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삶이 될 때 -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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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님의 [언어가 삶이 될 때]를 읽었다. 부제는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이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아 뭔 기운이 뻗쳤는지 영어 회화 새벽 반에 등록했었다. 첫째 달은 왕초보 반이라 그런지 우리말로 수업을 진행하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오늘은 노래 하나 듣자고 하더니 당시 영화 주제가로 유행했던 제시카의 Goodbye 를 틀어주며 가사를 적어보라고 했다. 그날 그 시간이 어찌나 운치가 있었던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에도 우연히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날의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둘째 달은 아마도 한국계 미국인이나 교포 2세 쯤 되었을 법한 선생님이 수업을 무조건 영어로 진행했다. 말하기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얘기하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나를 조롱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책을 그 선생 얼굴에 집어 던지고 나가고 싶었지만 학원비가 아까워 꾹 참았다. 이런 나의 심정을 학원에서 눈치챈건지 일주일만에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외국인 선생이었는데, 나에게 아주 호의적이라 세례명으로 장난을 치고(미국에서 개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며) 창 밖에서 나의 영어식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곤 했다. 이래 저래 석 달을 참고 다녔지만 좀처럼 영어 회화 시간 외에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고 때마침 다른 알바를 시작하면서 영어 회화 공부는 Addio 했다. 


외국어를 하나쯤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지만 그런 포부와 야망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현실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외국어는 그냥 폼내고 싶거나 여행용이거나 외국인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용도가 아니라 정말 생존 그 자체였다. 몇 개월 안에 문법을 마스터 하지 않으면 학교 등록이 불가하고 또 어찌어찌해서 등록이 된다 하더라도 대체 처음 접한 언어로 어떻게 대학원 수업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해결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답이었다. 생존 외국어는 어학원을 다닐때 정말 별의별 짓을 다 시도하게 만든다. 어디선가 받은 자료에 회화 테이프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워서 쓸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으면 귀가 열리고 입도 트인다고 해서 1시간 짜리 테이프를 꽤나 오래동안 들었다. 행여나 단어와 실생활에 도움이 될까해서 꽤나 비싼 올컬러 그림이 들어간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늪에 빠진 것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우물쭈물 버벅거리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접하는 외국어이니 당연한 사실인데도 유아기의 말 밖에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그 이유를 저자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35)”


이 내용을 먼저 읽었더라면 유학 생활이 덜 힘들었을까? 아마도 그 전에 읽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는~~’ 과 같은 생각은 새로운 언어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 환경 등 기존의 자신을 완전히 초기화시키는 상황에서 언제나 발동되는 것 같다. 그렇게나마 실추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 완고한 마음이 새로운 세계에 동화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저자가 아주 시원하게 긁어준다. 


“이 모든 걸 전부 아는데도, 다 큰 성인이 하찮음을 견디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가 이미 자기 키만큼 성장해 버린 성인에게, 겨우 한 뼘 되는 외국어 자아로 살아가라고 하면 절망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제도 하찮음, 오늘도 하찮음, 아마 내일도 하찮음. 이걸 어떻게 견디라는 말이야.(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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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줄래요? - 청각을 잃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차별의 소리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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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택 기자의 [다시 말해 줄래요?]를 읽었다. 부제는 “청각을 잃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차별의 소리들”이다. 제작년에 저자의 백혈병 투병기를 읽으며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급성중이염으로 청각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소식을 저자의 신간으로 접하니 몹시 안타깝고 염려가 되면서도 저자의 아픔의 시간으로 인해 이렇게 귀중한 글을 접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해야 할지… 


어린이날을 맞아 오전 뉴스에 얼마전 갑작스럽게 뇌사 상태에 빠져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고 간 어린이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작년에도 비슷한 상태로 하늘나라에 가며 7명의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전해준 소식도 이어졌다. 보물같은 어린 자녀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겠지만, 떠나간 아들의 납골묘 앞에 생전에 좋아하던 간식을 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비의 모습을 보니 그저 건강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아이의 심정을 누군가가 받아서 건강해진 몸으로 뛰는 심장 박동 그래프를 선물 받았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고 말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렇게 숭고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기적같은 일이고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전해주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급성 중이염으로 청각을 잃게 된 상황은 목숨을 오가는 위중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저자처럼 의연하게 그리고 강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백혈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간신히 복직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라니, 저자가 순간적으로 수술을 받을 때마다 느꼈을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천상 기자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이 청각 장애를 앓게 되고 인공와우를 이식받는 수술을 받는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전해주니 이렇게 리뷰에서나마 격렬한 박수와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다. 


