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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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집은 내게 하나의 철학서라 할 수 있고 정신이 조금 나간 신경증 환자의 독백이며 불안과 파괴 본능에 몸서리치는 작가의 자전적 고백서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더 나아가 방기된 유년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의식의 흐름같은 이 단편들이 자기를 불순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너무 사변적인 독백같고 다른 편으로는 인간성을 훼손당한 자신의 극대화된 대변이라고도 여겨질 것이다. 그렇듯 소설은 외곬으로 세상에서 배제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어쩌지 못하는 삶의 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소설이 매체처럼 한 사건을 정면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사건들 전체를 상징한다고 할 때, 소설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자신과 세상 전부를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해도 그것 또한 이 세계의 극히 작은 일부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차피 커다란 세계, 우주의 먼지 한 톨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한 인간의 삶은 그토록 고통스러워도 세계를 이루는 모순과 자연의 법칙 안에서 그저 일어나고 스러지는 순간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보면 죽음만이 영원한 것이고 불안과 광기, 슬픔과 고통은 한 순간 생명이 있던 부조리한 자리에서 피어났다 지는 들풀 하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을 누군가는 기록해야한다. 작가는 그것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그래서 무상하고 유구한 자연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다 가는지를, 그 모순 투성이의 삶이 얼마나 리얼하게 인간을 옥죄고 괴로움에 떨게 하는지... 그것을 깨우쳐주는 문학이 없다면 얼마나 더 헛되고 허무한가.


두 명의 교사

모자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야우레크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

인스브루크 상인 아들의 범죄

목수

슈틸프스의 미들랜드

비옷

오르틀러에서--고마고이에서 온 소식


  이렇게 열 편이 수록되어 있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문지판 스펙트럼 시리즈로 얇고 가지고 다니기 알맞게 가볍다. 

  내 느낌을 적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얼른 베른하르트를 흉내내는 글을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문지에서 책소개하는 난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고 나는 한글 2018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질병으로 죽어가거나 자살하거나 살인하거나 살해당한다. 그의 작품에는 줄거리나 플롯 없이 다만 누군가의 죽음만 주어져 있고, 그가 죽기까지의 정신적 혼란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문장은 이 죽음과 광기에 대한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병렬과 대비로 과장하고 반복하고, 빠른 속도로 패러독스를 계속하며, 형용사와 부사는 언제나 최상급으로 사용한다. 그는 독일어 문장의 특징을 십분 발휘해 끝없이 이어지는 종속문의 사슬 속에 수많은 쉼표와 느낌표, 쌍점등을 흩뿌려놓고, 동의어를 끝없이 반복하고, 때로는 구나 절뿐만 아니라 문장 전체를 반복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정신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나타내는 이러한 광적인 문장은 읽는 사람의 머릿속까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다.

  베른하르트는 삶에 대한 어떤 기대도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삶에 대한 환상이 없기 때문에 문학에도 환상이 없다. 베른하르트는 노발리스와 카프카의 관념적인 아들로 간주되지만, 그들과 달리 어둠과 죽음을 예찬하거나 구원의 빛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베케트와도 자주 비견되지만,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삶이란 결국 모두 미치고야 말 절망인데도 미래라는 과대망상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옥 속에서 더듬대고 있을 뿐, 존재론적인 질문들엔 당연히 답이 없다. 같은 주제, 같은 질문의 부조리한 ㄴ반복만 불가피하다. 이를 통해 베른하르트는 이 세상이,인간이 처한 조건이 얼마나 잔인하고, 삶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집요하게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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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책을 들쳐보니 면지에 연필로 2018, 1,9~1.13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을 나는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시 읽은 것이고 두번째 읽은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때 나는 이 책의 대부분을 이해는 대강 한 것 같지만 그 분위기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나는 이 소설집에서 주인공들의 불륜과 그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안타까워하고 쓸쓸해하는 심상을 어이없이 본 것 같다. 뭐, 불륜이, 성적 욕망이 그렇게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야할 만큼 지대한 오브제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표지의 매혹적인 여자의 뒷모습은 그저그런 소설에 알맞는 표지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때의 나는 제임스 설터를 건너뛰었다. 
  하나 다시 읽은 어젯밤은 그때의 감상과는 다르다. 바로 전 읽은 '가벼운 나날'이라는 소설 때문이다. '가벼운 나날'이 설터의 문체와 그 세련되면서도 쓸쓸한 생의 회한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기에 나는 이미 설터에게 승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어젯밤을 읽으니 대부분의 작품 전부가 비슷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설터의 문장은 아침 공기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그의 문장은 도시의 새벽빛같은 아우라를 지닌다. 구체적인 표현을 하기가 버겁지만 에로틱하면서도 절제되고 욕망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태도는 절박함 가운데서도 다른 작가들에 비해 모호함이 겹쳐진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과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처연한 바람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목차는
 혜성
 스타의 눈
 나의 주인, 당신
 뉴욕의 밤
 포기
 귀고리
 플라자 호텔
 방콕
 알링턴 국립묘지
 어젯밤

