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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평점 :
정유정 작가의 [영원한 천국]을 읽었다. 욕망 3부작 중에 두 번째 작품으로 인터뷰를 보니 성취적 욕망에 대한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전작들이 주로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사건을 담은 스릴러가 많았다면 이번 작품에는 로맨스와 가상 세계에 대한 판타지도 접목되어 있어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깊이 있게 깔려 있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변화를 지켜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이를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저자의 응원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어떤 종교적 요소가 가미된 판결에 귀결점을 둔 것이 아닐까 예상했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과학의 발달로 언젠가는 영생을 꿈꾸는 인간이 육체적 소멸을 앞두고 스스로 데이타화 되기를 선택하여 완벽한 홀로그램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곳을 제목으로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영원한 천국의 이름은 롤라 라는 가상 세계이고 소설 속에서는 아직 완전하게 구현되지 않은 일종의 베타버전을 실행하고 있는 상태로 나온다. 롤라를 구상한 이들은 인간과 가장 유사한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의 생체실험을 마쳤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착수하여 실험대상자들을 고르기 시작한다.
"롤라에 보낸다는 건 정보 형태로 네트워크에 업로드시킨다는 얘기야. 몸을 뺀 나머지, 그러니까 한 개체의 고유한 의식, 무의식, 본성, 반사작용, 감각이나 신경 회로 같은 것들 모두(319)"
데이타화된 인간의 고유한 요소들이 롤라에 보내지고 난 다음에 동일한 본성의 주인인 육체가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기에 롤라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대상으로 노숙자들을 선택했고 무작위로 그들에게 롤라에 업로드 될 수 있는 앱이 구동되는 유심칩을 무상으로 나눠주게 된다. 한국에는 5명에게 유심칩이 주어졌고 롤라에 가고자 유심을 강탈하려는 이들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랑이 언니가 경주에게 "자기야, 삶이 소중한 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야.(491)"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매순간 나의 몸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지는 않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고자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불로장생을 막연히 꿈꿔왔다 하더라도 롤라에 입성하여 드림시어터의 설계대로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다고 해도 끝이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을 선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해상이 어머니와 동일한 루게릭병에 걸려 몸이 굳어가기 전에 마지막 소원처럼 탐방했던 바하리아 사막에서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사막여우를 첫눈에 반한 제이와 함께 보았다면, 롤라행을 간절히 바라게 되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작은 경주와 해상이 롤라에서 만나 경주가 원하는 드림시어터의 구상이 무엇인지 전해주는 내용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경주가 해상에게 해줄 이야기가 제이와 해상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경주와 제이의 삼애원에서의 비극적 사건으로까지 치닫을 것이라고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다. 마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액자식 구성처럼 경주와 해상이 서로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방식의 차이일뿐임에도 화자가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이렇게 서로 다른 화자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경주를 구원하고자 하는 해상의 기막힌 시나리오가 마지막 순간에 전혀 먹혀들지 않고 영원히 경주를 놓아버리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해상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게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임이 드러난다.
주인공 경주는 유년시절 엄마와의 이별과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에 이어 수년 동안 병수발을 들던 착한 동생 승주가 폐인처럼 지내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막말을 내뱉고 그 말이 사실이 되어 승주가 탄 버스를 번번히 놓치는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사회성은 거의 제로이고 심지어 의료사고에 연류되어 직장까지 잃은 경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삼애원이라는 알콜릭 노숙자들의 재활원인 삼애원의 보안팀에 지원한다. 경주는 그곳에서 입사동기 제이를 만나게 되고 2교대라는 혹독한 근무상황 중에 삼애원의 이상기후를 목도한다. 여기에 소설의 암울함을 조금이마나 옅게 만드는 인물이 나오는데, 베토벤과 랑이 언니와 공달이다. 다른 입소자들과는 다르게 지내는 베토벤은 장미정원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주고 랑이 언니는 노래를 가르치며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공달은 베토벤을 아빠라 부르며 호위하는 홍금강앵무이다. 소설의 서두에 경주가 왜 해상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그의 곁에 공달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내용이 이어진다.
주변인물에 불과할 것 같았던 베토벤은 삼애원의 설립자로 드러나고 베토벤이 삼애원에 소속된 이들 중 마지막 유심을 가진 이라는 것이 밝혀져 칼잡이와 그의 하수들의 공격을 받게 되며 극적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삼애원이 소설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배경으로 등장하기에 그곳에서 경주와 제이가 칼잡이를 비롯한 유심칩을 노리는 이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마치 영화처럼 긴장감을 드높인다. 삼애원의 풍경이 묘사될 때마다, 경주의 심란한 마음이 그려질 때마다 삼애원 앞의 바다에서 유빙이 부딪치며 나는 '쿵쿵' 반복된 소리는 경주의 불안함과 위기를 최고로 고조시킨다. 어찌보면 저자기 실제로 홋카이도와 이집트의 사막을 취재하여 소설 속에 그려낸 삼애원과 바하리아 사막은 유빙이 쉴세 없이 부딪히는 망망대해와 풀 한 포기 없는 모래사막이라는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척박한 환경을 대조적으로 그려내며, 해상은 사막에서 자신을 구원할 사랑을 만나게 되고 경주는 유빙이 쉴세 없이 밀려오는 절벽 끝에서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분투하며 동생 승주를 떠나보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게 된다.
해상과 제이의 사막에서 시작된 로맨스는 해상이 루게릭병을 고백하고 제이의 예상치 못한 결정으로 몰입감을 주었지만, 해상에 경주를 구하기 위해 계획한 새로운 드림시어터의 삶인 경주와 지은의 러브스토리는 그동안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상큼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등장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납치와 복수와 접목되며 칼잡이는 끝까지 경주를 괴롭히는 악한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칼에 찔린 트라우마와 세 명의 죽음으로 인해 롤라의 부름을 기다리며 무력한 삶을 살던 경주가 윤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갇혀 있던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경주의 복수가 해상의 설계에 불과했고 경주를 극도의 공포와 불안으로 떨게 했던 칼잡이가 해상의 역할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이르지 못한 경주가 다시 롤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 해상이 자신의 설계가 실패가 아님을 경주가 정말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대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치못하게 마주하는 성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로 삶을 놔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519)"
"종종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 자체를 조롱하거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흐름이 읽히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요인도 분명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개별적 존재다.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는 내 삶의 실행자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기억해주시기를. 우리의 유전자에 태초의 야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 삶의 소중한 무기라는 것을.(저자의 말 중에서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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