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기다리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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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작가의 [햇빛 기다리기]를 읽었다. "남아 있는 마음", "사랑의 미래", "겨울의 끝", "우리 시대의 사랑", "결혼식 가는 길", "햇빛 기다리기", "이 세상의 것"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또 다른 퀴어 문학의 선두 주자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소수자의 사랑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세밀한 감정묘사가 독보적이었다. 7개의 단편이지만 화자는 모두 '나'로 설정되었고 비슷한 연배의 젊은 남자가 연인을 만나 헤어지고 만남을 이어가는 내용이어서 마치 동일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이 꾸며낸 허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 그리고 경험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상당부분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낯선 일들조차도 작가의 담담한 고백을 통해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아 나라면 이때 어떻게 행동했을까'란 반응을 자아내는 것은 허구의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수자라는 말에 담긴 약함을 생각한다. 아니 어떤 영역에서는 소수자들이 고유한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태생부터 그런 소수의 행운을 누리는 이들도 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소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도 있다.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소수의 자리는 누구나 선망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금수저니 흙수저라는 수저론까지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랑의 영역에서 소수의 선택은 너무나도 지탄받기 쉽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보편성을 벗어난 소수의 선택은 일상성을 위협하는 도전처럼 다가온다. 그들의 선택이 나와 무관하더라도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거나 이상한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본다거나 아님 그냥 꼴배기가 싫어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많다. 제도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싫거나 거부하거나 외면하거나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심도있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인간의 역사 안에서 성소수자가 지속되어 온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와 권력을 지니지 않은 약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동성 연인과의 사랑을 지속하지만 때로는 용기있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애써 감추며 수치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회의 배타적인 시선과 가족들의 완강한 거부를 당당하게 지속적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숨기며 아닌척 몰래 비밀리에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평범한 연인들처럼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올리기까지 수만번의 번뇌의 시간을 보낸 흔적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한 사진 한 장 올리지 못한단 말인가의 고민에 지친 주인공은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말한다.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좋아요'라는 하트 하나 뿐이라고. SNS를 통해서 자신의 일상을 정성들여 드러낸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아주 유명한 셀럽 외에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친들의 '좋아요' 또는 짧은 댓글을 통해 소소한 만족감을 얻는다. 


또 다른 단편의 주인공 '나'는 동성연인과의 만남을 가족에게도 공개했지만, 그 연인이 HIV 감염자임을 차마 말하지 못한다. 의학적 관심이 없는 이들조차도 대부분 에이즈라는 병명에 대한 뜨악한 반응을 알고 있기에 동성관계를 넘어서는 연인의 병력은 주인공의 사랑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행여나 그 주변을 지나치는 이들이 경계와 긴장의 눈빛을 내비치는 것을 보며 '나'의 동성연인은 HIV 감염자를 바라볼 때 같다며 서글픈 말을 내뱉는다. 감염 통보를 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연인이 오톨도톨한 손목의 흔적을 매만지며 주인공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갑작스런 폭우에 바닷길을 걷지 못해도 이 사람을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아니 그것은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고, 그냥 지금의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겠다는 다짐을 마주잡은 손의 온기로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성소수자의 일상은 이와 같이 촘촘하게 규율되고 수치심은 신체에 깊숙이 새겨진다. '수치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치심이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상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수치심은 '소속감'과 연결되어 있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 또는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았다'거나 거절당했다는 기분과 관련되며,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결함이 있고 불결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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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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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경청]을 읽었다. 주인공 임해수 상담가는 센터에서 일하며 TV프로그램에도 나오는 유명한 박사님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방송에서 어떤 배우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내뱉은 두달 후에 그 배우가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여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누리꾼들은 주인공이 그 배우를 죽였다고 선동하며 악플을 단다. 