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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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영원한 천국]을 읽었다. 욕망 3부작 중에 두 번째 작품으로 인터뷰를 보니 성취적 욕망에 대한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전작들이 주로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사건을 담은 스릴러가 많았다면 이번 작품에는 로맨스와 가상 세계에 대한 판타지도 접목되어 있어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깊이 있게 깔려 있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변화를 지켜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이를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저자의 응원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어떤 종교적 요소가 가미된 판결에 귀결점을 둔 것이 아닐까 예상했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과학의 발달로 언젠가는 영생을 꿈꾸는 인간이 육체적 소멸을 앞두고 스스로 데이타화 되기를 선택하여 완벽한 홀로그램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곳을 제목으로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영원한 천국의 이름은 롤라 라는 가상 세계이고 소설 속에서는 아직 완전하게 구현되지 않은 일종의 베타버전을 실행하고 있는 상태로 나온다. 롤라를 구상한 이들은 인간과 가장 유사한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의 생체실험을 마쳤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착수하여 실험대상자들을 고르기 시작한다. 


"롤라에 보낸다는 건 정보 형태로 네트워크에 업로드시킨다는 얘기야. 몸을 뺀 나머지, 그러니까 한 개체의 고유한 의식, 무의식, 본성, 반사작용, 감각이나 신경 회로 같은 것들 모두(319)"


데이타화된 인간의 고유한 요소들이 롤라에 보내지고 난 다음에 동일한 본성의 주인인 육체가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기에 롤라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대상으로 노숙자들을 선택했고 무작위로 그들에게 롤라에 업로드 될 수 있는 앱이 구동되는 유심칩을 무상으로 나눠주게 된다. 한국에는 5명에게 유심칩이 주어졌고 롤라에 가고자 유심을 강탈하려는 이들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랑이 언니가 경주에게 "자기야, 삶이 소중한 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야.(491)"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매순간 나의 몸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지는 않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고자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불로장생을 막연히 꿈꿔왔다 하더라도 롤라에 입성하여 드림시어터의 설계대로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다고 해도 끝이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을 선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해상이 어머니와 동일한 루게릭병에 걸려 몸이 굳어가기 전에 마지막 소원처럼 탐방했던 바하리아 사막에서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사막여우를 첫눈에 반한 제이와 함께 보았다면, 롤라행을 간절히 바라게 되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작은 경주와 해상이 롤라에서 만나 경주가 원하는 드림시어터의 구상이 무엇인지 전해주는 내용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경주가 해상에게 해줄 이야기가 제이와 해상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경주와 제이의 삼애원에서의 비극적 사건으로까지 치닫을 것이라고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다. 마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액자식 구성처럼 경주와 해상이 서로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방식의 차이일뿐임에도 화자가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이렇게 서로 다른 화자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경주를 구원하고자 하는 해상의 기막힌 시나리오가 마지막 순간에 전혀 먹혀들지 않고 영원히 경주를 놓아버리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해상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게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임이 드러난다. 


주인공 경주는 유년시절 엄마와의 이별과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에 이어 수년 동안 병수발을 들던 착한 동생 승주가 폐인처럼 지내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막말을 내뱉고 그 말이 사실이 되어 승주가 탄 버스를 번번히 놓치는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사회성은 거의 제로이고 심지어 의료사고에 연류되어 직장까지 잃은 경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삼애원이라는 알콜릭 노숙자들의 재활원인 삼애원의 보안팀에 지원한다. 경주는 그곳에서 입사동기 제이를 만나게 되고 2교대라는 혹독한 근무상황 중에 삼애원의 이상기후를 목도한다. 여기에 소설의 암울함을 조금이마나 옅게 만드는 인물이 나오는데, 베토벤과 랑이 언니와 공달이다. 다른 입소자들과는 다르게 지내는 베토벤은 장미정원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주고 랑이 언니는 노래를 가르치며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공달은 베토벤을 아빠라 부르며 호위하는 홍금강앵무이다. 소설의 서두에 경주가 왜 해상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그의 곁에 공달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내용이 이어진다. 