  이렇게 열 편 가운데 혜성과 스타의 눈을 뺀 나머지는 하나하나가 비슷해보이는 에로티시즘과 회상을 담고 있음에도 탁월한 스토리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의 주인,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서사여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는데, 한 여자의 잠재된 내적 욕망이 개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진다. 개는 '그'를 비유하고 대변하는 것 같은데(또는 그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그 개는 그녀를 따라오고 그녀는 개에게 자신의 절박한 감정을 투사한다. 그리고 개는 죽기 직전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녀는 폭풍같은 한 시절을 보내고 개의 주인인 시인이 술집에 앉아있는 걸 멀리서 바라본다. 그는 개를 잊겠지만 그녀는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고 욕망투성이인 매혹적인 여자였다. 작품 속에서 정말 사랑스러운 주인공을 만날 때 나는 감동하고 슬픔이 휘감아오는 걸 느끼는데 이 여자가 그랬다. 이 작품은 여러 번 다시 읽을 명작이 될 것 같다.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좋았지만 독후감은 여기서 끝내련다. 할일이 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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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설터의 <어젯밤>을 3,4년 전쯤 누군가 주어서(선물은 아니었다. 자신이 읽은 걸 주었으니까)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제임스 설터라는'작가 중의 작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벼운 나날>이 쌤에 의해 언급되는 것을 듣고 당장 알라딘에 주문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이 한 권의 책을 한 달에 걸쳐 읽었다. 

  결과는 경탄이었다. 서사보다는 작가의 표현이 그득찬 문장들, 사소한 풍경에서조차 사유가 녹아든 짧고 담백한 문장, 너무나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줄을 긋다보면 한 페이지 전부가 줄이 쳐지기도 했다. 

  이래서 줌파 라히리가 "나는 작가로서 이 소설에 부끄러울 정도로 큰 빚을 졌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설터가 세워놓은 높은 기준에 겸허해지고 만다"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작가들은 다 놀라운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 경외감을 일으키는 작가들이 있는데 설터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벼운 나날>은 어찌보면 단순한 서사를 갖고 있다. 허드슨 강가의 호화로우면서도 절제된 중산층 가정의 남편과 아내인 비리와 네드라의 젊어서부터 늙기까지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그들은 중산층에서도 고급하면서도 소박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고 두 딸의 교육과 인성을 위해 애쓰는 교양있는 부부이다. 그들의 삶은 밖에서 볼 때는 균형 잘 잡힌 조화로운 가정처럼 보인다. 남편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건실한 건축가이고 아내는 두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어디에 나가도 흠잡을 데 없는 지성과 미모를 지닌 여자다. 

  그러나 밖에서 보게 되는 삶과 안에서 겪는 삶은 대부분 다르다. 비리는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건 바로 이 다른 삶"이라고 통찰한다.

