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었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들이 제례 예식처럼 행하는 신사에서의 예절은 신도라는 이름의 종교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다. 신도라는 일본의 종교를 알아갈수록 여타의 대표적인 종교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과 그들의 신도에는 다신교적이고 다분히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토테미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오쓰가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하면서도 중세 스콜라 철학 사상을 중요시하는 교수들의 질문에 범신론적인 대답을 한 이유는 아마도 신도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심지어 중세 이후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뛰어난 선교사들이 일본을 기점으로 복음 선포를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쩌면 그때 일본에 보낸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삼았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일본의 무참한 박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 당시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켜나간 이들을 기리시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가사키에 가면 순교자들의 흔적이 남은 성지를 방문할 수 있다. 

이렇듯 유럽 가톨릭 교회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복음화율은 거의 0.1%정도에 불과해 실제 일본 사람들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를 봐도 어떤 사람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신자들은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왔고, 엔도 슈사쿠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탄생된 것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침묵]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의 작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사해 부근에서]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깊은 강]은 오로지 가톨릭적인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심연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규명해 나가고 있다. 

[깊은 강]의 주인공들은 크게 4명으로 황혼의 나이에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간직하며 아내가 남긴 유언을 따라 환생할 아내를 찾아 인도 순례를 떠난 이소베, 작가 연보를 살펴보니 실제 저자의 경험이라고 폐 수술을 세 번이나 이겨낼 때 대신 죽음을 맞이한 구관조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인도 순례를 떠난 동화작가 누마다, 이소베의 아내를 간병하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오쓰라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대학 동창을 골탕먹이기 위해 가짜 사랑의 유혹을 건네고 나서도 오쓰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해 그의 발자취를 쫓는 미쓰코, 미얀마에서의 전투에서 퇴각하며 죽음을 목전에 둔 전우들을 들판에 남겨둔 채 배고픔에 지쳐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기구치가 바로 이야기의 주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도의 불교 성지 순례라는 투어에 신청하여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조우할 수 있는 게 된 곳은 바로 갠지스강에서 유유히 흐르는 물로 목욕하고 입을 헹구며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이들이 머물고 죽은 이들의 재와 시신을 강에 띄어보내는 바라나시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4명의 주인공들의 마음 속에 감춰진 관념적인 고통과 내면의 갈등은 신부가 된 오쓰가 공동체에서 벗어나 힌두교도들의 시신을 짊어지는 아이러니한 삶과 마주치게 된다. 

저자가 오쓰의 삶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 구절이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313-314)” 오쓰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 미쓰코에게 오쓰는 토마토나 양파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을 대체하며 그가 믿는 신은 이성적인 사고로 완벽한 결론을 맺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장소에 어이없는 모습으로 실추된 한 마디로 실패한 모습이었다. 오쓰는 미쓰코의 외침에도 나오는 것처럼 도대체 당신 혼자 그렇게 바보같은 희생을 감수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냐는 물음에 목이 꺾이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힌두교들의 들것에 실려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저자가 오쓰의 삶을 대변하는 구절로 선택한 내용은 이사야서 53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이 원문이다. 바로 예수님이 장차 겪게 될 운명에 대한 예언자의 선고인 셈이다. 여전히 지속되는 종교 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갈등 속에서 어쩌면 여전히 범신론적인 신앙에 국한된 오쓰의 선택은 양파라고 불려도 그의 숭고한 사랑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기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마더 데레사의 수녀회 수녀들이 데리고 가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라는 인간 심연의 당위를 통해 미쓰코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게 된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하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풍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316-3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과 나의 주파수를 찾습니다, 매일 -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보낸 단짠단짠 16년 일하는 사람 2
차현나 지음 / 문학수첩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현나 피디의 [당신과 나의 주파수를 찾습니다, 매일]을 읽었다. 문학수첩에서 발간된 '일하는 사람' 두 번째 시리즈이다. 부제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보낸 단짠단짜 16년'이다. 노안이 와서 그런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면 멀미가 나는 것처럼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처럼 유튜브를 즐기지 못하는 비겁한 변명을 대고 싶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은 포털사이트이 검색창에서 모르는 것을 묻기 보다 유튜브에서 찾아본다고 하니 IT 세계의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척되는 것 같다. 


