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이 책을 펼칠 때 나는 이 소설이 장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 번에 기획하고 집필한 정석의 장편이 아니다. 해설을 보면 1부 '커다란 노트'는 1986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비밀노트), 2부 '증거'는 1988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타인의 증거), 3부 '세 번째 거짓말'은 1991년에(우리 번역 제목은 50년간의 고독) 쓰여졌다고 한다. 하나 이 세 작품을 한꺼번에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는 원제목과 조금씩 달리 제목을 달고 세 편을 하나의 소설처럼 묶어 펴냈다. 

 그래서 읽다보면 1부와 2부는 연관성을 느낄 수 있지만 3부에 이르면 모든 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내용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반어적이고 모순적이라 해도 문체마저 1부의 단순한 동화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보인다. 차별해보자면 1,2부가 동화적 리얼리즘, 3부는 추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3편(부)이 맥락으로는 한 소설이 될 수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완전히 각기 다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하다.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일단 표제부터 보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생각할 거리를 얕고 깊게 흔들어놓는 제목에 준한다. 작가가 처음 쓸 때 3부인' 세 번째 거짓말'을 염두에 두고 출판사가 다시 붙인 제목인데, 독자를 자극하는 데에는 성공적인 것 같다. 어딘가 불순하면서도 무언가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줄 것 같은 제목이 아니던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거짓'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면 얕게는 사람의 속살을 헤집을 것 같은 욕망을, 깊게는 불순하고 불온한 인간 내면의 음울하고 헛된 위선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간의 영화나 문학작품들에서 실제로 이 '거짓'이라는 단어를 표면에 띄운 작품들이 그렇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거짓'을 의식하기보다 그런 작품들이 전부터 나를 그런 감정에로 견인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나나 그들 작가나 독자들 대다수가 '거짓'이라는 단어에 어떤 불유쾌한 감성과 또 그 반향으로 인간 본연의 비밀이 탄로나기를 한편 기대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존재들에게 거짓이란 어디 세 가지 뿐이랴. 존재들은 매일 거짓과 진실 사이를 오간다. 그러니 3부의 헷갈리고 모호한 사실들 앞에서 처음엔 의심스럽던 감정들이 나중엔 생의 복잡다단함을 이해하려는 제스쳐로 바뀌어간다. 우리들 인생 자체가 모든 책을 용납하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모호한 책들을 용납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까닭이다. 그만큼 삶이란 부조리하고 모호 자체인 것이니까... 더구나 작가는 1,2부에서 루카스가 얼마나 모순에 찬 시대에 살고 있는지, 이미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우리를 세뇌시켜 둔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추천해준 사람은 호선님이었다. 감정에 얽매여 사적 진실을 나열하면 안 된다고, 주인공의 마음을 나열하지 말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쓰라고... 단문과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문체, 마음을 온전히 생략한 문장들이 참신하고 기발했다. 그런 글은 읽기에 수월하면서 부담이 되지 않는다. 아주 명백한,글쓰기의 총체적인 방법론이 갑자기 35쪽에 등장한다. 그 부분은 호선님이 내게 읽어준 부분이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름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 작풐을 읽으면서, 특히 1부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가만히 더듬어보니,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에서 전쟁의 참상을 어린 소년이 겪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였다. 그때도 참 마음 아프면서 읽었는데 이 소설 또한 전쟁중에 보호자를 잃고 떠도는 어린 아이들의 비참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소년소녀들 뒤에 보이지 않는 어른, 전장, 수용소에서 극악한 참혹함에 내던져진 어른 남자들이 죽어가는 장면이 보일 듯 다가온다. 또 남자들이 떠난 도시와 농촌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있으면서도 아이들과 노인들을 건사해야하는 여자들의 고통 또한 만만찮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을, 사람들에게 보호 받던 동물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 지금도 평생을 피난다니고 폭탄 속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인류 전체의 비양심 때문에, 또는 인류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살상과 파괴가 벌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누구의 삶도 하잘것없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고통을 받는 건 모두가 나서 도와야 될 일이기에...


 장편이 될 만한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페이지마다 녹아들어 있다. 그 한명 한명을 다 불러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몇 권의 장편소설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인물들 전부가 놀랍고 비밀스런, 그러나 전쟁중에는 다반사이기도 한 비극적인 서사가 곳곳에 산재한다.

 클라우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사라, 사라의 엄마와 그 부모까지, 이 한 집의 가족서사만 해도 만만찮은 분량이 된다. 거기에 클라우스의 할머니까지 채우면 국경지대에서 도시까지, 불륜과 이복남매간의 사랑까지, 소설의 소재는 넘쳐난다. 

 

 최초의 시작은 그러나 클라우스에게 전쟁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다. 클라우스와 루카스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최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자 어머니는 권총으로 남편을 쏘고 그 와중에 총탄이 루카스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런 클라우스에게 삶의 아이러니가, 어린아이가 어쩔 수 없는 배신적인 생의 폭력이 다가온다. 

