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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22학번
구하비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9월
평점 :
구하비 님의 [하버드 22학번]을 읽었다. 지금은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 또한 합법적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과외를 비롯한 사교육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성적을 더 올리고 싶었던 있는 집 자식들은 몰래 과외를 받다가 걸려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드러내며 과외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부모도 자녀들도 시간과 돈을 허비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모두가 학원을 가지 않는다면, 아니 입시를 위한 학원만 사라진다면 요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흙장난을 하게 될까? 학원은 물론 요즘은 결석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전에는 마치 헬스클럽에서 할인되는 몇 개월짜리 정기권을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한 번 갈까말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부모 돈이 썩어나가는지도 모르고 학원 정기권을 끊어놓고 자유의 시간을 만끽한 이들이 꽤 많았고 그러다보니 학원 주위에는 공부를 하러 오는 애들 만큼이나 놀러오는 애들도 많았다. 학원비에 학원에서 요구하는 학습지에 저녁을 사먹고 중간에 간식도 먹어야 하니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도 꽤나 큰 지출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과거에 다행이었던 것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학교 정규과정만 밟아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해온 것을 학교 선생님들도 알고 있기도 하고 학교 공부만으로는 성적을 올리리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학벌지상주의의 만연과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아주 옛말이 되어버린 재물과 계급의 세습화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을 구분할 정도로 팽배해졌다. 마치 경력직만을 요구하는 구인광고를 보고 초짜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면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뒷배가 없다면 출세를 하고 가세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희망이 사라진 세대에게 성실함과 정직함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어떻게든 불법에 해당되지 않는 방법으로라도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란 노랫말이 담긴 유행가가 인기를 누릴 때 군생활을 했던 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 이들에게 자신들이 보낸 기간의 반밖에 안되는 기간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는 환경을 비교하며 ‘뭐가 힘드냐고’ 따지듯이 묻곤 한다. 이건 꼭 꼰대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누구나 그런 얄팍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지금의 세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과거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월급을 아무리 많아 받아도 군복무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도 생면부지의 남과 함께 의무적으로 보내는 기간은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를 살던 분들은 지금처럼 배부른 시대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나태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1차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부르다고 행복하지 않는다. 집에서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가까운 친구가 SNS에 올린 인싸들이 다니는 카페에 가지 못해서 신경질이 난다. 또 신상백을 들고 해외의 멋진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나만 불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금의 세대에게 이런 것들을 완전히 외면하고 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향을 받고 싶지 않지만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관종과 자기과시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류에 들지 못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핵심적인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 좋겠고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마치 적선하듯이 하나씩 알려줄 때 남모를 쾌감을 느낀다. 당연히 정보를 먼저 캐치하는 자는 권력자의 근방에 머물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음을 으스대며 자신에게 줄 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계급사회에서 역시나 정직함과 성실함은 무기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약은 청지기처럼 제 때에 줄 것을 주고 속일 만큼 속이며 제 것을 챙기면 오히려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로 인해 우직하게 한 길만 걷는 이가 외면 당할 때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일지만 되돌릴 길은 전무하다. 그냥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혐오했던 모습을 뒤따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소설 속의 구하비가 자퇴서를 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