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물고기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왕웨이롄의 단편집
차례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책물고기
아버지의 복수
걸림돌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소금호수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인 나와 샤링의 삶은 정지된 것처럼 숨막히다. 그들은 소금호수의 황량한 풍경과 매일 같은 일상의 권태에 덜미를 잡힌 상태. 샤링은 유산을 했고 그 후 그녀는 소금호수에 대해 ‘니미’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둘의 관계에는 ‘니미’라고 할 만큼 적대적인 감정이 타오르고 있다.
더구나 한 달 전 같이 일하던 자오 형이 호수에 빠져 죽었는데 나는 내가 그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오 형과 폭음을 매일 일삼았었다. 나는 내가 자오 형을 죽이고 싶을 만큼, 아니 누구라도 죽이고 싶을, 그런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는 공포에 휘둘린다.
마침 그럴 때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샤오딩이 연인 진징과 함께 나를 방문한다.
샤오딩은 고향에서 탄광촌에서 일하던 당시 어둠 때문에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면서 밝은 빛 속에서는 그리지 못해 커튼을 쳐야만 한다고. 샤오딩의 탄광촌이 지금 나와 샤링의 소금호수와 똑같은 곳이 아닐까. 남들에게는 어휴, 어떻게 그런 데서 일을 했어?(탄광), 또는 와, 진짜 멋진 곳인데?(소금호수) 정도로 인식되겠지만 지독한 조건 하의 일상이란 사람의 영혼을 찢어버리고 황폐화한다. 삶이란 그토록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채워져있다.
한편 샤오딩의 연인인 진징은 계속 나의 관심을 끄는데, 일단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소금호수의 단순하고 황량한 풍경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여자는 나의 정신을 앗아간다. 정말 진징은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혹시 삶의 핍진함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실제보다 과장되게 도드라져 보인 건 아닐까.
그런데 진징은 샤오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누군가를 죽인 후 떠돌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넘실대던 물결이 잔잔해지면서 삶은 그렇게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샤링이 아기를 낳으러 떠나고 아들을 순산한 뒤 그녀는 내게 새 일자리를 찾아봐준다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 한다. 나는 아무도 이곳에 찾아온 적이 없는 것 같고 꿈이었던 것만 같다. 내겐 끝없이 자라는 소금만이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소음이 있는 낮인데도 나는 소금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작품은 일단 회화적인 글이다. 작가가 묘사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읽으면서 소금호수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소재 자체가 주제를 불러오고 이미지를 불러온다. 소재가 인물들의 평범하지 않은 심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나와 샤링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의 관계를 대변한다. 가장 절망하고 괴로운 이유는 관계 때문이다. 처음에는 설레고 행복했던 상대의 장점들조차 시간이 흐르면 견딜 수 없는 단점이 돼버린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누구라도 배신과 상실을 겪을 수 있다는 위태로움을, 원초적 고독을 말해준다.
진징은 어째서 사람을 죽이고 떠돌고 있을까. 샤오딩은 왜 그녀의 진실조차 모르는 것일까. 이것은 함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이별은 예정된 것이 되리라.
인간의 삶은 멀리서 보면 단순하고 다 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곡절을 지나고 그 끝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안정을 구축한다. 그러나 구축된 안정은 일견 평화롭지만 사실은 포기된 것들과 끝없이 갈라지고 아팠던 것들이 응결된 것(소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금이 바로 생명 없는 일종의 생명이었다. 조물주 앞에서 우리와 소금이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와 소금은 다 자라나고 쇠락하는 일종의 변화일 따름이다.”라는 화자의 깨달음은 소금을 금방 인간과 동격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금이 호수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수분을 다 증발시키는 과정을 거쳐 단단하고 짠 결정체가 되는 것이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고통 속에서 단련되어 진정한 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책물고기
카프카의 <변신>이 얼마나 보편적인 명작이며 문학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카프카는 정말 천재적인 작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운이 참 좋은 작가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이 벌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책벌레가 사람에게 잠시 기생한 이야기이다.
책벌레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책벌레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벌레는 특이하게도 책벌레 정도 되는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따라 메아리를 낸다. 이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런 메아리를 내는 인간이 왜 두렵고 공포스러울까?
나로선 책을 읽는 것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책의 흉내나 내고 그 저자(작가)가 말하는 것을 따라 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일종의 질병에 걸린 것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학습한 것을 자신의 생각인 양 표현할 때가 많다. 독서의 효과라는 게 한편으로는 순기능도 있지만 자신의 사고나 사유가 사라지고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역기능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 필요치 않아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내가 한의원에 가자고 하니까 ‘대형 매체마다 허구한 날 한의학이 가짜 과학인지 아닌지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라며 한의원의 정체가 의심스럽다고 여긴다. 이 주인공의 의심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보다 대형 매체라는 나팔수 같은 정보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심이다. 더구나 지성있는 책벌레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주인공은(작가) 이 시대의 문자에 대한 의미를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문자가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지나치게 긴 역사가 문자의 신비성을 크게 저하시키고 너무 많은 문자의 의미가 우리 삶의 의미를 은폐했다.”고 밝힌다. 너무 많은 문자의 의미가 명확하고 정직한 삶보다 왜곡되고 불투명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내게 가장 좋았고 혼자 명문으로 고른 문장은 “전설은 삼인칭으로 쓰이지만 진정한 현실은 단지 일인칭에만 속하기 때문이다.”였다. 그래서 책물고기를 만난 내용을 말해봐야 전설일 뿐이고 믿지 않을 테니 그는 마지막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현실이다.”라고.