  그렇듯 설터가 작품에서 다루고자 한 것은 삶, 그 중에서도 '다른 하나의 삶'. 비리와 네드라는 서로 죽이 잘 맞는 부부처럼 보였지만, 자녀들에게 헌신적이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부부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정생활에서 양립하기 힘든, 어떤 욕망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 내면의 부조리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환경에 처할지라도 인간으로서, 한 개체로서 느끼는 불안과 고독감, 또다른 누군가를 필요로하는 불순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이혼을 하고 남은 자신들의 생을 마저 살아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남들 눈에 보였던 밝고 환한 생도, 불안하고 비밀스럽게 불온했던 생도, 결국엔 삶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삶은 불순한 그늘 진 생과 햇빛 속에서 건강하게 타올랐던 다른 쪽 생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올라온 다른 가지일 뿐이었다. 

  네드라는 죽고 이탈리아에서 젊은 새 여자와 결혼한 비리가 네드라가 묻힌 곳을 찾아온다. 이제 나날은 가벼워졌고 모든 것은 사라지며 흩날릴 뿐이다. 

  시간은 흔적마저 지우고 우리들은 모두 사라진다. 무겁고 고통스러웠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도 꽃잎이 지듯 어느새 지고 있다. 이 무상함, 이 덧없음. 그러나 그래서 삶은 빛나는지도 모른다. 

  

  설터의 문장들은 하나하나가 하나의 경구면서 철학이었다. 사소한 풍경조차도 작가에게는 사유를 나타내는 오브제가 될 수 있고 생을 비쳐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좋았던 문장이 너무 많아 밑줄을 쳤지만 몇 군데만 옮겨본다.



"그렇지만 설터는 벌랜드 부부를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전형'으로 그리고 있고, 과거의 '서사적 논평'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렌즈를 넓혀 나간다. 우리는 벌랜드 부부의 가장 나약한 순간을, 우습고 매력 없고 자조적인 순간을, 즉 비난받을 만한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 리처드 포드가 쓴 서문 중 


"여기가 그들이 사는 새장이고, 벌집이었다. 두꺼운 슬렝트 지붕에,방은 작은 상점들 같았다. 이 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한 척의 배 같았다. 그 안에서는 유심히 들으면 온작 소리가 났다. 물소리, 나직한 목소리, 곡식을 가는 일정한 소리."


"그들의 삶은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강아지는 이미 그 안에 모든 용기와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이 있었다."


"뉴욕은 소유물의 대성당이었다. 그 냄새조차 꿈이었다. 이 도시에선 거부당한 사람들조차 떠나지 못했다."


"한번 보면 모든 상황이 바뀌는, 그런 여자였다."


"인생은 지식을 경멸한다. 지식따윈 대기실에서, 밖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함께 꾸려졌고, 함께 짜였다. 그들은 마치 배우들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성실한 배우들. 오래된, 불멸의 연극대본 이상의 세상은 없는 배우들."


"아버지의 옷들은 구세군이 가져가도곡 침대 위에 두었다. 셔츠와 벗어놓은 구두들, 그가 누워 있는 무덤 위의 흙이 다져졌다. 모든 장신구들, 모자와 벨트와 반지들. 그의 몸을 떠난 장신구들은 얼마나 볼품없는 싸구려인지, 연극 무대에셔 쓰이는 물건들 같았다. 햇빛 아래서 보면 너무나 평범한, 심지어 기만적인 소품들."


"모든 건 지나갔고 끝이 났다. 갑자기 이 모든 일이 어떤 징조처럼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그녀는 이제 드러났다. 자기 자신의 마지막으로 이어진 길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힘이 셌지만 그 힘은 유아적이었다. 그들 사이에 뭔가 달라졌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애정을 가질 터였지만, 여름은 지나갔다."


언제나 좋은 책을 읽고 난 후 느끼는 건, 그냥 또다시 읽거나 책 전체를 필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나무 같아, 그녀에게 말했다. "자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뿌리가 아주 깊고 또 그 뿌리들은 길게 뻗어나가. 상상 이상으로 멀리. 그렇게 그냥 잘라버릴 수가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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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모래의 여자>는 일본의 카프카라고도 불리는 아베 코보의 베스트 셀러이며 스테디 셀러이다. 아베 코보는 실존주의적 작가, 전후파 작가라고도 불리며 극작가, 연출가로도 활동했다. 의과대학을 나온데다 수학이 특기였고 곤충채집에 흥미가 있었고 운동도 잘했다고 한다.  다양한 방면에서 천재적인 사람이었고 시대를 훨씬 앞선 예술가였다.  