더 이상 아파트 후미진 곳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없는 상황이기에 현대의 아이들은 학원에 비싼 돈을 내가며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게 된다.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 또래 집단에 속해야 하는데 학원을 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의 아이들이(물론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에 중독되어가는 것은 웹상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놀이가 형성되고 거기에 끼지 않으면 도태되고 때로는 왕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라디오는 요샛말로 레트로 감성이 풍부한 아재들이나 라떼는 말이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들었던 오래전 대중문화로 여겨지는 듯 하다. 요즘 라디오를 즐겨듣는 청소년들이 있을까?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그 내용이 방송되어 다음 날 학교에서 주목받는 일이나,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 얼른 카세트 공테이프에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잡음이 들어가지 않기를, 노래가 끝날때까지 DJ가 아무말도 하지 않기를 바랬던 마음을 요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요즘 라디오는 일하는 사람들과 출퇴근 중에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청취자일 것이라 생각된다. 하루종일 반복되는 일을 하며 다른 곳에 눈을 둘 수 없고 오로지 작업하는데 집중해야 하지만 귀 만큼은 어디론가 향할 수 있고 무료하고 지루한 작업에 조금이나마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라디오 방송의 매력이기도 하다. 또한 출퇴근 시간에 막히는 길목에서 활기찬 댄스가요나 적절한 발라드가 흘러나오면 내 앞으로 가로막는 새치기 차량도 가끔은 너그럽게 끼워주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잠들지 않는 늦은 밤 차라도 한잔 우려내 좋아하는 DJ의 나긋나긋한 위로의 말들을 듣고 있으면 누군가 나를 묵묵히 위로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제, 어제 우리 방송을 들어주었던 그 청취자가 오늘도 문자로 인사를 보내왔다면, 적어도 그분에게는 오늘 아주 시급하거나 안 좋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그저께처럼, 어제처럼, 라디오를 켜고 문자 하나를 보낼 만큼 그분에게는 평범한 하루였을 거라는 생각, 얼굴도 모르는 그 청취자의 평범한 안부가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진다.(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유원 작가의 [불펜의 시간]을 읽었다.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서평단 모집에 응모하여 운 좋게도 당첨이 되었고 단숨에 몰입되어 읽게 되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이 해마다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놀라운 정도로 짜임새 가득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고민해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단단한 공’처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야구를 보지 않는다. 야구장의 스카이박스석에서 편히 음식을 먹으며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애써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3시간이나 지속되는 그 지루한 경기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밥을 먹거나 딱히 할 얘기가 없을 때 어제 야구 경기 결과는 논하는 이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될 때가 많아 나도 한 번 열심히 야구에 관심을 갖아볼까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열고 경기 결과를 쓱 살펴보지만 역시나 그때뿐 다음 날 경기에는 여전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운동이랑 담 쌓고 살아온 혹은 운동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어릴 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야구를 좋아했느냐면 배트와 글러브는 당연히 가지고 있었고,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는 12동까지 있었는데 해마다 광복절 즈음에는 아랫동 아이들과 윗동 아이들이 대단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야구 시합을 하곤 했었다. 당시 나는 아랫동 아이들 그룹에 속해 있었고 내 포지션은 투수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경기를 하기에 유리창을 깨질까봐 실제 야구공을 사용하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와 돌같은 야구공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무서웠던 초등학생들에게는 테니스공이 적격이었다. 그래야 포수 마스크도 쓰지 않고 경기에 임한 선수를 보호할 수 있기도 했다.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이라고 생각해, 나는 친구들을 만나 야구 연습을 하지 않는 날에도 혼자서 투구 연습을 엄청많이 했다.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내가 스트라이크 존에 제대로 던지는지 알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당시 프로판 가스 통을 넣어두는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함이 있었는데, 그 커다란 함 아래 부분에 딱 스트라이크존 모양으로 구멍이 뚫여 있었다. 