주변인물에 불과할 것 같았던 베토벤은 삼애원의 설립자로 드러나고 베토벤이 삼애원에 소속된 이들 중 마지막 유심을 가진 이라는 것이 밝혀져 칼잡이와 그의 하수들의 공격을 받게 되며 극적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삼애원이 소설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배경으로 등장하기에 그곳에서 경주와 제이가 칼잡이를 비롯한 유심칩을 노리는 이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마치 영화처럼 긴장감을 드높인다. 삼애원의 풍경이 묘사될 때마다, 경주의 심란한 마음이 그려질 때마다 삼애원 앞의 바다에서 유빙이 부딪치며 나는 '쿵쿵' 반복된 소리는 경주의 불안함과 위기를 최고로 고조시킨다. 어찌보면 저자기 실제로 홋카이도와 이집트의 사막을 취재하여 소설 속에 그려낸 삼애원과 바하리아 사막은 유빙이 쉴세 없이 부딪히는 망망대해와 풀 한 포기 없는 모래사막이라는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척박한 환경을 대조적으로 그려내며, 해상은 사막에서 자신을 구원할 사랑을 만나게 되고 경주는 유빙이 쉴세 없이 밀려오는 절벽 끝에서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분투하며 동생 승주를 떠나보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게 된다. 


해상과 제이의 사막에서 시작된 로맨스는 해상이 루게릭병을 고백하고 제이의 예상치 못한 결정으로 몰입감을 주었지만, 해상에 경주를 구하기 위해 계획한 새로운 드림시어터의 삶인 경주와 지은의 러브스토리는 그동안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상큼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등장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납치와 복수와 접목되며 칼잡이는 끝까지 경주를 괴롭히는 악한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칼에 찔린 트라우마와 세 명의 죽음으로 인해 롤라의 부름을 기다리며 무력한 삶을 살던 경주가 윤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갇혀 있던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경주의 복수가 해상의 설계에 불과했고 경주를 극도의 공포와 불안으로 떨게 했던 칼잡이가 해상의 역할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이르지 못한 경주가 다시 롤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 해상이 자신의 설계가 실패가 아님을 경주가 정말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대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치못하게 마주하는 성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로 삶을 놔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519)"


"종종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 자체를 조롱하거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흐름이 읽히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요인도 분명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개별적 존재다.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는 내 삶의 실행자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기억해주시기를. 우리의 유전자에 태초의 야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 삶의 소중한 무기라는 것을.(저자의 말 중에서 523)" 


#정유정 #영원한천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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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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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었다.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이다. 지금쯤 동구는 중년의 트럭운전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박영은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을 꿈꾸지 않을까란 저자의 말이 남긴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칭송하고 부러워하며 소수의 그들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것 같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반드시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남들보다 운이 좋아서 거기에 개인적인 노력이 더해져 보통 사람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타인에게 빚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타고난 능력을 바탕으로 전문직종에서 탁월함을 보인다거나 특출난 사업수완을 발휘해 대성공을 거두는 이들을 보고 막연히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동구는 난독증이라는 언어 장애를 갖고 있다. 열심히 치료를 받고 노력한다면 분명 나아지겠지만 당소설의 배경인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도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능력결여로 비춰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구의 남다른 재능은 그의 심성에 있었기에 그와 아주 오랜 시간을 을 함께 보내며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보속 같은 마음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동구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신나게 뛰어놀기를 좋아하지만 동구가 사는 윗마을의 초입에 있는 3층 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유일한 어린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6살 터울의 여동생의 이름을 짓게 되는 순간부터 동생에 대한 엄청난 애정을 표현하는 동구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여동생에게 쏠리는 것에도 전혀 질투하지 않는 또 하나의 부모처럼 행동한다. 