  

  '모래의 여자'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맥락이 같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래를 계속 퍼올려야 하는 구덩이 속의 인간이 된 한 남자의 어이없는 이야기가 긴박하면서도 흥미롭게 펼쳐진다.

  평범하고 성실한 교사인 니키 준페이가 며칠간 휴가를 얻어 짧은 곤충채집여행을 떠난다. 기차로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바닷가에 도착한 그는 바다를 향해 가다가 자신이 원하던 사구를 만난다. 그는 모래땅에 사는 곤충, 특히 딱정벌레목 길앞잡이속의 좀길앞잡이를 채집하고 싶었다. 혹시 새로운 종을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반영구적으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욕망도 있었다.  

  그러나 모래언덕은 그를 호락호락하게 놔두지 않는다. 바람이 불때마다 모래가 입안으로 주머니 안으로 들어차고 원하던 벌레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구 바로 아래의 부락에서 노인이 나타나 현청에서 조사를 나왔느냐고 묻더니 아니라고, 교사라고 명함을 주자 그것을 받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몇 명의 남자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더니 돌아갈 차는 이제 없다고 알려준다.    그는 그럼 부락에서 묵겠다고 하고 노인은 그럼 자신이 숙박할 집을 안내하겠다고 한다. 그는 노인을 따라 모래 언덕을 깍아만든 커다란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일박을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가 만난 엄청난 함정이요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그는 곧 노인과 남자들에게 붙잡힌 좀길앞잡이 같은 벌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모래가 무시로 쏟아지는 구덩이 속 판잣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벌레를 채집할 목적을 말하지만 그 집의 여자주인은 이상하게 그가 자신의 집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은 말을 한다. 그녀는 '그들'과 공범이고 고된 모래파기에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기다려온 것이다. 그는 결국 매일 모래를 파는 삶을 살게 되는, 그녀와 같은 노예. 다른 게 있다면 그녀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그는 자신이 부당한 범죄에 희생자가 되었다고 여긴다는 점 뿌뿐이다.

  그는 온갖 머리를 짜내어 모래 구덩이 속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여의치 않다. 당장 그가 탈출을 시도하자 사구 너머 부락의 '그들'은 그에게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 물이 없는 생활이란 죽음을 맞아들여야하는 삶, 그는 항복하는 수 밖에 없다. 그의 내심은 그러나 이제 차라리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 하다가 진짜 기회를 얻어 탈출하는 것...

  그러나 그는 그 구덩이 속의 생활에 차츰 아주 천천히 길들여지는데, 그 곳에는 여자가 있지 않은가. 여자는 그에게 음식을 해주고 몸을 닦아주고 그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연민을 자아내기에 마냥 밉지만은 않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는 결국 그녀를 돕기도 하고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수장치를 만들기도 하며 구덩이 속 일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다 그는 '그들'에게 너무 답답하니 바다 풍경만이라도 좀 볼 수 있게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사정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부탁을 들어주겠으니 조건이 있다고 한다. 그는 무어라도 들어줄 태세. 그들은 그가 그녀와 관계하는 것을 구덩이 위의 자신들에게 보여달라고 한다. 그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까짓게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서는 어차피 보는 사람들이나 보여주는 자신들이나 수치스럽기는 똑같은 것이니 더 나쁠 것도 없다는 순간의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러나 그의 제안을 물리치고 그를 가차없이 때려눕힌다. 그녀는 분노하는 것이다.

  하나 종내,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로서는 행운이랄 수 있는 자궁외임신으로 그녀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진다. 놀란 그들이 그녀를 위로 끌어올려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 경황에 로프 사다리를 남겨놓고 그들은 부랴부랴 언덕 위에서 사라지는데...

