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롤! 오늘의 젊은 작가 35
정지돈 지음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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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작가의 [… 스크롤!]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5번째 작품이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무슨 얘기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을 접했다. 난해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쫓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의 전환 속에서 그래도 나와 프랜과 정키와 지우가 등장하면 그래도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뜻하는 바도 전체적인 내용과 연관지어서 바로 설명하기 힘들다. 이야기의 말미에 정키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 미국에서 머물 호텔을 검색할 때에 스크롤을 내렸다는 표현 외에는 제목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은 없던 것 같다. 휠마우스가 나오기 전에는 스크롤을 내리기 위해서는 클릭한 채로 마우스를 아래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휠마우스가 보편화된 지금은 검지 하나면 마치 속독을 하듯이 검색 창에 나온 내용을 순식간에 훓으며 습관적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책과 검색창의 텍스트는 똑같이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있지만, 책과 서류로 텍스트를 접할 때에는 스크롤이 불가능하다. 하이퍼링크로의 전환이 불가능하기에 책을 내려놓기 전에는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다. 하지만 검색창을 통해 전해지는 텍스트는 나를 집중하기 힘들게 만드는 수많은 배너들을 포함한다. 배너들은 현란한 몸짓으로 반짝거리며 나의 마우스 클릭을 종용한다. 검색창의 텍스트에 집중하기 힘들어지면 순식간에 변화된 배너는 폭발하기 직전의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것 같아 결국은 검색홈으로 돌아가 새로운 텍스트를 클릭하게 된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터넷 사용 시간만 늘어나고 나의 눈만 충혈될 뿐이다. 


담론(narrative)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있다. 먼저 인간 행동에 대해 그동안 쌓아온 윤리적인 기준들이 있다. 이것은 꼭 해야만 하는 것과 저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통 진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선과 악이라고 규정하기도 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은 보편 진리에 해당되는 가르침을 따르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 진리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런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어왔고 지키도록 강요했기에 이제는 그 강요된 진리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이렇게 생겨난 상대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려 했다. 그래서 이런 난관을 해쳐나가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으로 담론이 제시되었다.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 윤리가 왜 인간에게 존재하고 지켜져 왔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서 관계를 맺어왔고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문제점들을 극복해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소통이란 존재할 수 없었고 언어가 서로를 기만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극단의 감정에 치우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담론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그 이야기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세대들이 강요해온 수많은 사회적 규범들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거의 세대의 이야기는 지금의 세대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없기에 과거의 언어로 만들어낸 규범들은 언제든 해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부수고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이들의 권리이며 그렇게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때 자신의 존재를 규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과거의 이야기를 전하는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어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일이기에 오히려 제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혼돈의 경험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인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경험, 감정적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 도덕적 이해를 벗어난 경험. 혼돈을 경험한 사람들이 음모론을 상상하게 되지.(60)”


“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사소한 논쟁 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71)”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부르주아적이지 않은 것이죠. 예술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예술 같아 보이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키치죠. 예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87-88)”