제대로 던지면 테니스공이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한 번도 야구장에 가서 경기를 본 적이 없었다. 학교 친구들이 당시 유행하던 프로야구단의 어린이 회원이 되어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야구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회원이라고’ 비웃으며 사실은 나도 그 옷이 무척이나 입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부모님께 프로야구단 회원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불펜의 시간]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중학생 때까지 야구를 했지만 우러러 보던 동창생 혁오의 투구를 보고 한계를 느껴 야구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이준삼, 학생때부터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구단에 입단하여 가장 촉망받는 선수로 기대를 받았던 권혁오, 초등학생때 오빠를 따라 야구를 시작했지만 여자 야구구단이 없어서 꿈을 포기하고 스포츠 신문기자가 된 이기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준삼은 회식을 하다가 ‘누구처럼 살고 싶냐’는 부장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끙끙대다가 우연히 TV에서 방송되는 중학교 동창 혁오의 경기를 보게 되고 얼떨결에 ‘야구선수 권혁오’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책을 덮고 나니 소설의 시작에 나온 준삼의 대답이 결국 이 소설의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혁오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혁오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후 준삼이 혁오처럼 야구부를 했었지만 야구부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경위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어진 혁오의 이야기는 준삼이 우상처럼 바라봤던 혁오가 어째서 선발투수로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계투로 등판하여 쿠쿠다스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지의 사연이 드러난다. 혁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진호와의 비극적인 사건은 혁오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혁오는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현실 속의 리그와 진호 리그를 만들어 남들에게는 승부조작으로 비춰질 수 있는 볼넷을 던져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은 기현은 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특종 기사를 터트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마 기현이 왜 그렇게 특종에 목을 매는지, 왜 스포츠 기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준삼은 언제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냐는듯이 6년차 회사원으로서의 일상을 잘 영위해 나간다. 하지만 불현듯 회사에서 풍겨오는 악취는 준삼의 내면적인 무엇인가가 서서히 부서지고 있음을 예고한다. 특히나 공채직원과 ‘여직원’의 관계애 대한 묘사는 정글같은 회사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신입 딱지를 떼고 승진할 때는 ‘여직원’보다 일을 못 하는 자신이 먼저 승진한 걸 미안해한다. 회사의 진급 시스템이 엉망이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나 그 분노의 크기는 언제나 작아서 하룻밤 자고 나면 사그라든다. 두 번째 승진 때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분노도 없다. ‘여직원’과 공채가 다른 체계에 속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승진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책임지고 일을 기획하는 위치가 되면 한 때 우러러봤던 선배,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줬던 ‘여직원’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단순 업무를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한계를 말한다.(79)”

이렇듯 악취를 풍기는 회사의 부조리함에 준삼이 동요하는 이유를 혁오는 야구팬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암시한다. “혁오는 오랫동안 수많은 야구팬을 접하면서 그들의 마음 저변에 삶에 대한 염증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확한 규칙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싫어서 규칙이 확실한 야구를 좋아하고, 삶의 불확실성을 잠시라도 피해보려고 야구장에 온다고 생각했다.(153)” 기현이 승부조작에 대한 제보자를 만나 특종거리를 갖고 편집장을 만나러 갔지만 언론, 구단, 브로커가 얽혀 있기에 기사를 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혁오를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혁오가 볼넷을 일부러 던지게 된 이유를 듣고 특종에 목을 매었던 비굴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준삼은 회사 생활이 지속될수록 깊어지는 뻔뻔함과 모욕감에 지쳐가는 상황 중에 구조 조정을 계기로 회사에서 내쳐지게 된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되 견뎌야 했다. 