  이제 그는 부락 남자들이 부재하는 가운데 탈출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로프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유수 장치에 대해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장치의 나무틀 한쪽이 비틀어져 있는 걸 발견한 그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 물이 고여있는 걸 보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소리를 듣는다. 그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면서 통의 물에 손을 담갔다.' 그는 '유수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한데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고,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실종 신고는 7년 후 실종자로 확인하는 판결로 끝난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아내가 있는 평범한 교사였다. 허황된 욕망이었지만 부정한 취미도 아니었던 곤충채집에 나섰다가 어이없는 일로 구덩이 속 모래집에 갇히게 된다. 한데 그 곳에도 일상이 있었다. 감옥같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 그런데 그 생활에 길들고 보니 결국 도시에서 쳇바퀴돌듯 살던 시절이나 모래를 파내며 사는 생활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삶이란 매일 무너지는 모래를 파 나르며 자신이 사는 좁은 집을 지키는 단조로운 일상을 견뎌야하는 시지프스의 삶이 아닌가. 일상이란 견디기 힘들지만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일상 때문에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면... 우리는 개미와 벌과 딱정벌레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그 일상에 길들인 여자이고 그는 그것에 저항하다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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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왕웨이롄의 단편집

    차례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책물고기

아버지의 복수

걸림돌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소금호수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인 나와 샤링의 삶은 정지된 것처럼 숨막히다. 그들은 소금호수의 황량한 풍경과 매일 같은 일상의 권태에 덜미를 잡힌 상태. 샤링은 유산을 했고 그 후 그녀는 소금호수에 대해 니미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둘의 관계에는 니미라고 할 만큼 적대적인 감정이 타오르고 있다.

더구나 한 달 전 같이 일하던 자오 형이 호수에 빠져 죽었는데 나는 내가 그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오 형과 폭음을 매일 일삼았었다. 나는 내가 자오 형을 죽이고 싶을 만큼, 아니 누구라도 죽이고 싶을, 그런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는 공포에 휘둘린다.

마침 그럴 때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샤오딩이 연인 진징과 함께 나를 방문한다.

샤오딩은 고향에서 탄광촌에서 일하던 당시 어둠 때문에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면서 밝은 빛 속에서는 그리지 못해 커튼을 쳐야만 한다고. 샤오딩의 탄광촌이 지금 나와 샤링의 소금호수와 똑같은 곳이 아닐까. 남들에게는 어휴, 어떻게 그런 데서 일을 했어?(탄광), 또는 와, 진짜 멋진 곳인데?(소금호수) 정도로 인식되겠지만 지독한 조건 하의 일상이란 사람의 영혼을 찢어버리고 황폐화한다. 삶이란 그토록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채워져있다.

한편 샤오딩의 연인인 진징은 계속 나의 관심을 끄는데, 일단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소금호수의 단순하고 황량한 풍경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여자는 나의 정신을 앗아간다. 정말 진징은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혹시 삶의 핍진함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실제보다 과장되게 도드라져 보인 건 아닐까.

그런데 진징은 샤오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누군가를 죽인 후 떠돌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넘실대던 물결이 잔잔해지면서 삶은 그렇게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샤링이 아기를 낳으러 떠나고 아들을 순산한 뒤 그녀는 내게 새 일자리를 찾아봐준다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 한다. 나는 아무도 이곳에 찾아온 적이 없는 것 같고 꿈이었던 것만 같다. 내겐 끝없이 자라는 소금만이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소음이 있는 낮인데도 나는 소금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작품은 일단 회화적인 글이다. 작가가 묘사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읽으면서 소금호수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소재 자체가 주제를 불러오고 이미지를 불러온다. 소재가 인물들의 평범하지 않은 심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나와 샤링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의 관계를 대변한다. 가장 절망하고 괴로운 이유는 관계 때문이다. 처음에는 설레고 행복했던 상대의 장점들조차 시간이 흐르면 견딜 수 없는 단점이 돼버린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누구라도 배신과 상실을 겪을 수 있다는 위태로움을, 원초적 고독을 말해준다.

진징은 어째서 사람을 죽이고 떠돌고 있을까. 샤오딩은 왜 그녀의 진실조차 모르는 것일까. 이것은 함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이별은 예정된 것이 되리라.