소설속에서 그려지는 여동생에 대한 동구의 아낌없는 배려와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여동생 영주가 동구의 담임 선생님께 드릴 카스텔라를 망치기 위해서 반죽그릇에 석회가루를 뿌렸을 때에도 동구는 행여나 영주가 혼날까 싶어 그릇을 바지 위에 뒤엎는 너그러움을 보여준다. 엄마에게 직살나게 얻어터지면서도 절대로 영주가 그런거라고 핑계를 대지 않는 대인배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에 반해 동구와 영주의 할머니는 대체 사람의 심술보가 얼마나 더 악해질 수 있는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동구의 엄마가 안쓰러워서 차라리 갈라서는 것이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혹독했다. 일상다반사가 욕과 비속어를 썩어 동구의 엄마를 비난하기를 반복하는 시어머니와 매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아니었을까? 남편마저도 아내를 위로하고 어머니의 심술을 중재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무시하고 복종하기를 강요하다 폭력까지 휘두르는 상황에서 그냥 참고 사는 것이 통념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아니었다면 동구와 영주는 엄마의 보살핌을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동구는 아주 어린 나이이지만 엄마의 힘든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으며 할머니와 아버지의 잘못된 처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괴팍스러운 성격과 말 때문에 바람잘날 없는 동구의 일상에서 3학년 2학기에 새로운 박영은 선생님이 담임을 맡게 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국민학교에서 촌지를 준 부모의 아이에게 유독 관심과 편애를 일삼는 교사들이 비일비재했었다. 동구가 4학년이 되어 만난 오파리 같은 최악의 선생님은 학교마다 있었을 테지만 훈육이라는 미명하게 폭력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체벌을 가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시대였기에 무조건 참을 수 밖에 없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박영은 선생님처럼 존재감이 거의 제로였던 동구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의 마음 속에 있던 보석 같은 심성을 알아채어 동구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독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같은 만남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영은 선생님에 대한 동구의 존경과 사랑의 마음은 날이갈수록 커지고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해 매번 시험을 망치고 부모님에게 혼이나던 암흑기를 벗어나 그야말로 동구 가족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동구가 선생님 보낸 편지를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읽던 장면에서 너무나도 기뻐 감동한 엄마가 동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할머니 또한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박영은 선생님의 비극적인 실종과 여동생 영주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이어지며 자식 잡아먹은 년이라 막막을 퍼붓는 할머니의 폭언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엄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급박한 전개에 가슴이 턱턱 막혀와 동구네 가족이 견뎌야 하는 슬픔의 무게가 얼마나 클지 감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박영은 선생님을 그리고 여동생 영주를 떠나보내고 엄마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동구는 그들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순간을 다시 맞이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애절함은 비단 동구만의 아픔이 아닌 우리 모두가 돌아가고 싶은 인생의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언제였던가. 엄마와 영주가 학교로 찾아왔던 그날. 선생님은 칠판에 예쁜 글씨를 쓰셨고 지저귀는 어린 새 같은 영주는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그 글씨들을 읽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박수를 쳤고 엄마는 교실 문 앞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누르며 겸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행복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훗날 박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은혜만을 베풀고 자취 없이 떠나가실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그렇게 덧없이 어린 숨결을 거둘 줄도 몰랐고, 엄마가 광인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깊고 소중한 찰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게 모른 채 그저 신명 나게 손바닥이 부풀도록 박수만 치고 있었다. 지금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이 한 몸을 던질 것이라 약속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나는 몸을 던져 그들을 지켜야 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나씩 하나씩 그들을 잃어갔다. 이제 마지막 남은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엄마를 지키기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순간이 왔다.(350-351)"


엄마를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동구의 바람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꿈 속에서 동구는 박영은 선생님을 만나고 엄마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할머니의 기이한 행동과 말은 기대할 희망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은 동구로 하여금 일생의 결단을 내리게 해준다. 할머니의 고향으로 떠나기 전 겨울을 보내며 아름다운 정원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동구에게 죽을 줄만 알았던 금빛 가슴 털을 가진 야윈 곤줄박이와의 의 조우는 동구의 삶에 닥친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동구에게는 여전히 살아갈 날이 있다는 그래서 희망해야 한다는 정원의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영주는 우리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애정 표현이 자유롭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벌리는 팔과 그 아이가 내미는 입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도, 이야기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 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 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는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321)"