설상가상으로 센터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는 악의적인 증언을 하고 남편 태주와도 이별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해수는 가장 친한 친구 주연의 위로와 조언을 마다하다가 결국 주연과도 소원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해수는 그 배우의 죽음 이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지내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황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해수는 매일 매일 변호사에게, 센터 소장에게, 친구 주연에게, 배우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행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웃을 만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길을 나서다 길고양이 순무와 까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길고양이를 지켜보던 가운데 초등학생 황세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임해수가 어떤 말을 방송에서 했기에 배우를 자살에 이르기까지 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후 주인공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이미 얼굴까지 알려졌기에 그녀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까지 이르고 길고양이 순무를 매개로 가까워진 초등학생 세이와의 만남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다. 특별한 반전이나 놀란만한 전개도 없이 그저 한 계절을 지나는 동안에 해수와 길고양이 순무는 동일시되며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수술의 힘이 아니라 그저 단지 그들의 삶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봐주는 경청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이다.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막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 또한 힘들어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담되고 불편하면서도 막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산다. 언젠가 어떤 연예인이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진행자들은 그 연예인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웃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기PR의 시대가 도래한지 한참되었고 이제는 관종이라는 말까지 생겨나서 대놓고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개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고 쉬는 것까지 힙하고 센스넘치고 스웩이 담긴 컷을 만들기 위해서 작위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편적인 한컷을 만든다고 해서 실제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님에도, 때로는 아무런 수익이 생기지 않음에도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결국은 제발 나좀 바라봐 달라는 구애의 손짓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컷과 뭔과 기괴하고 유별난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단 1초 이상도 관심을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고양이 순무의 앞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몰골이 점첨 흉측해져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차라리 안쓰러운 표정이라도 한 번 지으면 나을텐데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흔히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승은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할 뿐 인간처럼 의도적인 흉악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짐승의 행동은 생존을 위한 자연적인 순리의 하나일 뿐이다. 당연히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의 삶과 견주게 되었을 때는 저급한 단계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짐승의 본능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수의 말실수와 길고양이 순무의 경계심은 어떻게 견줄 수 있을까? 


해수의 무력한 나날 속에 등장한 초등학생 세이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피구 연습을 하며 폭언과 폭력에 매번 상처를 받으면서도 세이는 해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리어 학교에서 피구 연습을 하는 세이를 보러온 해수에게 학교에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상담가로서의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때문인지 해수는 세이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순무의 구조를 위해서 세이와 함께 할 뿐이다. 피구 대회가 열리는 날 해수는 세이의 경기를 보기 위해 학교에 가고 그곳에서 세이를 괴롭히는 아이의 엄마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피구 경기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세이는 그동안의 울분을 토로하듯이 괴롭히던 아이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해수는 개입하지 않는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순무가 체력을 되찾고 수술을 받아 세이의 품에 다시 안기도록 해수는 묵묵히 세이의 고백을 기다려준다. 그리고 해수는 세이와 함께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상담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첫 내담자로 세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와 직업과 상황 그리고 심지어 종이 다른 인간과 동물을 떠나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끝이 없는 기다림의 관심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기나긴 기다림의 완성은 과거의 멀쩡한 시간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사건이 있기 전과 그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임을 해수와 세이 그리고 순무를 통해 알려준다. 


"이런 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벽 없는 소통.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꾸밈이 없는 말,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걸치지 않은 말. 의도도, 저의도, 악의도 없는 말.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말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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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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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리 작가의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읽었다. 부제는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이다. 갓생, 배민맛, 방꾸미기, 랜선 사수, 중고 거래, 안읽씹, 사주 풀이, 데이트 앱, #좋아요, 이렇게 9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인이 중독된 주제들이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지금 시대의 가장 핫한 이슈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이슈라는 것이 뉴스메인을 도배하는 그럴듯한 화제가 아니라 그냥 한 개인인 나에게 있어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무엇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 중에 어느 것에 중독되어 있나 따져보니 아예 한 번도 안해본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개인적인 감상을 표출하거나 격력한 공감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요즘엔 “SNS를 하는 사람이 관종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별종(202)”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렇게 많은 중독 주제 중에 내게 해당되는 내용이 없다는 게 어쩌면 나도 별종이거나 이미 상 꼰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중에서 하나라도 하지 않는다면 술이나 커피나 담배 중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 사람이 귀엽거나 예쁘거나 잘생겼거나 말발이 좋거나 직업이 특이하다면 대단한 금욕주의자처럼 보인다. ‘아, 아깝다. 