인간의 삶은 멀리서 보면 단순하고 다 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곡절을 지나고 그 끝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안정을 구축한다. 그러나 구축된 안정은 일견 평화롭지만 사실은 포기된 것들과 끝없이 갈라지고 아팠던 것들이 응결된 것(소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금이 바로 생명 없는 일종의 생명이었다. 조물주 앞에서 우리와 소금이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와 소금은 다 자라나고 쇠락하는 일종의 변화일 따름이다.”라는 화자의 깨달음은 소금을 금방 인간과 동격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금이 호수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수분을 다 증발시키는 과정을 거쳐 단단하고 짠 결정체가 되는 것이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고통 속에서 단련되어 진정한 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책물고기

 

카프카의 <변신>이 얼마나 보편적인 명작이며 문학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카프카는 정말 천재적인 작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운이 참 좋은 작가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이 벌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책벌레가 사람에게 잠시 기생한 이야기이다.

책벌레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책벌레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벌레는 특이하게도 책벌레 정도 되는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따라 메아리를 낸다. 이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런 메아리를 내는 인간이 왜 두렵고 공포스러울까?

나로선 책을 읽는 것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책의 흉내나 내고 그 저자(작가)가 말하는 것을 따라 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일종의 질병에 걸린 것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학습한 것을 자신의 생각인 양 표현할 때가 많다. 독서의 효과라는 게 한편으로는 순기능도 있지만 자신의 사고나 사유가 사라지고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역기능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 필요치 않아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내가 한의원에 가자고 하니까 대형 매체마다 허구한 날 한의학이 가짜 과학인지 아닌지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라며 한의원의 정체가 의심스럽다고 여긴다. 이 주인공의 의심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보다 대형 매체라는 나팔수 같은 정보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심이다. 더구나 지성있는 책벌레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주인공은(작가) 이 시대의 문자에 대한 의미를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문자가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지나치게 긴 역사가 문자의 신비성을 크게 저하시키고 너무 많은 문자의 의미가 우리 삶의 의미를 은폐했다.”고 밝힌다. 너무 많은 문자의 의미가 명확하고 정직한 삶보다 왜곡되고 불투명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내게 가장 좋았고 혼자 명문으로 고른 문장은 전설은 삼인칭으로 쓰이지만 진정한 현실은 단지 일인칭에만 속하기 때문이다.”였다. 그래서 책물고기를 만난 내용을 말해봐야 전설일 뿐이고 믿지 않을 테니 그는 마지막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현실이다.”라고.

 

 

 

아버지의 복수

 

이 작품은 어찌보면 단순한 주제와 소재를 세 가지 분명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화자는 자신이 어디 사람인가에 대해 애매한 위치에 처해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때마다 생각난다고 한다.

그리고 글은 곧장 아버지의 이야기로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논리적으로는 모순인 출신에 대한 집착 이상의 의지를 갖고 있다. 곧 그는 북방인인데 일찍 광저우로 이주해 광저우 사람이 되기 위해 혼신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아주 오랜 인류 역사가 이 아버지를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어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딪혀 쫓겨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그 공간의 주인인 것을 당연시한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고향이, 주변환경이 계층과 계급이 돼 자신을 옭아맬 때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려하고 타지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환경, 출신)을 되도록 숨기려 한다. ‘터를 잡는다든가 텃세가 심하다는 말은 동물들에게도 중요한 삶의 기본이 되는데, 인간도 터를 잡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기본이다.

아버지는 가 어렸을 때 외판원을 하며 광저우의 도시를 헤매다녔다. 그는 이 도시의 한 직업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베이라오라는 경멸적 대우를 받으며 그곳에서 내몰렸다. 그는 아직 광저우의 주민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삶은 불안하다.

그 뒤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가 되는데 이때 광저우 말을 많이 습득한다. 서로 주고받는 말 때문에 말이 많이 늘었다고. 아버지는 이렇게 광저우인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아내와 아들은 그의 외로움을 안다. 집안에서는 표준어를 쓰면서 간혹 광저우 단어를 섞어 쓰기 때문이다. 이점은 아이러니이고 슬픈 운명을 지닌 한 초라한 인간을 잘 설명한다.

