 너무 고결하고 아름다운 아버지인데 한편으로는 우스울 정도로 강박적이고 무지하며 주정뱅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아들 일류샤는 이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신뢰하는데 착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비정함과 너무도 다정한 아버지 때문에 속을 끓이는 모습 때문에 독자는 코를 훌쩍이지 않을 수 없다.
또 무지하고 몽매한 민중인 농부들이나 장사치, 하녀와 길거리의 이름 없는 인물들의 천연덕스러운 교활함과 광폭함, 그리고 순진성 또한 군데군데 등장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오직 한 사람, 순결하고 선하면서 진실을 한 눈에 식별 할 줄 아는, 그러고도 인내와 의지를 겸비한 알료샤를 내세워 신과 인간에게 헌신적인 그를 희망의 등대처럼 추켜세운다. 알료샤는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려면 아이와 같아져야 한'다는 성경 구절처럼 아이들에게도 신의와 존중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선하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알료샤의 이토록 투명한 심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오히려 평면적이고 다채롭지 못한 심리묘사만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사심이 없고 탐욕이 없는 사람을 설명할 때 우리는 이런저런 수많은 어휘들이 필요치 않음을 느낀다. 어떻게 그렇게 깨끗한 사람에게 할 말이 많겠는가. 오직 경탄과 존경 외엔 특별한 서술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작가는 알료샤에게만은 심리묘사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달리 말하면 그 외의 모든 인물들은 완전한 심리소설의 오롯한 주인공들이라 해도 좋겠다.
어제(9월 15일) 시간이 없어 일부만 쓴 것에 나머지를 더 얹어서 끝맺어야겠다. 오늘은 9월 16일이다.
또 이 소설은 범죄소설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 표도르가 드미트리에게 살해당한다는 전제하에 서사가 시작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때문에 가능해지는 분류이다. 그런데 이 살인은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의 범죄학적인 요소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영리하고 치밀한 계산하의 살인행위,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살인의 이유와 동기 등이 범죄소설 장르로도 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범죄로 인해 결국 법정에서 실제 범인을 밝히려는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가 맞붙고 수많은 증인들과 증언들, 증거품이 제시되는 것은 이 소설이 범죄소설이면서 동시에 법정소설이 되는 이유가 된다. 내 역량이 이런 쪽에서는 심히 부족하기에 간단히 언급만 하고 이 부분은 넘어가야겠다.
다음에 짚고 싶은 것은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비되는 사상이다.
조시마 장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하의 관계로, 그러나 신은 인간을 억누르는 존재가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은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6편 '러시아의 수도승'에서 알료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조시마는 죽기 전에 자신이 수도승이 된 과정과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사상을 조용하지만 열렬하게 말한다.
"속세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하느님의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는 온 세상, 거기서 하느님의 얼굴과 그분의 진실이 왜곡되어 있진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과학이 있지만, 과학 속에는 오직 감각에 종속된 것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정신적인 세계, 인간 존재의 드높은 반쪽은 완전히 거부되어 증오마저 깃든 어떤 의기양양함과 함께 추방되어 버렸습니다. 세계는 자유를 선언했지만, 특히 최근에 더더욱 그러했지만, 그들의 이 자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로지 노예적인 굴종과 자살뿐입니다! 세상은 "어떤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실컷 충족시켜라, 왜냐면 누구나 아주 명망있고 아주 부유한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두려움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증대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자 바로 이것이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자유를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욕구 증대의 권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부유한 자들에게는 고립과 정신적인 자살, 가난한 자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이 있을 뿐이니-- 이는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수도승의 길은 다른 것입니다. 복종과 금욕과 기도가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오직 이런 것들 속에만 그야말로 참된 진짜 자유로 가는 길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쓸데없고 불필요한 욕구들을 떨쳐 내고 나의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오만한 의지를 복종으로써 다스리고 채찍질하여 이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정신의 자유에, 그와 더불어 정신적인 명랑함에 다다르는 것입니다!"(2권, 76~78)
이 조시마 장로의 대척점에 이반이 지었다는 '대심문관'이라는 서사시가 있다. 이반은 이 서사시를 알료샤에게 들려 주는데 그 요지는 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들은 길을 잃고 헤매이며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수 밖에 없으니 인간의 악행과 그 불행에는 하느님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하느님이 존재하고 그가 만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걸, 또 하느님을 결코 믿고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신념을 펼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은연 중 퍼져있는 생각인 것 같다. 실제로 무신론자들도 많지만 그 반대쪽에는 신이 있다해도 인간의 삶과 세상법칙에 신은 그다지 영향력이 없으며 오히려 신이 인간의 불행을 방조하기에 신뢰할 수 없고 나아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극소수는 그래서 신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반의 사상에 완전히 동감할 것이다. '대심문관'의 두 문단만 인용해 보면(대심문관이 인간으로 다시 온 예수에게 하는 말), 여기서 '우리'는 대심문관과 그 소수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신들의 자유를 우리의 발 아래로 갖다 바치면서 우리에게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여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니까! 또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될텐데, 왜나하면 그들은 나약하고 악덕하고 하찮은 반역자들일 뿐이니까...."(1권, 533~534)
"맹세코, 인간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저급하게 창조되었단 말이다. 인간이 네가 행한 것을 행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너는 마치 그를 더 이상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꼴이 돼 버렸고, 이는 인간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그자, 바로 그 자가 말이다! 인간을 덜 존경했더라면, 그래서 인간에게서 더 적은 것을 요구했더라면, 이것이 더 사랑에 가까웠을 것인데, 인간의 짐이 더 가벼웠을 테니까 말이다."(1권, 539)
하지만 이반의 말을 다 듣고 난 알료샤가 지적한다. 결국 형(이반)은 신을 인정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고 그가 만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을 분명히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 반대의 측면, 신이 인간에게 끼친 긍정적인 면은 또 수없이 찾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몰입해 읽다보면 대부분은 이 두, 서로 다른 이념에 공감하고 말 것 같다. 어느 쪽의 의견이든 잘 들어보면 이해 못할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흥미롭고 긴장감이 지속되는 한편 지루하기도 한 법정에서의 장면이 결말에서 펼쳐지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작가로서 가장 고통스럽고 애를 먹은 집필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사람들의 수는 정말 많고 그 증언 또한 일일이 기록되는데 그들의 처지와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그들의 위선 또한 아주 신랄하고 희극적이다.
