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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김유원 작가의 [불펜의 시간]을 읽었다.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서평단 모집에 응모하여 운 좋게도 당첨이 되었고 단숨에 몰입되어 읽게 되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이 해마다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놀라운 정도로 짜임새 가득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고민해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단단한 공’처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야구를 보지 않는다. 야구장의 스카이박스석에서 편히 음식을 먹으며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애써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3시간이나 지속되는 그 지루한 경기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밥을 먹거나 딱히 할 얘기가 없을 때 어제 야구 경기 결과는 논하는 이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될 때가 많아 나도 한 번 열심히 야구에 관심을 갖아볼까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열고 경기 결과를 쓱 살펴보지만 역시나 그때뿐 다음 날 경기에는 여전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운동이랑 담 쌓고 살아온 혹은 운동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어릴 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야구를 좋아했느냐면 배트와 글러브는 당연히 가지고 있었고,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는 12동까지 있었는데 해마다 광복절 즈음에는 아랫동 아이들과 윗동 아이들이 대단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야구 시합을 하곤 했었다. 당시 나는 아랫동 아이들 그룹에 속해 있었고 내 포지션은 투수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경기를 하기에 유리창을 깨질까봐 실제 야구공을 사용하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와 돌같은 야구공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무서웠던 초등학생들에게는 테니스공이 적격이었다. 그래야 포수 마스크도 쓰지 않고 경기에 임한 선수를 보호할 수 있기도 했다.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이라고 생각해, 나는 친구들을 만나 야구 연습을 하지 않는 날에도 혼자서 투구 연습을 엄청많이 했다.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내가 스트라이크 존에 제대로 던지는지 알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당시 프로판 가스 통을 넣어두는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함이 있었는데, 그 커다란 함 아래 부분에 딱 스트라이크존 모양으로 구멍이 뚫여 있었다. 제대로 던지면 테니스공이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한 번도 야구장에 가서 경기를 본 적이 없었다. 학교 친구들이 당시 유행하던 프로야구단의 어린이 회원이 되어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야구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회원이라고’ 비웃으며 사실은 나도 그 옷이 무척이나 입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부모님께 프로야구단 회원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불펜의 시간]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중학생 때까지 야구를 했지만 우러러 보던 동창생 혁오의 투구를 보고 한계를 느껴 야구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이준삼, 학생때부터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구단에 입단하여 가장 촉망받는 선수로 기대를 받았던 권혁오, 초등학생때 오빠를 따라 야구를 시작했지만 여자 야구구단이 없어서 꿈을 포기하고 스포츠 신문기자가 된 이기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준삼은 회식을 하다가 ‘누구처럼 살고 싶냐’는 부장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끙끙대다가 우연히 TV에서 방송되는 중학교 동창 혁오의 경기를 보게 되고 얼떨결에 ‘야구선수 권혁오’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책을 덮고 나니 소설의 시작에 나온 준삼의 대답이 결국 이 소설의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혁오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혁오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후 준삼이 혁오처럼 야구부를 했었지만 야구부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경위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어진 혁오의 이야기는 준삼이 우상처럼 바라봤던 혁오가 어째서 선발투수로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계투로 등판하여 쿠쿠다스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지의 사연이 드러난다. 혁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진호와의 비극적인 사건은 혁오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혁오는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현실 속의 리그와 진호 리그를 만들어 남들에게는 승부조작으로 비춰질 수 있는 볼넷을 던져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은 기현은 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특종 기사를 터트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마 기현이 왜 그렇게 특종에 목을 매는지, 왜 스포츠 기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준삼은 언제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냐는듯이 6년차 회사원으로서의 일상을 잘 영위해 나간다. 하지만 불현듯 회사에서 풍겨오는 악취는 준삼의 내면적인 무엇인가가 서서히 부서지고 있음을 예고한다. 특히나 공채직원과 ‘여직원’의 관계애 대한 묘사는 정글같은 회사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신입 딱지를 떼고 승진할 때는 ‘여직원’보다 일을 못 하는 자신이 먼저 승진한 걸 미안해한다. 회사의 진급 시스템이 엉망이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나 그 분노의 크기는 언제나 작아서 하룻밤 자고 나면 사그라든다. 두 번째 승진 때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분노도 없다. ‘여직원’과 공채가 다른 체계에 속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승진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책임지고 일을 기획하는 위치가 되면 한 때 우러러봤던 선배,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줬던 ‘여직원’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단순 업무를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한계를 말한다.(79)”
이렇듯 악취를 풍기는 회사의 부조리함에 준삼이 동요하는 이유를 혁오는 야구팬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암시한다. “혁오는 오랫동안 수많은 야구팬을 접하면서 그들의 마음 저변에 삶에 대한 염증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확한 규칙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싫어서 규칙이 확실한 야구를 좋아하고, 삶의 불확실성을 잠시라도 피해보려고 야구장에 온다고 생각했다.(153)” 기현이 승부조작에 대한 제보자를 만나 특종거리를 갖고 편집장을 만나러 갔지만 언론, 구단, 브로커가 얽혀 있기에 기사를 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혁오를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혁오가 볼넷을 일부러 던지게 된 이유를 듣고 특종에 목을 매었던 비굴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준삼은 회사 생활이 지속될수록 깊어지는 뻔뻔함과 모욕감에 지쳐가는 상황 중에 구조 조정을 계기로 회사에서 내쳐지게 된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되 견뎌야 했다. 누가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175)”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준삼에게 자유를 준 사람은 바로 혁오였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210)” 준삼에게 악취와 모욕을 벗어날 자유를 준 혁오의 반향은 이제 기현을 향하게 된다.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만들고 싶어해. 작아도 단단한 거,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거. 네가 한 말은 그래서 멀어.(235)” 비록 준삼은 회사를 그만두고, 기현은 스포츠 기자에서 SNS 기자로 전락하고, 혁오는 프로구단에서 추방되어 독립구단의 투수코치가 되는 실패자가 되지만, 세 명의 주인공들이 선택한 길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자기 자신 안에 있음에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을 어서 끄집어 내기 위해 용기를 내라고 손짓하며 ‘단단한 공’을 나에게도 던져주고 있다.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251)”
야구를 너무나도 좋아해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소년이 시간이 많이 흘러 야구에 무관심에 어른이 되기까지 잡지 않고 놓아 버렸던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준삼은 두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나도 있다.(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