 아버지는 죽고 남은 루카스는 재활원으로 떠나고 어머니도 정신병원으로 떠나 풍지박산이 된 후에 그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 안토니아가 데려다 돌봐주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안토니아는 딸 사라를 낳는데, 안토니아로서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과의 불륜 때문에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보호해주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를 낳았으니 그녀의 인생 또한 너무나 파란만장하다. 그녀는 그러나 죽은 연인의 아들을 돌보고 태어난 딸을 키우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이복 남매의 뜻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그녀는 클라우스를 내쳐야한다. 하긴 클라우스와 사라가 성인이 되어서도 만났다면 독자로서는 또 한편의 불륜 아닌 불륜을 보았을 테니... 그쯤에서 멈춘 게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어째서 삶은 이렇게 복잡하고 예기치 않은 시련들 뿐인지... 비록 한 집안을 붕괴한 불륜의 주인공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 만도 없는 여자. 사라. 사랑이 무어길래...


또 2부에서 마티아스의 엄마인 야스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야기 또한 믿고 싶지 않은 거짓말같은 서사로 시작된다. 그녀는 임신한 채, 루카스에게 발견되는데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이이다. 루카스가 그녀와 처음 섹스할 때 야스민은 "아버지, 아, 아버지..."라고 신음한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연인인 것이다. 그리고 야스민이 말한다. 아버지는 참으려고 노력했다고. 아버지를 원한 건 자신이었다고... 짧은 야스민의 서사이지만 그 사랑의 과정이 야스민의 입으로 진술되기에 진실성이 담보되는 편이어서 어느 정도는 나도 감정이입이 되었었다.


 그리고 1부에서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언청이의 안쓰럽고 기괴하기까지 한 짧은 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녀는 전쟁으로 광분한 적군을 스스로 불러들여 차례차례 그녀에게 성폭력을 자행하게 만든다. 그녀 스스로... 정말이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지독한 '거짓 리얼리티'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한다. '아, 좋아요. 좋아! 얼마든지 오세요, 또 한 사람, 또다른 사람!' 언청이는 이렇게 적군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벌린 양 다리 사이에 피와 정액이 뭉쳐져 말라붙어 있는 상태로 속눈썹들은 서로 엉겨붙었고 미소 짓고 있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까만 이빨들이 보이"는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랑할 사람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겨우 개에게 자신의 성기를 빨게하던(들에서) 그녀는 무자비한 적군의 광포한 성적 폭력조차 처음 당하는 여성으로서는,희열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어떤 관습이나 틀을 갖지 않는 작가의 무제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동적이면서(작가의 상상력이 감동적이라는 뜻이지 이 삽화 자체가 결코 감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힌 나의 의식이 기습당한 사건이었다.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틀에 갇히고 관습에 매이고 스스로의 도덕윤리에 침식당해 있는지 깨달았다. 


 작은 성당의 신부와 그를 도와주는 하녀, 할머니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쓰는 장교와 그의 당번병, 그리고 장교의 친구, 수확물을 받아가는 조제프 아저씨등, 인정 넘치고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약점과 자신들만의 비밀을 간직한 이들의 아주 작은 삽화들도 무척이나 재미있고 우수적이다. 가끔은 이런 삽화들로 인해, 그리고 쌍둥이의 악동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이야기들이 1부를 거의 동화처럼 만들어준다. 할머니와 구두장이 아저씨 등의 이야기도 동화에 나오는 어딘가 으스스하고 슬픈 이야기같아 잘 어울렸다. 


 대강의 인물들 이름만 거론해야겠다. 일단 너무 많다보니... 그리고 이들은, 그들로 인해 전쟁 중의 도시와 인간에 대한 거대한 그림이 묘사되었기 때문에 작건 크건 똑같이 중요한 소설적 요소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우고 할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래 묵은 소문의 주인공인 클라우스의 할머니, 서점주인과 페테르,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이까지 낳은 야스민, 야스민이 낳은 아이 마티아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추억 속에서만 살아가는 도서관 사서인 클라라, 이들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들이고 전쟁으로 인해 삶이 파탄난 사람들이다. 궁핍하고 불안한 시대에 살면서도 이들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잠 못 이루며 그들을 기다리고 회상한다. 그러고 보니 서점 맞은 편에 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노인도 중요인물이다. 그는 7년간을 거의 자지 못하고 자신이 살았던 집 가까이 있는 공원에 찾아가 벤치에 기대 잠시 쪽잠을 잔다. 그의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먼저 총살당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늙은 그의 형상이 가장 조용하게, 슬프게 내겐 다가왔던 것 같다. 엄청난 내적 서사의 인물이다. 

 

 시대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겐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는 운명이 그럼에도, 있다. 사랑하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운 것,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짧은 생을 헛되이 살게 되는(꼭 헛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운명의 일부이므로) 고질적인 마음의 병들. 그럼에도 다음 세대 또 역시 그렇게 헛된 마음의 병들을 앓는다. 사랑, 기다림, 그리움, 그리하여 절망, 그리고 가끔 솟구치는 욕망과 분노, 그러나 생은 그런 것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거나 무상으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이 있고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을 것이다. 어제 한숨을 쉬고 그러면서도 어젯밤 꿈을 꾸었고, 오늘 다시 일어나 무언가 하려 한다. 언제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일이 기다려주는 것처럼. 찰나를 살면서도 영원을 사는 것처럼. 저 어딘가로 날아오르기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