특히나 카챠의 증언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녀의 원래의 성격(우아하고 진지하고 솔직한)에도 불구하고 이반을 사랑한다는 여실함이 그 자리에서 돌발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카챠는 자신은 미챠를 사랑한다는 명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미챠를 사랑해야한다는 윤리에 매여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이반이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공범이며 교사자라고 밝히자 카챠는 거의 미친 듯 아니라고, 범인은 바로 미챠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심연에는 이반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반의 미래는 자신의 미래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카챠가 이반의 형 미챠가 범인이라고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른 것은 이반을 향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카챠의 심연에서는 전부터 미챠를 증오하고 있었고 그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챠는 자신을 쫓아 자신의 고향까지 온 여인 카챠에게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그루셴카와 떠나려고 작정했으니,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뻔뻔한 배신이었던 것이다. 이 카챠의 증언은 미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미챠는 카챠의 배신에 찬 증언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간의 과정에서 그녀에게 늘 미안했고 그래서 당연히 그녀의 히스테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처럼 묘사된 검사의 논고는 연설문을 능가하는데 그는 아버지를 죽이는, 갈수록 역사라는 의미가 희미해지고 패륜이 극악한 당시의 러시아를 빗대면서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임을 부각시킨다. 이 검사는 사회적 책임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마지막 작품처럼 돼버린 이 논고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원없이 피력한다. 몇 달 후 그는 병으로 사망하는데 왜 그가 이렇게 열정적이었는지가 의미 깊게 다가온다.
또 알료샤의 친구이며 신학생이었던 라키친의 증언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인데 그는 이 법정이 일종의 데뷰무대라고 여긴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을 탐색하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까 모색해온 전형적인 성공지향적 인물이다. 이 법정에서 그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여러 면에서 자신을 드러냈지만 탁월하게 명석한 변호사로부터 무안을 당한다.
이 변호사는 겨우 삼일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왔지만 그 삼일 간 여러 사람들의 행태와 그 심리를 꿰뚫어보았고(하긴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그는 자료를 어느 정도 수집했던 것도 같다) 그들이 하는 증언이 단지 그들의 무지와 깊이 없는 의식에서 나온 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청중들이나 사법부에 일깨워준다. 그 변호사의 명망은 괜한 게 아니었고 법정의 누구보다 사태를 빨리 알아채고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꿰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3000루블의 행방과 그 돈의 행적을 쫓는 것이었다. 여기에 재판의 진짜 승패가 걸려있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란 건 다른 한편의 함정도 있다. 돈이 자신의 목소리로 '내가 바로 표도르가 갖고 있던 그 돈이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반이 실제 스메르자코프가 갖고 있었던 3000루블을 갖다 냈는데도 그것은 중요한 증거물이 되지 못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이반이 자신의 형을 구하기 위해 그 돈을 구해 그냥 가지고 온 거라고 짐작하고 넘어갔다. 진실을 안다면 이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지만 아무도 애석할 건 없었다. 이반 외엔 진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또 농부들이나 하인, 점원 등 많은 시민들이 3000루블에 대해 증언에 나섰는데 사실 이들은 아무도 이 돈을 제대로 보거나 세어본 적은 없었다. 단지 미챠가 떠벌인 돈과 소문으로 돈의 액수를 들었기에 사실로 여기고 믿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증언은 명백한 진실이라고 믿기도 어렵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는 진위를 판가름 할 수 없는 이 돈의 증언에 대해 그 증언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증인이 올바른 성품의 소유자인가를 대신 피력한다. 이런 변호사의 공격은 사람들이 얼마나 사실이 아닌 것을 정황상 사실로 믿는지에 대한 우매함에 대한 조소였다. 하지만 수많은 우매한 증언들이 진지하게 쌓이고 보면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그건 현재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뉴스, 우매함을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조악한 조작인데도 그걸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미챠에게 이 증언들이 끼칠 악영향은 불을 보듯 훤하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미챠 스스로 떠벌리고 다닌 결과인 것을. 자신이 진중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허상에 빠져, 쓸데 없는 영웅심에 들떠 떠벌리고 다녔던 것을 후회해야 할 뿐.....
지금까지 쓴 감상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가니 저녁밥을 지으러 가야겠다. 혹시 내일 시간이 된다면 나머지를 또 쓰고 싶지만 여유가 없다면 이것으로 끝을 낼 수도 있겠다.
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민중이며 쓸데없이 허랑방탕하게 나다니다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쓴 드미트리이며 지식에 얽매여 헛된 논리에 빠져든 이반이며 자린고비면서도 여색에 눈이 멀어 무절제해진 표도르이며 자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모르고 허망한 윤리의식에 빠져있는 카챠이며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는 그 상대가 죄인이 되어버린 불구적 사랑의 그루셴카이며 자신의 지성과 특별함을 뽐내고 싶어 안달하는 라키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