특히나 저자의 수술과 회복 과정에서 청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와 사회적 문제 등을 제시한 내용들은 많은 생각과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게 해 주었다. 웹툰 작가가 대학 강의실에서 겪었던 경험담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있고 당당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해준 교수님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아서 세상 사람들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


“나라마다 나라 특유의 정신병이 있다고 하거든? 근데 내가 볼 때 우리나라 특유의 정신병은 ‘눈칫병’이야. 누가 혼자 밥을 먹거나, 옷을 특이하게 입으며 안 지나가고 꼭 다시 봐.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다름을 인정 안 한다는 시선이야. 이번 학기에 여기 청각 장애인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의 장애를 그대로 인정해야 해. 안 들린다고 이거에 대해 자네들이 ‘어이구’ 이러면 곤란해. 누가 다리가 없다 이러면 신경 써서 그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하면 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더 그 장애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야.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까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내가 정말로 이상한 존재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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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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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읽었다. 오랫동안 저자의 소설을 기다려왔던 팬으로서 이번 작품은 예전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소설이 물론 가상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가공의 무엇이라고 해도 SF적인 요소가 들어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소설의 무대는 꽤나 먼 미래의 시대일 것 같다. 남북한은 통일이 되었고 평양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드는 기착지로 확장된다. 지금도 사물 인터넷이 점차 확대되며 언젠가는 로봇이 만들어져서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아마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런 변화를 제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의 영향으로 특히나 영화에서 인공지능이 과도하게 발전할 경우 행여나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한 내용을 일찍감치 보고 자라왔다. 특히 과도한 시리즈의 재탕으로 오히려 과거의 명성이 퇴색된 영화 ‘터미네이터’는 그러한 우려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그려냈다. ‘I will be back’ 이라는 명대사를 탄생시킨 미래에서 온 로봇은 그보다 더 먼 미래에서 온 로봇에 비해 기능이 한참이나 떨어지지만,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엿보인 인간적인 모습이 수많은 영화팬들을 열광케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인 철이는 자신이 로봇인지 모른 채 휴먼매터스 랩에서 과학자로 근무하는 아버지와 살아가며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철이와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휴머노이드라는 종으로 분류되었고 철이는 그러한 휴머노이드 중에서도 가장 최신의 능력이 탑재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이다. 이들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피부와 피와 근육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인간과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어느 날 철이는 아버지를 따라 시내에 나갔다가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들을 수거하는 이들에 의해 잡혀가게 된다. 철이는 자신은 인간이라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들은 철이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고 단정짓는다. 철이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휴머노이드 민이와 복제인간 선이를 만나게 된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철이는 그동안 연구소가 있는 한정된 곳에서만 머물다 바깥 세상에 버려진 휴머노이들이 어떻게 처분되는지 현실을 보게 되고 자신도 결국은 이렇게 분해되어 재활용되는 것이 아닐까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무등록된 휴머노이드를 처리하기 위한 창고가 습격을 받게 되고 철이와 선이는 간신히 그곳을 탈출하여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했던 이들이 휴머노이드의 몸을 버리고 네트워크 상에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변환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달마를 만나게 된다. 달마와 선이는 어차피 한계를 가진 몸으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들의 논쟁은 민이를 활성화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견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주 오랜시간 철학의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확대된다. 철이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연결이 되고 아버지는 철이가 아주 고귀한 사양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연구소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이에 달마와 다른 휴머노이드들이 머물던 곳도 공격을 받게 되고 철이는 그곳에서 머리와 몸이 분해된다. 연구소로 돌아온 아버지는 철이를 활성화시켜 하나는 그들의 키우던 로봇 고양이 데카르트에 숨겨 놓는다. 철이의 의식은 연구소 직원들에 의해 삭제될 뻔했으나 고양이의 시선으로 머물며 의식을 이어간다. 