#심윤경 #나의아름다운정원 #한겨레출판 #제7회한겨레문학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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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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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작별 선물',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이렇게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6편이 모두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10년 전의 여행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8월 말이었음에도 반팔만 입고 다닌 날은 하루나 이틀 정도의 낮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저녁에 되며 긴팔 하나로는 부족해 겉옷을 둘러야 했고 새벽에는 추워서 잠이 깰 정도였다. 그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교와 기네스팩토리를 방문하고 코크 가는 길에 들른 블라니성까지는 날씨가 꽤나 좋았는데 골웨이에서는 거의 내내 비가 내렸었다. 특히나 '퀴큰 나무 숲의 밤'에서는 모허 절벽 앞을 서성이는 듯한 주인공의 묘사가 나와서 비바람과 싸우며 간신히 내려다봤던 골웨이의 명소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의 기후와 지형이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많이 비슷하다고 하는데, 높은 산이 없고 구릉지와 같은 들판이 무척 넓게 펼쳐져 있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차로 달리면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의 표지에 나온 것처럼 아주 너른 들판에 외롭게 있는 집들이 그림같이 놓여 있지만 막상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건 정말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내가 갔던 때가 가장 날씨가 좋은 시기였음에도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려서 그런지 골웨이에서는 계속 축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에서 숙소로 머물렀던 수도원의 층간방은 아주 검소한 수도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식당에 있는 화목난로를 보니 겨울에는 진짜 장난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에 추위에 엄습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훨씬 높다보니 심지어 썸머타임까지 적용하기에 여름에는 거의 9시까지 해가 떠 있지만 겨울이 되면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컴컴해진다고 한다. 더블린에서 공부하던 친구는 추위와 비는 그래도 견딜만 한데 겨울의 밤이 너무 길어서 우울증이 올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해만 나면 미친듯이 벗어 째기고 일광욕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펍 문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도 많이 내리고 우중충한 날이 지속되거나 밤이 긴 겨울이 시작되면 야외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게 펍에 모여들 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펍에는 당연히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술에에 취하기 위해서 모이는 염소 똥 냄새를 풍기는 거친 남자들의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의외로 가족단위로 방문해서 아이들과 함께 오락을 즐기는 장소라고도 한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는 펍으로 시작해서 펍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여행 코스이다. 맥주와 위스키의 나라라서 그런지 어딜가나 생맥주의 맛은 끝내주고 아마도 추위를 이기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 또한 유명해서 한 잔 마시면 시뻘건 얼굴로 시내를 종횡무진할 수 있다. 근데 커피에 위스키를 정말 아낌없이 넣어주는 것 같다. 


아일랜드 갬성은 이만 떠올리고 소설 속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7편이 다른 주제와 인물들이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키건만의 독특한 문체가 느껴진다. 독자로서는 단숨에 몰입하기에 조금 불편한 생략과 건너뜀이 반복된다. 장편과는 다르게 단편만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의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사건이 진행되는 것만 같다. 애써 이런 내용이 아닐까 짐짓 가상의 무대를 떠올려보다보면 갑자기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특히나 이번 단편의 주인공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다 사라져버렸다면 조금 덜 빈 마음이 들었을텐데,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심연을 녹여버릴만큼, 모허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자식들을 다 내팽겨치고 도망치고 싶을만큼 회복되기 힘든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겨울이면 좀처럼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추위와 눅눅함을 그나마 견디게 해줄 따뜻한 난로를 채울 장작마저 부족한 나날이 지속된다면, 푸른 들판의 외딴 집에서 보낼 혼자만의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술을 마시고 우연히 만나게 된 이웃 사람에게 쉼없이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들추며 필요하지도 않은 옷을 사러 시내를 나가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헌신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럼에도 푸른 들판의 삶을 견뎌야 하는 것일까? 


