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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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었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들이 제례 예식처럼 행하는 신사에서의 예절은 신도라는 이름의 종교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다. 신도라는 일본의 종교를 알아갈수록 여타의 대표적인 종교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과 그들의 신도에는 다신교적이고 다분히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토테미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오쓰가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하면서도 중세 스콜라 철학 사상을 중요시하는 교수들의 질문에 범신론적인 대답을 한 이유는 아마도 신도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심지어 중세 이후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뛰어난 선교사들이 일본을 기점으로 복음 선포를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쩌면 그때 일본에 보낸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삼았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일본의 무참한 박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 당시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켜나간 이들을 기리시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가사키에 가면 순교자들의 흔적이 남은 성지를 방문할 수 있다. 

이렇듯 유럽 가톨릭 교회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복음화율은 거의 0.1%정도에 불과해 실제 일본 사람들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를 봐도 어떤 사람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신자들은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왔고, 엔도 슈사쿠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탄생된 것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침묵]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의 작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사해 부근에서]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깊은 강]은 오로지 가톨릭적인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심연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규명해 나가고 있다. 

[깊은 강]의 주인공들은 크게 4명으로 황혼의 나이에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간직하며 아내가 남긴 유언을 따라 환생할 아내를 찾아 인도 순례를 떠난 이소베, 작가 연보를 살펴보니 실제 저자의 경험이라고 폐 수술을 세 번이나 이겨낼 때 대신 죽음을 맞이한 구관조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인도 순례를 떠난 동화작가 누마다, 이소베의 아내를 간병하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오쓰라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대학 동창을 골탕먹이기 위해 가짜 사랑의 유혹을 건네고 나서도 오쓰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해 그의 발자취를 쫓는 미쓰코, 미얀마에서의 전투에서 퇴각하며 죽음을 목전에 둔 전우들을 들판에 남겨둔 채 배고픔에 지쳐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기구치가 바로 이야기의 주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도의 불교 성지 순례라는 투어에 신청하여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조우할 수 있는 게 된 곳은 바로 갠지스강에서 유유히 흐르는 물로 목욕하고 입을 헹구며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이들이 머물고 죽은 이들의 재와 시신을 강에 띄어보내는 바라나시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4명의 주인공들의 마음 속에 감춰진 관념적인 고통과 내면의 갈등은 신부가 된 오쓰가 공동체에서 벗어나 힌두교도들의 시신을 짊어지는 아이러니한 삶과 마주치게 된다. 

저자가 오쓰의 삶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 구절이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313-314)” 오쓰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 미쓰코에게 오쓰는 토마토나 양파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을 대체하며 그가 믿는 신은 이성적인 사고로 완벽한 결론을 맺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장소에 어이없는 모습으로 실추된 한 마디로 실패한 모습이었다. 오쓰는 미쓰코의 외침에도 나오는 것처럼 도대체 당신 혼자 그렇게 바보같은 희생을 감수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냐는 물음에 목이 꺾이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힌두교들의 들것에 실려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저자가 오쓰의 삶을 대변하는 구절로 선택한 내용은 이사야서 53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이 원문이다. 바로 예수님이 장차 겪게 될 운명에 대한 예언자의 선고인 셈이다. 여전히 지속되는 종교 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갈등 속에서 어쩌면 여전히 범신론적인 신앙에 국한된 오쓰의 선택은 양파라고 불려도 그의 숭고한 사랑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기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마더 데레사의 수녀회 수녀들이 데리고 가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라는 인간 심연의 당위를 통해 미쓰코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게 된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하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풍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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