아버지의 복수
이 작품은 어찌보면 단순한 주제와 소재를 세 가지 분명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화자는 자신이 어디 사람인가에 대해 애매한 위치에 처해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때마다 생각난다고 한다.
그리고 글은 곧장 아버지의 이야기로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논리적으로는 모순인 ‘출신’에 대한 집착 이상의 의지를 갖고 있다. 곧 그는 북방인인데 일찍 광저우로 이주해 광저우 사람이 되기 위해 혼신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아주 오랜 인류 역사가 이 아버지를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어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딪혀 쫓겨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그 공간의 주인인 것을 당연시한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고향이, 주변환경이 계층과 계급이 돼 자신을 옭아맬 때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려하고 타지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환경, 출신)을 되도록 숨기려 한다. ‘터를 잡는다’든가 ‘텃세가 심하다’는 말은 동물들에게도 중요한 삶의 기본이 되는데, 인간도 터를 잡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기본이다.
아버지는 ‘나’가 어렸을 때 외판원을 하며 광저우의 도시를 헤매다녔다. 그는 이 도시의 한 직업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베이라오’라는 경멸적 대우를 받으며 그곳에서 내몰렸다. 그는 아직 광저우의 주민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삶은 불안하다.
그 뒤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가 되는데 이때 광저우 말을 많이 습득한다. 서로 주고받는 말 때문에 말이 많이 늘었다고. 아버지는 이렇게 광저우인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아내와 아들은 그의 외로움을 안다. 집안에서는 표준어를 쓰면서 간혹 광저우 단어를 섞어 쓰기 때문이다. 이점은 아이러니이고 슬픈 운명을 지닌 한 초라한 인간을 잘 설명한다.
‘나’가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이 될 때, 아버지는 내가 광저우에서 자리를 잡고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간신히 뿌리를 내린 그곳에서 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함은 그가 얼마나 광저우인이 되기 힘들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에 눈물겹고 한스럽다.
그리고 작가는 이 아버지의 눈물겨운 고투를, 장엄한 마지막을 엄청난 필력으로 그려낸다.
철거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조그만 의자 하나를 문 뒤에 놓고 거기 앉아서 거대한 기업과 맞선 한 노인의 영웅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언제 배웠는지 붓글씨로 짧은 시를 지어 플래카드를 만들어 지붕 위에 거는 것이다. “광저우의 산천에 뼈를 묻고, 광둥의 비 오는 밤에 홀로 목숨을 잃으리”
나는 가장 좋은 작품이란 감동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와 감동이 소설의 정수라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사변적이며 기술적이고 미학적이면서 재미없는 작품들과 비교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걸림돌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인데 역사의 참혹함과 크기에 반해 허구적 상황은 단순한 대화로 대테일을 만들어냈다. 감당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후손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발설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노력과 본능을 펼쳐내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산 유대인 할머니 가계와 젊은 중국인 남자의 외가외 친가의 가문의 역사. 이 두 사람이 기차에서 우연히 한 자리에 앉아 내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 단편에서도 중국 청년 샤오콴이 유대인 할머니 쑤뤈산을 만난 동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소금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다'에서도 사오딩을 만난 건 주인공이 그걸 원했거나 기획한 게 아니었고, 책물고기의 주인공이 책벌레를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인생에서 만남은 사실 거의 우연이다. 부모를 택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만난 것 정도(이것도 사실은 우연)만 빼면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과 환경과 역사가 이 벌레만한 인간들을 엄청난 비극의 한가운데로 몰아넣기도 하고 살려주기도 한다.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유대인 할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익혔고 중국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독일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쉽게 배우게 됐으며 자신의 민족어인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되었다.
한데 그 할머니가 말한다. "더 안정적인 세계를 찾고 있을 뿐"이라고, "언어에도 바닥이 있고 거기에 역사의 기억이 침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그것이 바로 언어의 초안정적인 면이고 나는 거기에 내 영혼을 맡겼지."라고 한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고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특히 '초안정적인 면"이라는 말.
내딴의 이해로는 역사라는 물리적인 사실은 시간성이기 때문에 사라지고 그걸 남기는 건 결국 언어밖에 없으며 언어는 그래서 역사의 기억이 침전된 것이다.... 정도 .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 다 작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한데 샤오콴은 자신의 이야기를 뛰어넘을 수 없어, 남의 이야기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편집자가 되었고 쑤 할머니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지만 고난에 찬 글을 쓰려면 내내 마음에 상처를 입어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과연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하지 못했다. 그녀는 "벌써 오래전에 이해를 바라지도, 이해를 바랄 것도 없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상처는 안에서만 곪고 썩어 문드러져 외로웠던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외롭다. 이는 이 두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 안에 하고 싶은 말, 슬픔의 역사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기가 힘들어서가 아닐까. 외롭다는 말만큼 보편적이고 지당한 말은 없을 것이다.
둘은 자신들이 억눌려 있던 역사의 뒤안에서 고통받았던 조부모의 이야기를 끝내고 종착지에 도착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한 두사람.
걸림돌이 자신에게부터 걸림돌이 되어야한다는 샤오콴의 말은 역사를 잊어서도, 그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소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읽혔다.
그동안 많은 단편을 읽었지만 왕웨이롄의 작품은 정말 한 수 위였다. 뛰어난 서사와 그걸 풀어서 사유하는 작가의 지혜가 놀라웠고 믿음직스러웠다. 이 작가는 젊은데도 늙은 사람 못잖은 여유와 혜안이 있고 그러다보니 작가의 나이를 모른다면 도무지 나이대를 짐작할 수 없는 현묘한 사람이다. 그리고 엄청난 책벌레일 것이다.
맨 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한 번만 읽어서 뭐라고 소회를 할 게 못되어 생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