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금희 작가의 [복자에게]를 읽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주에서 읽으니 가상의 고고리섬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주인공 이영초롱은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갑작스럽게 고모가 보건소 일로 머무는 제주에서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고고리섬으로 내려가게 된다. 실의에 빠지고 낙담한 채 고고리섬에 도착한 영초롱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섬을 가로지르다 또래의 소녀 복자를 만나게 된다. 거룩하고 복된 자가 성인에 오르기 전 단계인 복자라는 뜻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영초롱은 복자에게 이끌려 섬마을 수오신에게 집이 풍비박산 난 상처를 고백하고 만다. 덕분에 영초롱은 복자와 절친이 된다. 

어른이 된 영초롱은 법복을 입은 판사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성산포 지원에 발령을 받는다. 사실 법정에서 욕을 한 일로 징계성 발령으로 영초롱은 다시 제주로 귀환하게 된 것이 탐탁치 만은 않다. 서울과는 다르게 지방의 유지들과의 형식적인 만남이 이어지고 엘리사벳이라는 영광의료원 재취부인의 선을 넘는 행동에 이곳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전조가 느껴진다. 영초롱은 초등학교 동창인 고오세를 만나게 되고, 오세는 영초롱을 짝사랑하여 고고리섬에서 대정읍 중학교를 떠나는 영초롱의 주소를 묻고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번 작품에서 편지는 수신인에게 도달하지 못한 안타까운 메신저의 역할을 맡는다. 영초롱의 고모는 친구 이규정에게, 고오세는 첫사랑 영초롱에게, 그리고 영초롱은 소원해져버린 친구 복자에게 편지를 쓴다. 

학창시절에 편지 쓰는 걸 참 좋아했었다. 매일 만나는 친구에게, 먼 곳으로 이사가 자주 못 보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일상을 전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 한 명과는 마치 연애편지를 쓰듯이, 때로는 이 편지를 나중에 책으로 엮어보겠다는 심산으로 편지를 줄기차게 써댔다. 자주 보는 친구였지만 편지에 쓰인 글귀들이 아무런 기쁨이 없던 학창시절을 견디게 해 주었다. 어떤 날은 자율학습을 하러 가는 친구가 내가 사는 집 앞에 잠깐 내려 서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같이 듣고 다시 보내야 하는 애틋함까지 느낀 적도 있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지만 그때 친구를 기다리며 설레여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영초롱과 복자가 그랬듯이 나도 그 친구와 어느 순간 소원해지게 되었다. 사실 별 일도 아니었는데, 그 친구가 마치 나를 비꼬는 듯한 말을 반복해서 장난친 것이 상처로 다가왔고 이제는 그와 예전처럼 공감할 수 없겠구나라는 단정을 짓고 말았다. 

영초롱은 복자의 냉담함이나 복자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선을 넘는 말을 건네는 것에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막막함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복자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어쩌면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로 인해 멀어져간 소중한 만남의 인연들을 애써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아주 오래된 나의 친구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가끔씩은 나처럼 너도 나를 기억해달라고..

“서른 살이란 이십대의 형형한 에너지가 약간 순화되었을 뿐 여전한 활기와 발산을 간직한 때가 아닐까. 마치 새잎과 꽃의 계절인 봄을 보내고 본격적인 성장의 시간을 맞은 초여름의 식물들처럼(29)”

“복자는 제순이의 눈썹이 일종의 농담 같은 거라고 했다. 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81)”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 작가의 말 중에서(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두온 작가의 [타오르는 마음]을 읽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랫동안 한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 거주지의 이동이라는 큰 임무를 수행하느라, 새롭게 생겨난 일정을 따라가느라 육신의 피로로 인하여 그렇기도 했지만, 주인공 벤나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평원의 살인마를 찾아나서는 과정 또한 피로감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한국형 연쇄 살인마 스릴러와 같은 기운을 내뿜는 이 작품은 마치 배경이 한국의 어느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먼 타지를 연상시키는 묘사와 등장 인물들의 특이한 이름, 그리고 주로 스페인어권에서 행해지는 씨에스타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오기에 소설을 읽는 내내 유럽의 어느 넓은 평원이 연상되었다. 

