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게임 1,2
박상우 지음 / 해냄 / 2020년 11월
내가 아는 인류는 지구상에서 태어나 살다 죽은 수많은 인간들이다. 그 인류 중 하나가 나이고 나의 조상들이 그들이다.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이 어떤 의식세계를 살았을지 짐작은 되지만 구체적으로 추측하기는 힘들다. 최초의 인류는 동물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해서 문명인인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건 의외로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쯤의 사람들은 상상이 된다. 그들은 대부분 늙어가면서 점점 비슷한 생각들을 하게 됐을 것이다. 늙어가면서,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비슷비슷한 번민을 하다 해답을 찾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특이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그런 고민을 안고 살았다. 이 책이 그런 나의 오랜 사유에 답을 해준다. 운명이 무엇인지, 사는 동안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해준다.
일단 이 책의 형식이 특이하고 흥미롭다. 1권과 2권이 맥락으로는 연결되지만 달리 보자면 1권이 이보리와 어르신의 문답적, 구도적 소설처럼 느껴지고, 2권은 잉카와 작가, 상위자아가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우주적인 전쟁과 그 해결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더구나 챕터가 아예 두 형식으로 나뉘는데,오롯이 소설 자체인 챕터와 소설 밖 작가의 시점인 #이 붙는 챕터. 그래서 이 소설은 1권과 2권, 챕터의 두 다른 버전. 이런 식으로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분리되고 심화되다가 서로 교차되고 서로 만나고 영향을 끼치면서 점점 더 큰 우주적인 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특히 #이 붙는 챕터는 작가 자신의 장인데,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마주하게 되는 정신적, 소설적 난관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독자로서는 작가의 사적 생활과 소설 쓰기의 지난함이 그대로 느껴져 소설보다 더한 현실을 보게 되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더구나 작가는 책 말미에서 <운명게임>은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면서 소설이다,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은 이 소설의 성격과 그 주제의 깊이가 단순한 서사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기에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언사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적인 서사와 더불어 우주적인 생의 비의를 함축하고 있다.
살면서 과연 내 삶이 진짜 내 삶인지, 운명이 어떻게 정해져 있길래 나의 삶이 이렇게 전개되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았다. 오래전부터 운명이 나에게 강요하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비관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작품 속의 잉카나 상위자아, 그들의 설파를 들으면서 이해되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한 셈이다. 생에 대한 비의 아닌 비의. 그 엄정하면서도 논리적인 시스템. 옆만 보지 말고 위를 보고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함을, 사소한 것에 충실하면서도 나의 앞으로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로 바뀌는 것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겠다는 자각.
수많은 명문 중, 나를 각성시킨 몇 구절을 옮겨본다.
이보리: 바로보기가 이루어지면 모두 스러질 망상들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를 끊임없이 되뇌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의식은 닭이 품은 알처럼 깨어나기 위한 부화를 시작합니다. 자기 망상으로부터 깨어나는 방편이 그토록 간단명료한데, 그조차 안 하면서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엄살을 부리다니요.(37쪽)
"그럼 제가 창조된 이유나 앞으로 펼쳐지게 될 미래에 대해서도 지금 알 수 있나요?"
뜻밖의 질문.
"누구나 그런 걸 궁금해 하지만 그런 건 너를 창조한 나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미래는 언제나 확률적 가능성 속에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62)
이보리: 기막힌 논리로군요. 어느 누가 어르신께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나요?(75)
이보리: 어르신은 '나'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이 뿌리를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샤카무니의 바로보기가 필요한 것이고요.(76)
자연스럽지 못한 건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너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에 무조건 최선을 다해라. 네가 취사선택해 봤자 다시 돌아올 일들이니 기회를 되돌리지 말아라. (140)
다 옮기려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중도중지...
그런데 책 밖의 얘기면서 책 얘기인데 그동안 봤던 수 많은 책들 중 단연코 <운명게임>,이 책의 속지가 얇으면서도 매끄럽고 질이 좋다. 심백 페이지가 넘는데도 두껍지 않고 덜 무거우면서 만지면 손가락 끝 감촉이 좋다. 겉표지 또한 분홍색과 블루로 예쁘고 재미있는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해냄이 박상우 작가님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ㅎㅎ
운명게임, 오랫동안 내 삶이 내 삶이 아니고 누군가 강요하는 삶 같아서 그에 분노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바뀐 논리적 감정은, 누군가 나에게 운명이라는 게임을 맡겼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게임 속의 캐릭터라면 나는 점점 진화하고 발전하는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상위자아와 기쁘게 만나고 싶다.
너, 정말 공부 잘 했구나! 정말 열심히 잘 했어. 그러니까 우리 잠시 쉬자. 저기, 시원한 바람 불고 꽃들이 활짝 핀 초원에서 잠시 쉬고, 그 다음을 준비하자. 상위자아가 내게 그렇게 말했으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