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언어가 삶이 될 때 -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평점 :
김미소 님의 [언어가 삶이 될 때]를 읽었다. 부제는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이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아 뭔 기운이 뻗쳤는지 영어 회화 새벽 반에 등록했었다. 첫째 달은 왕초보 반이라 그런지 우리말로 수업을 진행하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오늘은 노래 하나 듣자고 하더니 당시 영화 주제가로 유행했던 제시카의 Goodbye 를 틀어주며 가사를 적어보라고 했다. 그날 그 시간이 어찌나 운치가 있었던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에도 우연히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날의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둘째 달은 아마도 한국계 미국인이나 교포 2세 쯤 되었을 법한 선생님이 수업을 무조건 영어로 진행했다. 말하기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얘기하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나를 조롱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책을 그 선생 얼굴에 집어 던지고 나가고 싶었지만 학원비가 아까워 꾹 참았다. 이런 나의 심정을 학원에서 눈치챈건지 일주일만에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외국인 선생이었는데, 나에게 아주 호의적이라 세례명으로 장난을 치고(미국에서 개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며) 창 밖에서 나의 영어식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곤 했다. 이래 저래 석 달을 참고 다녔지만 좀처럼 영어 회화 시간 외에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고 때마침 다른 알바를 시작하면서 영어 회화 공부는 Addio 했다.
외국어를 하나쯤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지만 그런 포부와 야망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현실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외국어는 그냥 폼내고 싶거나 여행용이거나 외국인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용도가 아니라 정말 생존 그 자체였다. 몇 개월 안에 문법을 마스터 하지 않으면 학교 등록이 불가하고 또 어찌어찌해서 등록이 된다 하더라도 대체 처음 접한 언어로 어떻게 대학원 수업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해결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답이었다. 생존 외국어는 어학원을 다닐때 정말 별의별 짓을 다 시도하게 만든다. 어디선가 받은 자료에 회화 테이프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워서 쓸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으면 귀가 열리고 입도 트인다고 해서 1시간 짜리 테이프를 꽤나 오래동안 들었다. 행여나 단어와 실생활에 도움이 될까해서 꽤나 비싼 올컬러 그림이 들어간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늪에 빠진 것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우물쭈물 버벅거리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접하는 외국어이니 당연한 사실인데도 유아기의 말 밖에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그 이유를 저자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35)”
이 내용을 먼저 읽었더라면 유학 생활이 덜 힘들었을까? 아마도 그 전에 읽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는~~’ 과 같은 생각은 새로운 언어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 환경 등 기존의 자신을 완전히 초기화시키는 상황에서 언제나 발동되는 것 같다. 그렇게나마 실추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 완고한 마음이 새로운 세계에 동화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저자가 아주 시원하게 긁어준다.
“이 모든 걸 전부 아는데도, 다 큰 성인이 하찮음을 견디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가 이미 자기 키만큼 성장해 버린 성인에게, 겨우 한 뼘 되는 외국어 자아로 살아가라고 하면 절망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제도 하찮음, 오늘도 하찮음, 아마 내일도 하찮음. 이걸 어떻게 견디라는 말이야.(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