“우울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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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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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클린 부블리츠의 [네 이름은 어디에(Before you knew my name)]를 읽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한 ‘살인의 추억’은 이게 그냥 영화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당시에 여전히 진범이 잡히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사실이 더욱 경악스러웠다. 최근에 진범이 잡히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이 국가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는 뉴스도 보도 되었지만 그 많은 돈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버리고 송두리째 날아간 시간은 그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고 또한 뉴스에서는 보도되지 않은 무고한 한 사람이 겪어낸 인권유린의 시간들을 어찌 다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흉흉한 사건들이 잊힐 만하면 반복되기에 언제부터인지 피해자를 탓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지만 유사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다. 주인공 앨리스는 17살로 엄마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후견인의 집에서 머물며 불행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 위스콘신의 시골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앨리스는 잭슨 선생님이 사진 모델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보고 그의 모델이 되어 돈을 마련하고자 한다. 하지만 앨리스는 잭슨 선생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고 앨리스가 18세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잭슨은 감옥에 가게 될까 두려워 오갈데 없는 앨리스를 쫓아낸다. 단돈 600달러와 잭슨 선생의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뉴욕으로 떠난 앨리스는 과연 이 거대한 도시에 자신이 머물 곳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노아를 환대를 받게 된다. 앨리스가 뉴욕으로 온 날 멜버른에 살던 36살의 루비 또한 뉴욕으로 오게 된다. 루비는 결혼을 앞두고 약혼식을 한 애시와 불륜관계를 유지하다 괴로워하며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혹시나 애시가 파혼을 하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지내지만 애시는 루비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려고만 할 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루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애시를 떨쳐내지 못한 루비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거지같은 현실을 잊고자 억수같이 비가 오는 날 조깅을 하러 공원에 나가게 된다. 애시는 공원 아래의 자갈밭에서 불어난 물에 엎어져 있는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앨리스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받아준 노아의 집에서 생애 처음으로 안락함을 맛보며 조금씩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사진 학교에 관심을 보이던 앨리스를 지켜본 노아는 학비를 대주며 앨리스를 응원해준다. 앨리스는 사진 학교에 보란듯이 입학하고 싶은 마음에 멋진 사진을 찍고 싶어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공원에 나간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터 앨리스가 살해되고 앨리스는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의 모습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루비의 곁을 맴돌며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한다. 마치 한이 맺혀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앨리스는 루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힘껏 애쓴다.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후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취하지 못한 루비는 결국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모임에 갔다가 데스클럽의 회원들을 만나게 된다. 레니, 수, 조시는 죽을 위기에 처했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적인 모임을 지속하고 있었다. 루비는 데스클럽에서 많은 위로를 받게 되고 조시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지만 조시가 아직 법적 결혼 상태를 유지한 채 깊은 만남을 갖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루비는 데스클럽을 멀리하며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장소를 서성이게 된다. 혼란스러운 루비는 그곳에서 치근대는 톰을 만나게 되고 그가 실수로 내뱉은 말을 통해 경찰에게 유력한 정보를 알려주게 된다. 톰은 앨리스를 살해한 후 증거를 찾기 위해 혹은 루비같이 너무나도 쉽게 살해한 대상을 고르기 위해 다시 그 장소를 찾게 된 것이다. 앨리스가 사진을 찍기 위해 비가 퍼붓는 날 허드슨 강가를 찾은 이유를 톰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루비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경찰의 조사 중에 앨리스를 죽인 라이카 카메라의 렌즈를 찾게 되고 톰은 붙잡히게 된다. 


살인이 발생한 여느 추리소설의 형태처럼 범인을 추적하는 단계가 치밀하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자인 앨리스의 관점에서 앨리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앨리스가 살해된 후 신원을 알 수 없어 그저 제인이라는 가명으로만 사건이 보도되었기에 범인을 찾지 못했다면 앨리스의 죽음은 그냥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익명의 죽음으로 잊혀질 수 있었다. 앨리스를 죽인 톰이 루비를 만났을 때 했던 말 중의 하나는 앞서 언급한 흉악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단골 대사이다. “그러니까 위험하게 이 늦은 시간에, 이 위험한 장소에 왜 여자가 겁도 없이 혼자 다니나요?” 죽음과 범죄의 탓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덮어씌우는 형국이다. 마치 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위험한 곳이고 어디서든지 그렇게 살인과 같은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니 알아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세상의 반인 여성들이 가장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비겁한 변명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불의한 프레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력되어 가족 중의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갑자기 튀어나와 버린다. 우리는 왜 약자에게 피해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네 탓’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걱정되서 그러는 거라고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슬픔이 속삭임처럼 조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이야. 슬픔이 마음속에서 요동치든 강둑을 타고 넘을 만큼 불어난 강물처럼 넘쳐흐르든 잔잔한 수면 위에 무감각하게 떠있든 결국 다 같은 감정이고,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220)”


“루비와 조시를 볼 때 초조감과 기대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많이 다른 감정이야. 초조감은 흐르는 강물이라면 기대감은 섬세하게 하나씩 톡톡 터지는 작은 물방울이야. 기대감은 우리의 몸에서 유리잔에 담긴 샴페인처럼 보석을 닮은 금빛 기포들을 자꾸만 위로 솟아오르게 해주지.(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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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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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작가의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을 읽었다.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장례식장을 그 누구보다 많이 가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많이 조문을 하며 고인을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려도 상주를 마주했을 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어쩔 때는 그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조문을 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조문을 마치면 바닥에 놓인 네모진 상 앞에 앉자마자(요즘은 식탁으로 많이 바뀌고 있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음식을 일회용 접시에 담아 내어준다. 식사를 하겠다면 육개장에 밥 그리고 편육, 김치, 오징어, 견과류나 멸치 볶음, 떡 등이 올라온다. 식탁에는 일회용 숟가락과 젓가락, 종이컵과 티슈가 놓여 있고, 음료수와 물도 놓여 있곤 한다. 에너지 드링크가 놓여 있기도 하고 간혹 술도 미리 가져다 주기도 한다. 