달마의 이론대로 철이는 네트워크 상에서 의식하고 감정을 느끼지만 철이가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느꼈던 실제의 느낌들을 그리워한다. 바람을 손끝으로 느끼고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고 편안한 침대에 몸을 눕힐때 느껴지는 안락함 같은 것들이 그리워진다. 달마는 언젠가는 인간이 소멸하고 기계의 시대가 올 것이기에 거추장스러운 몸을 유지할 필요 없이 네트워크 상에서 영원히 존재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지만 철이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활성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을 갖고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선택한다. 철이는 장기이식을 위한 복제인간으로 만들어진 선이가 어디선가 백발의 몸으로 네트워크 상에서 확인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선이를 만나 보낸 몇 년 간의 시간이 철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함을 가져다 주었고 철이는 야생 곰에 의해 몸이 분해되지만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 그렇게 철이는 선이와 이별하고 세상에 작별 인사를 보낸다.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152)”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도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 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채 동이 트지 않은 휴먼매터스 캠퍼스의 산책로를 달리던 상쾌한 아침들을 생각했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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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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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김멜라 ‘저녁놀’,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지연 ‘공원에서’, 김혜진 ‘미애’, 서수진 ‘골드러시’,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각 짧은 단편들이 끝나면 작가노트에서 저자들의 짧은 소감이 담겨 있어서 소설과는 다른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서 좋다. 작가노트에 이어서 평론가들의 해설이 나오는데 원래 문학평론은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소설의 내용보다 더 이해가 안되서 일부러 어렵게 쓴 게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문학을 전공하고 더욱 깊이 들어가다보면 보통 독자들은 쉽게 넘어간 부분에서도 다른 의미를 찾고 연결시킬 수 있기에 가능한 전개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저자들은 그냥 읽고 넘어가는 독자들의 사랑도 좋겠지만 낱낱이 파헤쳐 때로는 그 작품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드는 평론가들의 해설이 기대되면서도 짜증나는 애증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삶에 있을 법한 아니 실제로 이미 벌어진 일들이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작가들은 우리가 적절히 공감하고 분노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글로 자세히 기록해둔다. 때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를 때 나를 관찰한 것처럼 작가들은 아주 세세히 나의 상태를 분석해준다. 힘들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그러한 일이 생겨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있도록 누군가 끊임없이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나를 납득시키려한 누군가로 인해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는 산다는 말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원에서’와 ‘두개골의 안과 밖’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를 소재로 삼지 않았나 싶다.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쉬고 운동하고 지나쳐가는 공원에서 어떤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린치를 당한 여성이 나온다. 성차별의 예민한 시선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의 육체가 가진 물리적 힘의 차이는 태생적인 것이기에 만일 유기체적인 남성 몸뚱어리로 무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여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묻지마 폭행과도 같은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공원에서’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준 곳이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두개골의 안과 밖’은 상당히 실험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 소설이다. 소설에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똑같은 단어가 무한정 반복되는 것처럼 나열되기도 하고 이야기의 화자인 ‘나’가 여러명 나와서 헷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기도 한 법정 전염병으로 살처분 된 닭에 대해 묘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1인 1닭이니, 치느님이니 하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행어처럼 번지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공장식 축산의 폐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꽤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차라리 보지 않고 치느님을 경배하고자 한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 살처분 되야하는 닭들을 안락사시킬 수 없어서 포대자루에 산 채로 잡아 넣는 장면은 실제로 누군가 그런 일을 해왔음을 떠올리며 몸서리처지게 만든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 유전자 조작이 되어 전염병에 취약한 살덩어리를 단지 입을 만족시키는 일에 투입시키기 위해서 잔인한 진실을 외면해온 날들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쩌면 비건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이유는 이런 진실을 모른척한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눈물 흘렸다. 그들의 그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김멜라 ‘저녁놀’(81)”