누가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175)”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준삼에게 자유를 준 사람은 바로 혁오였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210)” 준삼에게 악취와 모욕을 벗어날 자유를 준 혁오의 반향은 이제 기현을 향하게 된다.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만들고 싶어해. 작아도 단단한 거,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거. 네가 한 말은 그래서 멀어.(235)” 비록 준삼은 회사를 그만두고, 기현은 스포츠 기자에서 SNS 기자로 전락하고, 혁오는 프로구단에서 추방되어 독립구단의 투수코치가 되는 실패자가 되지만, 세 명의 주인공들이 선택한 길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자기 자신 안에 있음에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을 어서 끄집어 내기 위해 용기를 내라고 손짓하며 ‘단단한 공’을 나에게도 던져주고 있다.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251)”

야구를 너무나도 좋아해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소년이 시간이 많이 흘러 야구에 무관심에 어른이 되기까지 잡지 않고 놓아 버렸던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준삼은 두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나도 있다.(2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숭이의 의자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사쿠라 모모코의 [원숭이의 의자]를 읽었다. 띠지에 ‘일본 3대 국민 애니메이션’ <마루코는 아홉살> 작가, 사쿠라 모모코의 여전히 웃음 터지는 코믹한 일상! 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권남희 님이 번역했다는 걸 보고 구입했다. 웹서핑을 해보니 <마루코는 아홉살>은 지금 케이블 TV에서 절찬리 방영중인 꽤나 인기 있는 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저자의 에세이가 3부작으로 한 번에 출간되었는데 그 중에 2권에 해당되는 것만 구입해서 제대로 보고 1권부터 사서 볼걸 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원작은 무려 30년 전인 1992년에 나온 책으로 저자는 동시대의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충분히 작품을 남길 수 있을텐데 몇 년 전에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도 띠지에 쓰인 ‘코믹한 일상’이라는 수식어를 충분히 붙일만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고 유쾌했다. 코미디 작가를 했어도 대성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글에는 유머와 재치가 넘쳐났다. 그리고 그런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보통 사람은 하나도 경험하기 힘든 이상한 일들이 그에게는 자주 발생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30년 전의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과 사뭇 다른 배경이 연상되기도 하며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음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아쉽게도 일본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과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사전 지식이 없으니 모든 부분을 공감할 수 없음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모든 인류가 공감할 만한 소재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선과 때로는 기인처럼 느껴지는 반응들이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인도 여행기는 정말로 인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호불호가 정반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입증시켜주었다. 아마도 당시에 일본에는 해외 여행기가 유행이었는지 대만 여행기가 히트가 되자 편집자는 저자에게 인도 여행을 권유한다. 인도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가이드 오아사(한자로 대마라고 쓰임) 씨와 함께 좌충우돌 인도 여행이 시작된다. 가이드가 인도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면 저자는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한 마디로 학을 떼게 된다. “거리의 지저분함과 거짓말과 물건 팔기와 구걸에 심신이 너더너덜해졌다.(76)”고 표현했다. 이 외에도 애든 어른이든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치질 이야기나 소변을 마시는 이야기는 폭소를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경험하는 소소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이런 게 이야기가 될 수 있나 싶은 소재들도 재미있게 풀어갔다. ‘이름 모르는 물건 사기’ 에피소드가 그러한데,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찾아보면 대부분 찾을 수 있지만 92년도만 해도 제목도 가수 이름도 모르는 앨범을 사기 위해서는 레코드 가게 점원에게 맞지도 않은 음을 흥얼거리며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을 사고 싶다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향수를 자아냈다. 