저 정도면 팔로워 5만 명에 좋아요 100개쯤은 금방 땡길 텐데.’(202-203)”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싸이월드 세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그때에 관종이 되고자 하는 열정을 다 써버린 것인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시시한 일상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싫어지는 것인지? 50대 중반 이후의 어머니들 사진첩에는 온통 꽃 사진만 잔뜩이라고 하던데, 사람보다 자연이 더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다가오는 깨달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뭔 자신감으로 그렇게 대놓고 셀카 사진도 올리고 그랬는지. 지금보면 쥐구멍이 들어가고 싶어지는 사진과 감성 오지게 터지는 글들을 보면 한 때 나도 이런 젊음을 드러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더불어 피싱 같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도 아직 2G폰을 쓰고 있던 터라 부모님이 스마트폰으로 변경한다는 얘기를 듣고 괜히 이상한 문자가 왔을 때 눌러서 사기 당하지 않게 그냥 구형 폰을 쓰는게 어떻겠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적이 있었다. 내딴에는 괜히 억울한 일을 당하실까 걱정되 한 말이었는데, 나의 대답이 얼마나 서운하셨는지 한동안 전화조차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행동과 말이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한 살이라도 더 젊으실 때 새로운 것들을 보여드리고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할 텐데, 어찌보면 노년의 삶에 대한 무미건조함이 내 생각의 일부이지 않았나 싶다. 나의 어리석었던 행동에 질타를 가하는 일들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일어난다. 노약자석에 앉으신 어르신들이 거의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뉴스 기사를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 손에 쥐었다 하면 쉽사리 놓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에도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시청이 가능하도록 방수기능까지 강화되었으니, 이제 스마트폰을 떠나는 시간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인터넷 뱅킹은 PC로 하는 것이 더 수월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은행들이 모바일 버전의 보안을 강화해서 그런지 앱을 구동하면 몇 번 클릭으로 손쉽게 이체가 가능해졌다. 사실 가장 최신형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도 자주 사용하는 앱은 몇개 되지 않는다. 안읽씹의 내용에 나오는 것처럼 전국민이 사용하는 깨톡의 경우 앱 상당에 빨간 숫자가 써 있으면 뭔가 맘이 편치가 않다. 광고든 단톡방이든 어서 빨리 대화방을 열어서 그 숫자를 없애고만 싶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 숫자를 없애는 강박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앱에도 아직 읽지 않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으면 마치 남겨진 숙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앱에 떠 있는 숫자는 내게 딴짓하지 말고 어서 빨리 숙제를 하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생긴 이상한 증상이다. 


“임원이나 고용주에게 대체 불가 노동자란 결국 프리미엄이 붙은 부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품으로서의 노동자는 마모(번아웃)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성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만, 임원과 고용주를 능가하는 순간 임원과 고용주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인간이 비인간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호감도도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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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총을 쏴라 -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김경순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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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작가의 [장미총을 쏴라]를 읽었다.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사 수상작이다. 우리나라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다른 나라 소식은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뉴스 보도 중에 마치 주기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비극적인 소식은 총기난사이다. 사상자가 많은 사건만 보도되서 그렇지 실제로 거의 매일 총기사고가 난다고 한다. 도대체 그런 살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된 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거의 대다수가 군복무 기간 중에 총기를 다뤄봤기 때문에 총이 가진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실탄이 지급되지 않는 평소에는 짐처럼 느껴지는 총기가 실사격시 얼마나 큰 긴장감을 조성하는지 모른다. 헐리우드 액션과 홍콩 르와르 영화처럼 자유자재로 총을 다루기는 쉽지 않다. 생각보다 반동이 꽤 커서 제대로 견착하지 않으면 과녁을 맞추기는 커녕 엄한 곳에 발사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마무시한 총을 사람을 향해 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제정신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주인공 한옥인은 언론고시에 도전한 삼수조차 떨어지자 울며겨자먹기로 ‘건’이라는 잡지사에 지원하게 된다. 건강의 건도 건축의 건도 아닌 건은 ‘GUN’을 뜻한다는 것을 면접을 통해 알게 된 옥인은 석달 동안의 인턴 기간을 진명유와 함께 보내게 된다. 옥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현은 재소자와의 면담을 통해 추리소설의 소재를 얻곤 했기에 옥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처럼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 두 명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옥인은 자신이 두 명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으로 자해를 시도하기도 하고 현에게 사건의 정황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기도 한다. 현이 전해주는 옥인의 이야기는 옥인이 취준생으로 간신히 입사한 비밀스러운 잡지회사 건에서 사장과 부장과 차장의 은밀한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총기 밀매의 중개자로 이용당하고 종국에는 길 고양이를 목표물로 한 건 배틀에서 장미총을 겨두다 실수로 과녘 가까이에 다가온 사장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발사고가 났으며 그로 인해 차장이 옥인을 밀매한 신형 K2로 겨누자 정당방위로 차장에게 총을 발사하 것으로 이해한다. 