주로 화자인 ‘나’는 어릴 때 평원에 몰래 들어갔다가 그만 연쇄 살인마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벤나의 말을 듣고 몽타주를 만들어 범인을 잡으려 하지만, 벤나가 묘사한 범인의 모습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결국 마을 주민들은 벤나가 미친게 아닐까 생각하며 더 이상 벤나의 말을 신용하지 않는다. 살인범으로 나오는 위도는 사불이라는 말과 함께 평원에서 살인을 즐긴다. 처음에는 사불이 진짜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사불은 위도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이미 중반부터 살인범이 누구라는 것이 명확히 나오기에 긴장감이 떨어질 것 같지만, 이후 숨겨진 부분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나 살인마를 이용하여 마을의 활성화 시킨 이들의 미심쩍은 행동들이다. 벤나의 친구로 나오는 오기와 노박은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며 벤나가 모든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는 곳에 함께하게 된다. 

결국은 이 소설에서도 인간의 어긋난 욕심과 이기심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의 얄팍한 상술로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있는 현 사회를 꼬집고 있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번째 책이다. 화자 ‘나’는 이름이 영인이지만 이름은 거의 몇 번 나오지 않는다. 그에 반해 영인의 엄마는 김작가라는 호칭으로 수없이 반복되어 나온다. 제목이 [라이팅 클럽]이기에 김작가의 반복이 의미하는 바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영인의 엄마 김작가는 살림도 자녀 교육도 관심없이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어찌보면 빵점 짜리 엄마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인도 엄마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듯 하고 그래도 특별한 어긋남 없이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김작가라 칭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서울 계동의 어느 노부부의 주택에 세간살이를 하며 글짓기 교실을 열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도 거의 몇 번 나오지 않는 것과 더불어 다른 등장인물들도 이름이 아닌 이니셜로 언급된다. 영인의 친구는 R과 K, 그리고 그녀의 남자들은 B와 세탁소 남자, 그리고 영인의 우상인 J작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이름이 없는 익명의 누군가이면서 영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영향을 미친다.  계동의 ‘글짓기 교실’이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이 되기까지 영인은 불우한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 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쓴다. 엄마인 김작가에게 더 이상 쓰레기를 만드는 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폭언을 견디어 내고, 시몬 베유의 [노동 일기], 잭 런던의 [강철 군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를 읽으며 영인 자신도 언젠가는 쓰레기 같은 글이 아닌 무엇인가를 쓰지 않을까 고뇌한다. 세탁소 남자를 소개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 네일 아트의 일을 하며 엄마의 글짓기 교실을 이어 라이팅 클럽을 열게 되지만,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뇌에 종양이 생겨 입원하게 된 엄마, 발작을 일으키며 죽음을 앞둔 것처럼 보이고 결국은 슬픈 결말을 맺을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엄마가 드디어 등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드디어 김작가가 된다. 

작품의 화자로 나오는 영인인 ‘나’는 시종일관 시니컬하고 그 어떤 세태의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을 강단이 있어 보이지만, 그녀가 대학을 가지 못하고 예쁜 외모가 아닌 때로는 폄하 당하는 모습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인은 그러한 모든 조건들이 절대로 그녀의 읽기와 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워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엄마인 김작가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해낸다. 엄마가 영인을 키우는 것에 소홀했음에도 돌아온 영인은 엄마를 돌보는 시간을 통해 엄마의 꿈을 이루게 해준다. 김작가가 계동의 아줌마들과 글짓기 교실을 할 때에 강조했던 말이 떠오른다.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빼고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를 써오라고’ 계동의 엄마들은 그걸 빼면 도대체 뭘 쓸지 고민하지만 결국 뭔가를 쓴다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를 읽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들이 무덤을 잠시 쉬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불렀던,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네크로폴리(Necropoli)’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있었다.(405)”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 어느 날 저녁 Don Maino는 내게 어디를 가자고 제안했다. 더듬더듬 그의 질문을 되새겨보니 무슨 연주회를 가자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방문한 San Zeno 성당은 한 눈에 봐도 정말 오래 되어보였다. 그 성당의 내부 구조가 보통 성당과 다른 모습이었는데, 입구 들어서서 보면 약간 복층 구조였다. 제대를 향할 수록 가운데는 밑으로 움푹 파여 있고 양쪽 가장자리는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놓여 있었다. 연주회는 계단 위에서 했는데, 그게 2층 같지 않은 2층이라 성당이 신기하게 지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연주를 감상하다 밑으로 내려와 움푹 파인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니 ‘cimitero’라는 생소한 단어가 씌어 있었다. 바로 체메테리움이라는 라틴어 단어의 이탈리어였다. 그리고 그 움푹 파인 곳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성당 이름이 제노였던 것은 그 무덤의 주인이 바로 베로나의 첫 주교였던 제노 성인이기 때문이다. 제단 밑에 성인의 유해를 묻는 것은 익숙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에 확연히 보이도록 성인의 유해가 놓인 것은 처음 보았기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죽은 자들의 묘지는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자들의 거처와 먼 곳에 놓았던 우리내 관습과는 정반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은 ‘체메테리움’의 뜻을 받아들여 성인을 그들 삶의 거처에 두고자 했다. 