이런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이어지다가 ‘이사오가 있던 날들’ 이야기에서는 감동을 훅 밀려왔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진심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마주하기 힘든 현실이라 그런지 저자의 고백이 고맙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화를 그린다면 어린이들이 아주 많이 보는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사오는 저자가 다닌 초등학교 특수학급에서 공부하는 친구였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조금 모자라 보이는 아이는 시비를 걸거나 놀리거나 했을 텐데 저자는 이사오를 처음 만난 3학년 때 “그날부터 이사오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172)”라고 말한다.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에서도 저자 옆에 이사오가 앉는 것을 반기며 ‘이사오, 내 옆에 잘 왔어’라는 마음 속 인사를 떠올린다는 것은 보통의 마음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졸업식 중에 교장 선생님께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넙죽 절을 하고 방귀를 두 번 뀌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는 이사오지만 그가 남긴 졸업문집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사오는 연날리기 대화에서 즐거웠던 추억을 썼다. 해변에 누워서 보던 자신과 다른 아이들의 연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자신과 물통과 하늘로 올라간 연과 물가의 돌이 그려진 그림과 함께. 이사오가 쓴 글 속에 내가 잃어가던 것 전부가 있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비쳤다. 해변의 돌도, 물통도 그대로 비쳤다. 선택하지 않았다. 중립적인 감성으로 사물을 비추는 마음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 이사오는 언제나 모든 것에 중립이다. 거기에 이사오의 절대적인 존재감이 있다. 
나는 졸업문집을 펼친 채 울었다. 엉엉 울었다. 진심으로 이사오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사오의 에너지가 내 마음속 어딘가의 채널을 돌려줬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금희 작가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을 읽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이기에 신비롭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무엇인가에 독창적인 힘을 불어넣는 것이기도 하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의 소설에 붙은 제목이 주는 힘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도 그렇고 이 소설집의 제목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한 번 듣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매력적인 제목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아이들', '너의 도큐먼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집으로 돌아오는 밤', '당신의 나라에서', '차이니스 위스퍼', '우리 집에 왜 왔니',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릴리', '사북(舍北)' 이렇게 10편이 실려 있다. [경애의 마음]을 읽고 저자가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첫 번째 소설집에 담긴 단편에도 인천을 배경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경애의 마음]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몰래 다니던 2층 호프집에서 불이나 많은 학생들이 죽은 사건이 나온다. 실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호프집 주인이 불이나 학생들이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봐 문을 걸어 잠궜다는 말에 광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에는 역시나 인천에서 유명한 사학재단 비리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금은 거주자 수가 많이 줄었고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지만 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열개의 학교가 몰려 있고 도시 학생 중 절반은 거쳐가던 거대한 왕국이었다.(219)"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한 곳에 많은 학교를 모아놓을 수 있었는지 설립초기의 배경부터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배경이나 소재에 실제로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나오면 잊고 지냈던 분노와 정의와 같은 낱말들이 떠오른다. 어째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그러한 사건들을 다시 접하면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시대를 관통하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가는 형이상학적 체증 때문일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이 되다보니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모호해지고 언제든 나 또한 그런 피해자가 될지 모르다는 두려움은 일상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혈연, 지연, 학연의 고리가 철퇴를 맞아도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러한 강력한 고리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구차한 일이 되고 주류를 이루는 계급에 편승되지 못하면 낙오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면에서 저자의 소설에 등장한 인생의 나락을 발 밑에 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소소히 견디며 구석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완전히 폭망하지도 그렇다고 재기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보이는 그런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공하고 주류를 이루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사는 삶이 비루해 보일지 몰라도 곳곳에 떨어진 작은 폭탄 파편 같은 위협들이 산재해도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내기에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김의 말은 내 뺨을 한대 올려붙이듯 지나갔다. 말투는 따뜻한 것도 차가울 것도 없었지만 센티멘털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무심하게 붙은 듯한 '하루' 이틀'에도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간의 날들과 결별은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크게 좋아질 건 없을 거라는 닳고 닳은 냉소였다. 나는 연민에서 센티멘털까지 말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86)"


""만화가들한테 사람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근육이란 주름이에요. 그게 표정을 만들거든요. 얼굴에는 슬픔의 근육이랑 기쁨의 근육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코의 옆부분에서 입의 가장자리를 지나 턱까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슬픔을 나타내는 근육이에요. 양치할 때 입을 벌리게 하는 근육이기도 하고요. 기쁨의 근육은 광대뼈 밑에 있는데 옆이 아니라 위로 움직여요. 이렇게 위로, 위로." M이 스케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