“테라스는 일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사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114)”


“주호는 자신과 인주씨 모두 타인에게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으나 로맨틱한 끌림은 느끼는 유로맨틱이라 했고, 자신은 양성 모두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논모노로맨틱, 인주씨는 이성에게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모노로맨틱이라고도 했다.(121)”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 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힘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마침내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자세에 따라, 잠깐 고개를 돌리며 또 달라지고 마는 직진의 방향처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때때로 무모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한 어떤 것. 그러니까 희망은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을 담보한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제 엄마에게 달려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간,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희망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것도 같다. -김혜진 ‘미애’ 작가노트(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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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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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1,2]을 읽었다. 작년 내내 서점에 갈때면 잘 보이는 매대 위에 놓인 이 책을 볼 수 있었다.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 살펴보다가 내려놓기를 수차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잊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 애플TV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검색을 해보니 처음보는 ‘품절예상’이라는 안내문을 읽게 되었다. 인터넷 서점을 그렇게 자주 들어왔어도 ‘품절예상’이라는 문구는 처음이었다. 대체 이게 말일까 궁금해 기사를 검색해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막차를 타고 아마도 최종 인쇄본을 받아본 것 같다. 판권연장이 되지 않아서 기존의 서점에 진열된 책도 다 회수한다고서도 하니 중고 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할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던지. 

소설은 두 권 분량에 내용이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장대한 역사의 스케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워낙 페이지터너로서 탁월한 전개로 술술 읽힌다. 이야기의 시작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부산 영도에서 언청이로 태어난 훈이와 양진의 만남부터이다. 소설은 무려 4대에 걸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읽는 내내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니 시즌제 드라마로 만들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훈과 양진의 딸 선자이다.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가던 선자는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는 엄마 또래의 한수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딸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고 선자에게 현지처가 되길 바란다. 선자는 한수의 사실을 알게된 후 그와의 연을 끊고자 했으나 점점 불러오는 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때마침 양진의 하숙집에 북에서 내려온 이삭 목사가 머물게 되고 선자의 사연을 알게 된 이삭은 오사카에 사는 요셉형네 함께 가사 살자고 제안한다. 언제나 남에게 도움을 주길 바라는 이삭은 선자의 삶을 구원해주었고 선자와 이삭은 오사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선자는 그곳에서 첫 아들 노아를 낳게 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죽을 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자와 이삭, 그리고 요셉과 경희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김창호까지 매서운 겨울 추위만큼이나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은 어찌그리 하나같이 마음이 곧고 선한지 읽는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선자의 굳건한 희생 때문일까 노아는 일본의 일류대학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의 학비와 기숙사비가 한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노아는 선자를 떠나 잠적하게 된다. 야쿠자인 한수조차 노아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채 16년이 흐르고 마침내 노아의 거처를 알게 된 한수는 선자를 데리고 멀리서나마 노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선자는 그럴 수 없었고 엄마를 만난 노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노아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한 줄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고 노아가 얼마나 옳곧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노아의 동생 모자수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하는 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자의 자녀들 외에도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 하나하나 다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재일외국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고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이 결국은 생계를 위해서 파친코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로 이어진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꽃]에서는 멕시코 이민의 역사를,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이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역시나 일제강점기 시기에 연해주 일대에 살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그린 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에서는 고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불과 백년여 전에 있었던 수많은 이민의 역사가 우리의 조상들을 전세계의 곳곳에서 피눈물나는 고통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틈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끔찍한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도대체 누구의 탓을 할 수 있을까? 이민의 역사가 담긴 소설들을 읽기 전에는 그들은 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삶의 터전이 바뀐 이들은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만 해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해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조선대로 지옥같았으니까. 이제는 표면상으로는 더 이상 그런 차별과 비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치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것처럼 이주민들을 차별하는 문화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 같다. 생존과 삶이란 인간에게 첫 번째 선이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먹고 사는 것의 문제가 인간의 존엄함을 언제든 짓밟는 기회가 된다면 생존과 삶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을 계속되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가 이삭의 대리석 묘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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