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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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클린 부블리츠의 [네 이름은 어디에(Before you knew my name)]를 읽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한 ‘살인의 추억’은 이게 그냥 영화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당시에 여전히 진범이 잡히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사실이 더욱 경악스러웠다. 최근에 진범이 잡히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이 국가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는 뉴스도 보도 되었지만 그 많은 돈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버리고 송두리째 날아간 시간은 그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고 또한 뉴스에서는 보도되지 않은 무고한 한 사람이 겪어낸 인권유린의 시간들을 어찌 다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흉흉한 사건들이 잊힐 만하면 반복되기에 언제부터인지 피해자를 탓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지만 유사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다. 주인공 앨리스는 17살로 엄마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후견인의 집에서 머물며 불행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 위스콘신의 시골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앨리스는 잭슨 선생님이 사진 모델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보고 그의 모델이 되어 돈을 마련하고자 한다. 하지만 앨리스는 잭슨 선생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고 앨리스가 18세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잭슨은 감옥에 가게 될까 두려워 오갈데 없는 앨리스를 쫓아낸다. 단돈 600달러와 잭슨 선생의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뉴욕으로 떠난 앨리스는 과연 이 거대한 도시에 자신이 머물 곳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노아를 환대를 받게 된다. 앨리스가 뉴욕으로 온 날 멜버른에 살던 36살의 루비 또한 뉴욕으로 오게 된다. 루비는 결혼을 앞두고 약혼식을 한 애시와 불륜관계를 유지하다 괴로워하며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혹시나 애시가 파혼을 하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지내지만 애시는 루비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려고만 할 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루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애시를 떨쳐내지 못한 루비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거지같은 현실을 잊고자 억수같이 비가 오는 날 조깅을 하러 공원에 나가게 된다. 애시는 공원 아래의 자갈밭에서 불어난 물에 엎어져 있는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앨리스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받아준 노아의 집에서 생애 처음으로 안락함을 맛보며 조금씩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사진 학교에 관심을 보이던 앨리스를 지켜본 노아는 학비를 대주며 앨리스를 응원해준다. 앨리스는 사진 학교에 보란듯이 입학하고 싶은 마음에 멋진 사진을 찍고 싶어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공원에 나간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터 앨리스가 살해되고 앨리스는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의 모습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루비의 곁을 맴돌며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한다. 마치 한이 맺혀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앨리스는 루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힘껏 애쓴다.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후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취하지 못한 루비는 결국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모임에 갔다가 데스클럽의 회원들을 만나게 된다. 레니, 수, 조시는 죽을 위기에 처했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적인 모임을 지속하고 있었다. 루비는 데스클럽에서 많은 위로를 받게 되고 조시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지만 조시가 아직 법적 결혼 상태를 유지한 채 깊은 만남을 갖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루비는 데스클럽을 멀리하며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장소를 서성이게 된다. 혼란스러운 루비는 그곳에서 치근대는 톰을 만나게 되고 그가 실수로 내뱉은 말을 통해 경찰에게 유력한 정보를 알려주게 된다. 톰은 앨리스를 살해한 후 증거를 찾기 위해 혹은 루비같이 너무나도 쉽게 살해한 대상을 고르기 위해 다시 그 장소를 찾게 된 것이다. 앨리스가 사진을 찍기 위해 비가 퍼붓는 날 허드슨 강가를 찾은 이유를 톰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루비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경찰의 조사 중에 앨리스를 죽인 라이카 카메라의 렌즈를 찾게 되고 톰은 붙잡히게 된다. 


살인이 발생한 여느 추리소설의 형태처럼 범인을 추적하는 단계가 치밀하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자인 앨리스의 관점에서 앨리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앨리스가 살해된 후 신원을 알 수 없어 그저 제인이라는 가명으로만 사건이 보도되었기에 범인을 찾지 못했다면 앨리스의 죽음은 그냥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익명의 죽음으로 잊혀질 수 있었다. 앨리스를 죽인 톰이 루비를 만났을 때 했던 말 중의 하나는 앞서 언급한 흉악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단골 대사이다. “그러니까 위험하게 이 늦은 시간에, 이 위험한 장소에 왜 여자가 겁도 없이 혼자 다니나요?” 죽음과 범죄의 탓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덮어씌우는 형국이다. 마치 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위험한 곳이고 어디서든지 그렇게 살인과 같은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니 알아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세상의 반인 여성들이 가장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비겁한 변명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불의한 프레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력되어 가족 중의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갑자기 튀어나와 버린다. 우리는 왜 약자에게 피해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네 탓’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걱정되서 그러는 거라고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슬픔이 속삭임처럼 조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이야. 슬픔이 마음속에서 요동치든 강둑을 타고 넘을 만큼 불어난 강물처럼 넘쳐흐르든 잔잔한 수면 위에 무감각하게 떠있든 결국 다 같은 감정이고,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220)”


“루비와 조시를 볼 때 초조감과 기대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많이 다른 감정이야. 초조감은 흐르는 강물이라면 기대감은 섬세하게 하나씩 톡톡 터지는 작은 물방울이야. 기대감은 우리의 몸에서 유리잔에 담긴 샴페인처럼 보석을 닮은 금빛 기포들을 자꾸만 위로 솟아오르게 해주지.(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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