#클레어키건 #푸른들판을걷다 #WalktheBlueFields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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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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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매일 매일 반복된다. 친구를 선택하기 위해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함께 일할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심지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좋아하는 연예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사람을 평가한다. 그럴 자격이 감히 있느냐는 반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짐작만 할 뿐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는 너무나도 정당한 것처럼 사람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평판은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도마 위에 올라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게 된 이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할 때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그 사람에 대한 내 안의 데이터를 조심스럽게 재생시킨다. 그리고 내가 확인한 데이터가 맞는지 그 사람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에게 은연 중에 검증을 하게 된다. 비슷하거나 똑같은 견해가 나누어질 때 '역시 내가 잘못 본게 아니었어'라는 짐짓 우월감에 휩싸이다가도 '어째서 그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란 교만함의 늪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뒷담화의 주인공인 그가 중대한 제재를 받게 될 경우 '사람 고쳐쓰는거 아니다'라는 혐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인 상태인 것일까? 변화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것일까? 


  예전과 다르게 '좀 아니다'라고 단정지었던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철이 좀 덜 든 것 같은 나이 때의 행동과 습관으로 그 사람의 한 평생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유연한 마음이 든 것인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시간을 애쓰며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혹은 나의 이해의 폭이 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는 이미 굳어진 모습으로 단정지어진 그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또 한 번의 기대를 품는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고 나니 우리가 의례히 생각해왔던 '시작-고통-찰나의 기쁨과 만족-성장'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삶은 스토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고도 반드시 성장하지는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의 극적 반전도 없고 어떤 미지의 절대적 힘에 의해 구원받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지지부진하고 무력해서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될 뿐 단 하나의 조력자조차 없이 알몸을 아스팔트 바닥에 짖이기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우에게 도마뱀 용식이 어떤 의미인지, 채운에게 반려견 뭉치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십대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지우와 소리와 채운은 부모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이혼한 엄마가 뇌에 종양이 생겨 두통을 겪다가 실족사를 하고, 이른 나이에 중병에 걸려 수차례의 항암치료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사업 실패로 분노 조절이 불가한 아버지가 술에 취해 엄마와 아들을 흉기로 위협하다가 도리어 몸싸움 가운데 칼에 찔려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죽음에 이르는 불행과 고통의 한 가운데에 세 명의 아이가 있다. 다행스럽게 지우에게는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관계이지만 함께 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엄마의 애인인 선호가, 소리에게는 모서리 공포증이 있지만 아내를 그리워하며 딸을 돌보는 호민이, 채운에게는 뭉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이모와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각자의 길을 가게 될지라도 엄마의 부탁을 잊지 말라며 죽은 남편의 의심이 사실이었음을 고백하는 엄마 태선이 있다. 


  이 세 아이는 인생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앞에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망가트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우와 소리는 그림을 통해서 그리고 채운은 얼굴만 알고 있던 지우의 그림을 통해서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된다. 지우가 보고 겪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연재한 만화는 비극적인 결말을 구상하지만 소리에게 맡긴 도마뱀 용식의 죽음으로 엄마의 애인 선호가 제안한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으로 인해 채운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이야기로 변화된다. 지우와 소리와 채운이 겪은 일은 일생에서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이 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이후에 만화로 서로를 알게 된 세 아이의 내면적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로 알아채지 못할 미세한 움직임일지도.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으로 인해 간절히 살고자 애쓰는 이들의 실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깜짝 놀라며 반기는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언정 스토리가 아닌 우리 삶에서는 이보다 더 큰 기적과도 같은 변화는 없지 않을까.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85)"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걸리는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232-233)"


#김애란 #이중하나는거짓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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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1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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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를 읽었다.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인물을 지칭할 때에는 대부분 높임말을 붙이지 않은 채 죽기까지의 직책이나 직업을 붙여 부르곤 한다. 직관적으로 가늠이 되지 않은 시간의 간격은 생사의 연도가 괄호안에 붙어 있는 숫자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냥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산 인물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몇 백년 차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데 몇 십년 아니 몇 년 차이는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싶다가도, 막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0년이란 꽤나 긴 차이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억지로라도 그 차이를 만들어내려고까지 한다. 