소설의 가공할 장소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높은 산 꼭대기에 세워진 곳에 세상을 등지고 형제로만 살아갈 것을 다짐한 이들이 그들의 체메테리움에 남긴 성경 말씀이다. 천산벽서에 대한 신비로움을 소재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 수도원의 구성원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전혀 다른 인물일 것 같은 어린 소년 ‘후’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연희를 짝사랑하는 박중위의 이야기를 거쳐 후가 천산 수도원에 머물게 되는 고리가 맞춰진다. 어느 날 천산 수도원의 비밀을 죽기 전에 토해내듯 알려준 군인 장이 윗선의 명령을 받아 수도자 반을 밖으로 내몰고 되고,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군부 독재 장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조력자 한정효가 더 이상 잘못된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자 그를 가둬두기 위한 장소로 선택된 것이었다. 이후 또 다른 독재자는 천산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수도자가 된 한정효를 꺼림칙하게 여기게 되고 그곳의 모든 수도자를 지하 방 한곳에 가둬 몰살시키게 된다. 수도원에서 나가게 된 후는 사촌누나 연희를 찾기 위해 도시의 미용실을 뒤지고 다니다 그가 미용사가 되어 안기부 사모의 도움으로 누나를 찾게 된다. 하지만 누나는 후가 모르던 진실을 알려주게 되고 후는 박중위를 증오하며 그를 칼로 찔렀던 미움의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천산 수도원, 후, 한정효, 연희, 박중위, 독재자, 장, 강영호, 강상호, 차동연 등의 인물들이 치밀하게 연결된 추리물을 연상시키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인 분석은 인간에게 윤리가 가진 당위성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나간다. 

“사람의 정신이 행동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의 지배를 받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사람의 행동이 정신에 의해 부여된 의미의 지배를 받는 일 역시 가능하다.(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었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 바라보다’라는 뜻이 담긴 시선을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은 ‘심시선’이라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워낙에 등장인물들이 여러 명 나오다보니 친절하게 맨 앞에 심시선 가계도도 나와 있어 이름이 헷갈리면 맨 앞 장을 열어 다시 확인하며 읽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나라 이름이다보니 금방 적응이 되지만, 외국 이름이 이렇게 여러명 나오면 정말 지친다 지쳐~ 도스토에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조금만 쉬웠더라면, 그리고 친절히 가계도를 그려주었더라면 아마 눈꼽만큼은 읽기가 용이해지지 않았을까나. 아무튼 심시선은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매 챕터의 시작마다 가공의 인물 심시선이 살아생전에 발표한 책과 인터뷰 등을 인용하며 실존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심시선의 유언을 잘 받아들이던 자녀들이 십년 만에 첫 제사를 드리러 하와이에 가게 된다. 

명혜, 명은, 명준, 경아 이렇게 네 명은 심시선의 아들, 딸이다. 이 중 경아는 시선의 재혼으로 만나게 된 딸인데, 흔히 새엄마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딸의 심술이나 계모의 악랄함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시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듯이 경아는 새엄마 시선을 진짜 엄마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명혜와 명은 또한 경아를 친동생처럼 아껴준다. 결말에 명혜의 남편 태호가 제사라는 이벤트를 앞두고 가장 큰 어른으로서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명혜가 자신이 가장 큰 어른이라고 말하자, 태호는 내가 세 살 더 많은데 라고 답하고, 명혜는 우리집은 모계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태호는 바로 수긍해버리는 참으로 현실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성정을 가진 이들의 모습이다.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가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직장내 염산 테러 이후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상에 아이를 데려올 수 없다는 화수의 마음과, 하와이에서 만난 체이스가 칠레 해안가의 기름 유출로 새와 펭귄이 기름을 뒤짚어 써서 닦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에 집으로 가는 비행을 변경한 지수의 따뜻함과, 새를 사랑하는 마음에 무채색의 옷만 입고 다니며 칠레에 함께 가지 못하자 울어버리는 해림의 고결함이 아마도 시선으로부터 이어진 놀라운 전승이리라.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288-2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