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1,2]을 읽었다. 작년 내내 서점에 갈때면 잘 보이는 매대 위에 놓인 이 책을 볼 수 있었다.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 살펴보다가 내려놓기를 수차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잊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 애플TV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검색을 해보니 처음보는 ‘품절예상’이라는 안내문을 읽게 되었다. 인터넷 서점을 그렇게 자주 들어왔어도 ‘품절예상’이라는 문구는 처음이었다. 대체 이게 말일까 궁금해 기사를 검색해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막차를 타고 아마도 최종 인쇄본을 받아본 것 같다. 판권연장이 되지 않아서 기존의 서점에 진열된 책도 다 회수한다고서도 하니 중고 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할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던지. 

소설은 두 권 분량에 내용이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장대한 역사의 스케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워낙 페이지터너로서 탁월한 전개로 술술 읽힌다. 이야기의 시작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부산 영도에서 언청이로 태어난 훈이와 양진의 만남부터이다. 소설은 무려 4대에 걸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읽는 내내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니 시즌제 드라마로 만들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훈과 양진의 딸 선자이다.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가던 선자는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는 엄마 또래의 한수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딸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고 선자에게 현지처가 되길 바란다. 선자는 한수의 사실을 알게된 후 그와의 연을 끊고자 했으나 점점 불러오는 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때마침 양진의 하숙집에 북에서 내려온 이삭 목사가 머물게 되고 선자의 사연을 알게 된 이삭은 오사카에 사는 요셉형네 함께 가사 살자고 제안한다. 언제나 남에게 도움을 주길 바라는 이삭은 선자의 삶을 구원해주었고 선자와 이삭은 오사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선자는 그곳에서 첫 아들 노아를 낳게 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죽을 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자와 이삭, 그리고 요셉과 경희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김창호까지 매서운 겨울 추위만큼이나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은 어찌그리 하나같이 마음이 곧고 선한지 읽는 내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선자의 굳건한 희생 때문일까 노아는 일본의 일류대학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의 학비와 기숙사비가 한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노아는 선자를 떠나 잠적하게 된다. 야쿠자인 한수조차 노아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채 16년이 흐르고 마침내 노아의 거처를 알게 된 한수는 선자를 데리고 멀리서나마 노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선자는 그럴 수 없었고 엄마를 만난 노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노아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한 줄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고 노아가 얼마나 옳곧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노아의 동생 모자수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하는 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자의 자녀들 외에도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 하나하나 다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재일외국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고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이 결국은 생계를 위해서 파친코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로 이어진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꽃]에서는 멕시코 이민의 역사를,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이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역시나 일제강점기 시기에 연해주 일대에 살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그린 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에서는 고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불과 백년여 전에 있었던 수많은 이민의 역사가 우리의 조상들을 전세계의 곳곳에서 피눈물나는 고통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틈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끔찍한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도대체 누구의 탓을 할 수 있을까? 이민의 역사가 담긴 소설들을 읽기 전에는 그들은 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삶의 터전이 바뀐 이들은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만 해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해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조선대로 지옥같았으니까. 이제는 표면상으로는 더 이상 그런 차별과 비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치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것처럼 이주민들을 차별하는 문화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 같다. 생존과 삶이란 인간에게 첫 번째 선이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먹고 사는 것의 문제가 인간의 존엄함을 언제든 짓밟는 기회가 된다면 생존과 삶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을 계속되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가 이삭의 대리석 묘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