국선변호사 또한 옥인의 억울한 사정에 동감하며 백방으로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건 배틀 현장에 있었던 부장과 진명유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단독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한 건 잡지사도 하루아침에 개인 소유로 변경되었고, 특히나 건 잡지사 시절 지하창고에 도서관처럼 진열되어 있던 많은 자료들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옥인이 사장과 차장을 죽인 장미총이 발견되지 않아 옥인은 1심에서 20년 형을 언도 받는다. 현은 옥인이 고의로 사장과 차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국선변호사에게 옥인이 건 잡지사를 다녔던 흔적과 건 배틀이 열리기까지의 정황들을 보낸다. 재심에서 옥인은 정황증거가 채택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고 현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며 외국으로 떠난다. 


현은 옳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옥인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다가 수년 전에 사용된 건 잡지사 영수증에 쓰인 필체와 옥인의 노트에 쓰인 필체가 같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현이 옥인의 필체를 확인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가 다리를 절다가 갑자기 똑바로 걷는 것과 '식스센스'의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유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견줄만큼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반전을 보여준다. 책의 띠지에 "우리 소설사는 강력한 반전(反戰) 소설과 정교한 반전(反轉)소설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라고 씌어 있는데, 옥인이 복수를 행하고도 무사히 풀려나기 위한 반전의 시나리오를 갖고 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속였다는 것과 우리나라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총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강력한 무기 소유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적절히 융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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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22학번
구본무(구하비)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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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비 님의 [하버드 22학번]을 읽었다. 지금은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 또한 합법적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과외를 비롯한 사교육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성적을 더 올리고 싶었던 있는 집 자식들은 몰래 과외를 받다가 걸려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드러내며 과외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부모도 자녀들도 시간과 돈을 허비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모두가 학원을 가지 않는다면, 아니 입시를 위한 학원만 사라진다면 요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흙장난을 하게 될까? 학원은 물론 요즘은 결석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전에는 마치 헬스클럽에서 할인되는 몇 개월짜리 정기권을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한 번 갈까말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부모 돈이 썩어나가는지도 모르고 학원 정기권을 끊어놓고 자유의 시간을 만끽한 이들이 꽤 많았고 그러다보니 학원 주위에는 공부를 하러 오는 애들 만큼이나 놀러오는 애들도 많았다. 학원비에 학원에서 요구하는 학습지에 저녁을 사먹고 중간에 간식도 먹어야 하니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도 꽤나 큰 지출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과거에 다행이었던 것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학교 정규과정만 밟아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해온 것을 학교 선생님들도 알고 있기도 하고 학교 공부만으로는 성적을 올리리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학벌지상주의의 만연과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아주 옛말이 되어버린 재물과 계급의 세습화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을 구분할 정도로 팽배해졌다. 마치 경력직만을 요구하는 구인광고를 보고 초짜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면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뒷배가 없다면 출세를 하고 가세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희망이 사라진 세대에게 성실함과 정직함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어떻게든 불법에 해당되지 않는 방법으로라도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란 노랫말이 담긴 유행가가 인기를 누릴 때 군생활을 했던 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 이들에게 자신들이 보낸 기간의 반밖에 안되는 기간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는 환경을 비교하며 ‘뭐가 힘드냐고’ 따지듯이 묻곤 한다. 이건 꼭 꼰대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누구나 그런 얄팍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지금의 세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과거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월급을 아무리 많아 받아도 군복무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도 생면부지의 남과 함께 의무적으로 보내는 기간은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를 살던 분들은 지금처럼 배부른 시대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나태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1차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부르다고 행복하지 않는다. 집에서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가까운 친구가 SNS에 올린 인싸들이 다니는 카페에 가지 못해서 신경질이 난다. 또 신상백을 들고 해외의 멋진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나만 불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금의 세대에게 이런 것들을 완전히 외면하고 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향을 받고 싶지 않지만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관종과 자기과시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류에 들지 못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핵심적인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 좋겠고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마치 적선하듯이 하나씩 알려줄 때 남모를 쾌감을 느낀다. 당연히 정보를 먼저 캐치하는 자는 권력자의 근방에 머물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음을 으스대며 자신에게 줄 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계급사회에서 역시나 정직함과 성실함은 무기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약은 청지기처럼 제 때에 줄 것을 주고 속일 만큼 속이며 제 것을 챙기면 오히려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로 인해 우직하게 한 길만 걷는 이가 외면 당할 때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일지만 되돌릴 길은 전무하다. 그냥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혐오했던 모습을 뒤따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소설 속의 구하비가 자퇴서를 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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