몇년 전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불과 20여년 전에 각자 살던 집에서 상을 치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노란색 근조 등을 달아놓고 아파트에서도 집 앞에 천막을 치고 밤을 세워가며 장례를 치뤘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놀람도 거부도 아닌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대부분은 아예 관심도 없어보였다. 그런데 그런 때가 진짜 바로 얼마 전이었다. 밤을 세워가며 사람들이 떠들고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며 소란을 피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란 근조등을 보며 다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생면부지의 누구의 가족이라도 나의 귀중한 이틀 정도는 견딜 수 있는 내공이 있었다. 그렇게 아파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누군가의 장례를 도와줄 때 음식을 날라주는 일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의 주인공이 재희와 마리는 장례식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장례식장 알바는 일하는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거나 예고할 수 없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마리는 알바를 마치고 나면 동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끊겨서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세곤 한다. 화자인 ‘나’ 재희는 마리와 가까워지며 마리가 혼자 밤을 세지 않도록 함께 있어준다. 오래된 스쿠터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알바를 지속하는 그들의 삶을 위로받는다. 얼핏보면 아무런 미래에 대한 계획없이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10대도 아닌 20대 청년들의 방황기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삶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 지금 청년들의 실업과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알바를 전전하는 심각한 상황을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녹아내며 또한 재희와 마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아마도 분명히 자기 주변의 멀쩡한 청년 두 명이 부정기적인 장례식장 알바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젊은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해? 혹은 제대로된 직장을 잡아야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면 안되지. 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수없이 갈 수 밖에 없는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도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슬퍼할 기운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그 누군가가 묵묵히 음식을 날라주고 치워주기에 우리는 우아하게 조문도 하고 눈물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슬픔에 휩싸인 상주가 음료수나 밥을 챙기는 상황은 얼마나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족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격렬히 응원해주는 것이 가까운 사람들의 몫이다. 장례때 일어하는 주변 일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다면 약소한 부의금으로나마 상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다. 


재희가 장례식장을 떠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신과 목조르는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누나를 죽인 것은 아닐까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하얀 뱀을 보며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내린 삶을 살던 재희는 마리와와 만남을 통해 누나의 사인을 직접 확인할 용기를 얻게 되고 누나는 소아암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재희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마리와 함께 상조회사에 입사 지원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쉼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모두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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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울 지망생입니다 -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
김미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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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향 님의 [탈서울 지망생입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이다. 따뜻한 남쪽 섬 제주가 없었다면 끔찍하도록 지속되는 코로나 시국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굳은 맘 먹고 1시간만 마스크 쓰고 참으면 신록이 부르짖는 땅에서 마음껏 심호흡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팍팍한 도시 생활을 견디게 해 준다. 제주에서 몇 달간 머물때 그것도 중산간지대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중산간지대는 따뜻한 남쪽 나라가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과 비슷한 기온대가 유지되고 서울처럼 열섬 현상이 없어서 그런지 비가 오거나 찬 바람이 불면 기온이 수시로 변화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산간지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제주시나 서귀포 같은 도시 같은 마을은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피해 동굴에 숨거나 높은 지대로 몸을 숨긴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호강하고 있다는 말이 당연하고 어디 감히 불편하고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라는 노랫말의 ‘입영열차 안에서’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군 복무 기간이 3년이었지만 지금은 그에 반에 해당되는 18개월을 복무한다. 하지만 3년 군생활을 할때의 청년과 18개월 군복무 하는 청년이 느끼는 고통과 답답함은 비슷해보인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던 세대의 어르신들은 지금의 풍요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의 불평과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배만 곯지 않아도 좋겠다는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을 때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는다고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게 너무나도 상대적이라 부의 척도만으로는 행복의 크기를 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전후 시대도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독재시가 아님에도 지금은 지금대로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화두가 아마도 거주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내 집 마련은 과거 부모님 시대에도 중요한 목표였지만 당시에는 알뜰살뜰 아끼고 모으면 얼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주 소수의 고소득 직업을 갖고 있지 않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직장 생활의 수입을 원천으로 한 저축으로는 절대로 수도권의 괜찮은 곳에 자가를 마련할 수 없는 구조이다. 


