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서울 지망생입니다 -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
김미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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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향 님의 [탈서울 지망생입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이다. 따뜻한 남쪽 섬 제주가 없었다면 끔찍하도록 지속되는 코로나 시국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굳은 맘 먹고 1시간만 마스크 쓰고 참으면 신록이 부르짖는 땅에서 마음껏 심호흡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팍팍한 도시 생활을 견디게 해 준다. 제주에서 몇 달간 머물때 그것도 중산간지대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중산간지대는 따뜻한 남쪽 나라가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과 비슷한 기온대가 유지되고 서울처럼 열섬 현상이 없어서 그런지 비가 오거나 찬 바람이 불면 기온이 수시로 변화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산간지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제주시나 서귀포 같은 도시 같은 마을은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피해 동굴에 숨거나 높은 지대로 몸을 숨긴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호강하고 있다는 말이 당연하고 어디 감히 불편하고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라는 노랫말의 ‘입영열차 안에서’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군 복무 기간이 3년이었지만 지금은 그에 반에 해당되는 18개월을 복무한다. 하지만 3년 군생활을 할때의 청년과 18개월 군복무 하는 청년이 느끼는 고통과 답답함은 비슷해보인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던 세대의 어르신들은 지금의 풍요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의 불평과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배만 곯지 않아도 좋겠다는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을 때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 반찬이 놓인 밥을 먹는다고 엄청난 행복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게 너무나도 상대적이라 부의 척도만으로는 행복의 크기를 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전후 시대도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독재시가 아님에도 지금은 지금대로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화두가 아마도 거주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내 집 마련은 과거 부모님 시대에도 중요한 목표였지만 당시에는 알뜰살뜰 아끼고 모으면 얼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주 소수의 고소득 직업을 갖고 있지 않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직장 생활의 수입을 원천으로 한 저축으로는 절대로 수도권의 괜찮은 곳에 자가를 마련할 수 없는 구조이다. 


얼마 전 읽은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에서 청년들이 대체 왜 집을 나와 스타벅스와 같은 대형 프렌차이즈에서 죽때리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 생각난다. 꼰대 같은 아니 대체로 이미 사회적 기반을 갖고 안정적으로 사는 세대의 어른들은 별 생각없이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청년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대체 왜 그들은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에 감염될지도 모르는 시기에 답답하게 마스크를 쓰면서까지 카페에 머무는 것일까? 어쩌면 그 자리에 있는 상당수의 청년들이 고시원에 머물거나 원룸 생활을 하거나 문화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낙후된 지역에서 살거나 도저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는 공간에 살거나 할지 모른다. 그들은 대형화된 익명의 존재로 편안함을 누리며 어느 정도의 안락함도 보장된 나만의 공간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약 5천원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에게 인간다운 삶을 선사할 수 없다면 도저히 이 도시에서의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때문일 수도 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서로가 어찌하지 못할 때에는 유의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부유한 지위에 오른 작금의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그래서는 안되는 말이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신종 계급이 생겨났으며 수저론이 대두된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선사시대의 말처럼 진부하고 불가능한 속담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서울에서 취직하여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에는 꽤나 많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서울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니까 그 외 다른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시작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억울함은 대체 누가 해소해 줄 것인가? 탈서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불균형적인 지역발전과 서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을 지방이라는 말로 격하시키온 수십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격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시대의 처절함을 대변한 저자와 지방러들의 조언은 현 시대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슬프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언젠가는 탈서울 지망생들이 점점 늘어나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든 우리가 맘편히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그 많은 예쁜 로컬 카페를 놔두고 스타벅스에 발길이 닿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익숙함을 버리지 못해서, 사람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냥 습관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음료의 퀄리티와 노트북 하기 편한 인터넷 환경, 가사 없는 편안한 음악 소리와 직원의 기분 좋은 무관심, 적당히 유행에서 뒤처지지 않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스타벅스. 그곳만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67)”


“어느날,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하루는 배우 한 명이 출연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오피스텔에서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출연자들은 성수동 근처에 무슨 식당이 맛이 있고, 어디 카페가 분위기가 좋다, 어디 가면 무엇을 즐길 수 있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동네 수다’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솔직히 성수동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를 그런 식의 대화인데, 이걸 보는 전국의 젊은 1인 가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대화가 재미있을까? 힙하다는 연예인들이 나와 힙한 생활 방식에 대해 수다를 떠는 공중파 프로그램을 볼 때 서울에 살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비수도권에 사는데, 수도권이라도 성수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를 수 있는데… 

서울의 한 동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들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누군가는 매번 TV를 틀때마다 이방인처럼 느끼겠구나, ‘문화 소외’를 느끼겠구나 싶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은 주변부가 되어버리고 마는 이런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서울이 아닌 곳을 자기 삶의 근거지로 마음 편히 삼을 수 있을까.(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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