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작별 선물',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이렇게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6편이 모두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10년 전의 여행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8월 말이었음에도 반팔만 입고 다닌 날은 하루나 이틀 정도의 낮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저녁에 되며 긴팔 하나로는 부족해 겉옷을 둘러야 했고 새벽에는 추워서 잠이 깰 정도였다. 그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교와 기네스팩토리를 방문하고 코크 가는 길에 들른 블라니성까지는 날씨가 꽤나 좋았는데 골웨이에서는 거의 내내 비가 내렸었다. 특히나 '퀴큰 나무 숲의 밤'에서는 모허 절벽 앞을 서성이는 듯한 주인공의 묘사가 나와서 비바람과 싸우며 간신히 내려다봤던 골웨이의 명소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의 기후와 지형이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많이 비슷하다고 하는데, 높은 산이 없고 구릉지와 같은 들판이 무척 넓게 펼쳐져 있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차로 달리면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의 표지에 나온 것처럼 아주 너른 들판에 외롭게 있는 집들이 그림같이 놓여 있지만 막상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건 정말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내가 갔던 때가 가장 날씨가 좋은 시기였음에도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려서 그런지 골웨이에서는 계속 축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에서 숙소로 머물렀던 수도원의 층간방은 아주 검소한 수도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식당에 있는 화목난로를 보니 겨울에는 진짜 장난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에 추위에 엄습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훨씬 높다보니 심지어 썸머타임까지 적용하기에 여름에는 거의 9시까지 해가 떠 있지만 겨울이 되면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컴컴해진다고 한다. 더블린에서 공부하던 친구는 추위와 비는 그래도 견딜만 한데 겨울의 밤이 너무 길어서 우울증이 올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해만 나면 미친듯이 벗어 째기고 일광욕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펍 문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도 많이 내리고 우중충한 날이 지속되거나 밤이 긴 겨울이 시작되면 야외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게 펍에 모여들 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펍에는 당연히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술에에 취하기 위해서 모이는 염소 똥 냄새를 풍기는 거친 남자들의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의외로 가족단위로 방문해서 아이들과 함께 오락을 즐기는 장소라고도 한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는 펍으로 시작해서 펍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여행 코스이다. 맥주와 위스키의 나라라서 그런지 어딜가나 생맥주의 맛은 끝내주고 아마도 추위를 이기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 또한 유명해서 한 잔 마시면 시뻘건 얼굴로 시내를 종횡무진할 수 있다. 근데 커피에 위스키를 정말 아낌없이 넣어주는 것 같다.
아일랜드 갬성은 이만 떠올리고 소설 속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7편이 다른 주제와 인물들이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키건만의 독특한 문체가 느껴진다. 독자로서는 단숨에 몰입하기에 조금 불편한 생략과 건너뜀이 반복된다. 장편과는 다르게 단편만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의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사건이 진행되는 것만 같다. 애써 이런 내용이 아닐까 짐짓 가상의 무대를 떠올려보다보면 갑자기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특히나 이번 단편의 주인공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다 사라져버렸다면 조금 덜 빈 마음이 들었을텐데,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심연을 녹여버릴만큼, 모허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자식들을 다 내팽겨치고 도망치고 싶을만큼 회복되기 힘든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겨울이면 좀처럼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추위와 눅눅함을 그나마 견디게 해줄 따뜻한 난로를 채울 장작마저 부족한 나날이 지속된다면, 푸른 들판의 외딴 집에서 보낼 혼자만의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술을 마시고 우연히 만나게 된 이웃 사람에게 쉼없이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들추며 필요하지도 않은 옷을 사러 시내를 나가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헌신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럼에도 푸른 들판의 삶을 견뎌야 하는 것일까?
#클레어키건 #푸른들판을걷다 #WalktheBlueFields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