  주인공 손미옥이 살아간 시대는 1980년 대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날마다 이어지고 전경들이 쏘아대던 최루탄이 매케한 연기를 자아내 눈과 코에서 쉴세없이 분비물을 쏟아내게 만드는 격동의 시기였다. 당장이라도 전쟁 못지 않은 큰 사단이 날 것처럼 위태롭기도 했지만 보도블록의 돌을 깨어 손에 쥐고 있는 학생이나 방패와 곤봉을 쥐고 잔뜩 긴장한 표정의 전경은 사실 모두 앳띤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혈기 왕성한 열정과 몰입하고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을 그런식으로 해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열렬했다. 


  미옥의 20대를 실패한 운동권 학생의 암울한 나날로만 바라본다면 이 소설은 무척이나 지루할 것이며, 도태되고 자학적인 나날을 술취한 채 소비하는 무력한 사상가의 하소연 쯤으로만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옥이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학생운동을 하며 그 중에 한 명과는 연애를 하다  이별을 감행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갑작스레 끼어드는 갓 사춘기를 맞이할 나이에 교감했던 친구들과의 회상과 미옥이 미워한 아버지를 꼭 닮게 만들어준 외가쪽 여자들의 일화는 젖은 반지하 방에서 30대를 맞이한 한 여성의 성장담만을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미옥의 실패담인 운동권, 연애, 아버지의 죽음에 연이은 자살에 관련된 주변 인물들과의 사건과 미옥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회상의 기억들은 스스로를 평가해 온 비참함과 자기 혐오의 시간들이 오히려 언젠가는 그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희미한 틈새를 파고들어 올 것임을 확신하는 빛줄기를 만들어냈냈다. 


  생각해보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부끄러운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는 대체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때 좀 더 잘 참았더라면,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후회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자아비판의 시간을 갖게 만들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에 따른 영예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없지 않을까, 내가 무슨 염치로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라는 결국 겉으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비겁한 혼자만의 단죄식을 거행하곤 한다. 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아마도 '사람들 다 그렇게 비슷하게 살아, 너만 그러는거 아니니까 너무 자책하지마'라는 손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위로는 몇 잔의 취기로 얻게 되는 흐물흐물해지는 정의의 탑처럼 오히려 나 자신을 혐오하는 반작용을 자아낸다.


  그래서 그런지 짐캐리의 마스크처럼 아주 찰싹 들러붙어 엔간해서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깊은 가면을 쓰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아주 거추장스러운 일을 발생시킬수 있는 아킬레스건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가면을 쓴 모습도 나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기대감이 샘솟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능하다면 이터널션사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상처를 헤집게 만드는 기억들을 말끔히 제거해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밀려오지만, [푸르른 틈새]의 미옥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온 몸으로 설득한다.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는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하다.(308-309)"


  미옥은 지난 과거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악한 기억들이 화살처럼 내리 쏟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온 몸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소낙비처럼 상처의 화살을 온 몸으로 감내해내낼 때 어딘가에는 반드시 빛이 들어오는 틈새가 열릴 것이라고 나를 응원한다. 


  "어떤 실패에 대한 실패인가. 미옥은 바로 살아 있음에 실패하는 데 실패한다. 이 글은 미옥이 이십대에 세 가지 실패를 겪었다고 말해왔지만, 소설이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실패'의 의미는 다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청춘에게 실패란 기대와는 다르게 성숙하고 진지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번번이 초라하고 우스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거나 부인해왔던 자신의 초라하고우스운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찢겨서 열림 틈새를 통해 과거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다. 살아 있는 채로.(인아영 평론가 329)"


#권여선 #푸르른틈새 #문학동네 #문학동네한국문학전집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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