얼마 전 읽은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에서 청년들이 대체 왜 집을 나와 스타벅스와 같은 대형 프렌차이즈에서 죽때리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 생각난다. 꼰대 같은 아니 대체로 이미 사회적 기반을 갖고 안정적으로 사는 세대의 어른들은 별 생각없이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청년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대체 왜 그들은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에 감염될지도 모르는 시기에 답답하게 마스크를 쓰면서까지 카페에 머무는 것일까? 어쩌면 그 자리에 있는 상당수의 청년들이 고시원에 머물거나 원룸 생활을 하거나 문화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낙후된 지역에서 살거나 도저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는 공간에 살거나 할지 모른다. 그들은 대형화된 익명의 존재로 편안함을 누리며 어느 정도의 안락함도 보장된 나만의 공간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약 5천원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에게 인간다운 삶을 선사할 수 없다면 도저히 이 도시에서의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때문일 수도 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서로가 어찌하지 못할 때에는 유의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부유한 지위에 오른 작금의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그래서는 안되는 말이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신종 계급이 생겨났으며 수저론이 대두된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선사시대의 말처럼 진부하고 불가능한 속담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서울에서 취직하여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에는 꽤나 많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서울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니까 그 외 다른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시작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억울함은 대체 누가 해소해 줄 것인가? 탈서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불균형적인 지역발전과 서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을 지방이라는 말로 격하시키온 수십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격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시대의 처절함을 대변한 저자와 지방러들의 조언은 현 시대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슬프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언젠가는 탈서울 지망생들이 점점 늘어나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든 우리가 맘편히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그 많은 예쁜 로컬 카페를 놔두고 스타벅스에 발길이 닿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익숙함을 버리지 못해서, 사람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냥 습관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음료의 퀄리티와 노트북 하기 편한 인터넷 환경, 가사 없는 편안한 음악 소리와 직원의 기분 좋은 무관심, 적당히 유행에서 뒤처지지 않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스타벅스. 그곳만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67)”


“어느날,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하루는 배우 한 명이 출연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오피스텔에서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출연자들은 성수동 근처에 무슨 식당이 맛이 있고, 어디 카페가 분위기가 좋다, 어디 가면 무엇을 즐길 수 있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동네 수다’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솔직히 성수동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를 그런 식의 대화인데, 이걸 보는 전국의 젊은 1인 가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대화가 재미있을까? 힙하다는 연예인들이 나와 힙한 생활 방식에 대해 수다를 떠는 공중파 프로그램을 볼 때 서울에 살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비수도권에 사는데, 수도권이라도 성수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를 수 있는데… 

서울의 한 동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들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누군가는 매번 TV를 틀때마다 이방인처럼 느끼겠구나, ‘문화 소외’를 느끼겠구나 싶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은 주변부가 되어버리고 마는 이런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서울이 아닌 곳을 자기 삶의 근거지로 마음 편히 삼을 수 있을까.(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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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괜찮은 해피엔딩
이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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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님의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어느 순간 눈물이 맺히고, 놀람의 연속이기도 하고, 저자와 함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종국에 가서는 따뜻한 손길로 마음의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오래전 뉴스 기사를 통해서 그리고 저자의 첫 책 소식을 통해서 사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은 첫 느낌은 ‘안타깝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그랬다. 엄청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사고가 정지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섣불리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안다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한 채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년 전에 외상 후 스트레스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상처가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 보이지 않게 마음 속에 남아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크던 작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기에 어떤 경우에는 살아가는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운전을 하다가 자동차 접촉 사고만 나도 며칠 동안은 운전을 할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스트레스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일반화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분명 예전에도 트라우마로 인해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마음과 정신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을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다가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사람들이 마음 돌보기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저자의 글을 통해서 외상 후 스트레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상 후 성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수많은 사건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에 커다란 희망을 주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난 시간을 떠올릴수록 후회가 되고 다시 돌이키고 싶은 일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때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A라는 선택이 아니라, B라는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라는 하나마나 한 후회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한 후회의 시간이 지속되면 무력함에 빠져들고 세상만사가 무미건조해진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은 이미 그 일을 경험하고 뼈저리게 아팠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이유를 찾아내고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 우리 삶의 굴곡진 여정에서 언제든 비슷한 일이 생겨날 수 있고 그러한 일들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나를 성장시킨 것 같다. 


새 책이 나오기까지 공부하며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저자의 시간은 타인의 일이라고 잊고 지내왔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커다란 선물을 전해준 것 같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저자가 학위를 받기 위해 보낸 1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기에, 저자가 준비한 선물을 기꺼이 기쁘게 받을 수 있고 또 저자의 선물에 감동받은 우리들은 격렬한 박수를 보내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길 바라며 또 다른 책을 기대해 본다.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아니면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은 더뎠으며 몸이 아픈 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듯 헤어졌다. 나는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그때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머무르지 않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 한참 시간이 더 흐르니 그날 밤의 사고는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힌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치 못해서 피할 수 없었고 반갑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내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뒤통수를 잠시 째려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툭툭 털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 것처럼, 사고와 나 역시 그렇게 부딪혀 만났지만 툭툭 털고 헤어져 나는 그 다음의 내 시간을 살았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21)”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저항도 하고, 한 번 넘어졌더라도 또다시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일은 우리 자신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 다른 인생으로 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사람들이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성장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이전에 못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자기효능감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도 알게 되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더 고마워하고, 괴로움을 겪는 타인에게 더 잘 공감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감사하며, 인생의 우선순위가 변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합니다.(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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