가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이 될 때, 아버지는 내가 광저우에서 자리를 잡고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간신히 뿌리를 내린 그곳에서 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함은 그가 얼마나 광저우인이 되기 힘들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에 눈물겹고 한스럽다.

그리고 작가는 이 아버지의 눈물겨운 고투를, 장엄한 마지막을 엄청난 필력으로 그려낸다.

철거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조그만 의자 하나를 문 뒤에 놓고 거기 앉아서 거대한 기업과 맞선 한 노인의 영웅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언제 배웠는지 붓글씨로 짧은 시를 지어 플래카드를 만들어 지붕 위에 거는 것이다. “광저우의 산천에 뼈를 묻고, 광둥의 비 오는 밤에 홀로 목숨을 잃으리

나는 가장 좋은 작품이란 감동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와 감동이 소설의 정수라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사변적이며 기술적이고 미학적이면서 재미없는 작품들과 비교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걸림돌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인데 역사의 참혹함과 크기에 반해 허구적 상황은 단순한 대화로 대테일을 만들어냈다. 감당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후손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발설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노력과 본능을 펼쳐내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산 유대인 할머니 가계와 젊은 중국인 남자의 외가외 친가의 가문의 역사. 이 두 사람이 기차에서 우연히 한 자리에 앉아 내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 단편에서도 중국 청년 샤오콴이 유대인 할머니 쑤뤈산을 만난 동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소금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다'에서도 사오딩을 만난 건 주인공이 그걸 원했거나 기획한 게 아니었고, 책물고기의 주인공이 책벌레를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인생에서 만남은 사실 거의 우연이다. 부모를 택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만난 것 정도(이것도 사실은 우연)만 빼면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과 환경과 역사가 이 벌레만한 인간들을 엄청난 비극의 한가운데로 몰아넣기도 하고 살려주기도 한다.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유대인 할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익혔고 중국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독일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쉽게 배우게 됐으며 자신의 민족어인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되었다.

한데 그 할머니가 말한다. "더 안정적인 세계를 찾고 있을 뿐"이라고, "언어에도 바닥이 있고 거기에 역사의 기억이 침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그것이 바로 언어의 초안정적인 면이고 나는 거기에 내 영혼을 맡겼지."라고 한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고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특히 '초안정적인 면"이라는 말.

내딴의 이해로는 역사라는 물리적인 사실은 시간성이기 때문에 사라지고 그걸 남기는 건 결국 언어밖에 없으며 언어는 그래서 역사의 기억이 침전된 것이다.... 정도 .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 다 작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한데 샤오콴은 자신의 이야기를 뛰어넘을 수 없어, 남의 이야기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편집자가 되었고 쑤 할머니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지만 고난에 찬 글을 쓰려면 내내 마음에 상처를 입어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과연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하지 못했다. 그녀는 "벌써 오래전에 이해를 바라지도, 이해를 바랄 것도 없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상처는 안에서만 곪고 썩어 문드러져 외로웠던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외롭다. 이는 이 두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 안에 하고 싶은 말, 슬픔의 역사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기가 힘들어서가 아닐까. 외롭다는 말만큼 보편적이고 지당한 말은 없을 것이다. 

둘은 자신들이 억눌려 있던 역사의 뒤안에서 고통받았던 조부모의 이야기를 끝내고 종착지에 도착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한 두사람. 

걸림돌이 자신에게부터 걸림돌이 되어야한다는 샤오콴의 말은 역사를 잊어서도, 그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소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읽혔다. 


그동안 많은 단편을 읽었지만 왕웨이롄의 작품은 정말 한 수 위였다. 뛰어난 서사와 그걸 풀어서 사유하는 작가의 지혜가 놀라웠고 믿음직스러웠다. 이 작가는 젊은데도 늙은 사람 못잖은 여유와 혜안이 있고 그러다보니 작가의 나이를 모른다면 도무지 나이대를 짐작할 수 없는 현묘한 사람이다. 그리고 엄청난 책벌레일 것이다.

맨 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한 번만 읽어서 뭐라고 소회를 할 게 못되어 생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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