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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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의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읽었다. 부제는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이다. 어릴때에는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전문성을 가진 직업을 갖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부와 명예를 가져오는 업적까지 쌓게 된다면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괜찮은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겉으로 보여지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처럼 정보 공유가 쉽고 빠른 시대를 살지 않았다면 어릴때의 생각이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의 추문과 심지어 내가 알고 지냈던 존경받았던 누군가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면서 성공한 삶이란, 잘 살아온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시쳇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어?’가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심지어 패륜아 같은 악질적인 사람도 1대1 만남이 아닌 대중적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면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거나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180도 돌변하여 금수만도 못한 말과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CCTV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힘든 첨단 사회가 되어갈수록 공적인 증거가 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는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진짜 존경하고 추앙받아 마땅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사각지대에서도 한결같은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선택적으로 ‘나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함께 할 때의 소속감과 공감대 형성이 주는 따뜻함과는 반대로 혼자 일 때는 나른함, 게으름, 무기력함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다. 이런 피상적인 모습 말고 앞서 말한 사각지대의 한결같은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시간을 잘 마주해야 한다.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내놓은 위대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일상적인 모습은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요즘은 SNS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일상의 자세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도 하지만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멋지고 예쁘고 힙하고 쿨하고 뭔가 그럴싸한 일상들만 공개할 뿐이다. 


인간은 언제 가장 뿌듯한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일까? 명품으로 제 몸을 도배한다 한들 또 다른 신제품이 나오게 되고 자기보다 누군가가 앞서 레어템을 얻게 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누군가의 칭찬도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잘했는데, 내가 이렇게 성실했는데, 내가 너에게 이렇게 잘해줬는데,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의 칭찬과 고마움의 말들을 금방 휘발되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때 가장 큰 기쁨과 충만함을 얻게 된다. 나 자신이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은 금방 소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기특한 행동을 위해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너무나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나 혼자’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의 명화 속에 담겨진 화가와 얽힌 속내들을 읽으며 놀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애써 감추려고 지하 창고의 먼지가 가득쌓인 두툼한 열쇠로 봉인된 상자를 열어젖힌 것처럼 차라리 몰랐다면 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이렇기 긴 시간을 너무나도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일까?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하니까 되던데’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쌓아왔던 시간들이 갑작스러운 쓰나미처럼 우리의 일상을 덥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특히나 이 책은 아주 오랜시간 견고하게 쌓아온 가부장제의 처절한 민낯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느냐고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하라며 경종을 울린다. 특히나 저자의 글 속에서 드러난 가부장제로 인해 벌어진 지난한 역사의 반복은 어느 국가의, 어느 공동체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바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자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과연 가부장제의 이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나? 성별에 지정된 역할과 행위를 지지하며 우위를 점하고 발판으로 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는가? 


책 속에 등장한 유명한 화가들이 뮤즈라는 미명하에 너무니없는 나이차를 넘어서는 결혼을 하고 어린 배우자를 모델로 수십년간 세운 일들과 충분한 교육과 지원이 있었다면 배우자 못지 않게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저 남편의 내조자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의 역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저자의 강렬한 표현 중의 하나인 ‘인생을 갈아넣었다’라는 말을 통해 한 명의 화가가 한 평생 그림에 올곳이 집중할 수 있기 위한 아내의 헌신적인 가사 노동을 비롯한 제반 관련 일들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그럼에도 온 삶을 갈아넣은 아내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잔혹한 현실을 드러나게 해 준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모든 여자들은 샤프롱(chaperon)이라고 불렸던 동반자 없이는 아예 이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여자에게는 집 밖에서 혼자 있을 권리도, 혼자서는 이동할 자유도 없었던 것이다.(194-195)”


“21세기 한국에 사는 블루 스타킹의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인기가 없다’ ‘너무 잘난 여자는 적을 만들고 남자들도 피곤해한다’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사회의 악평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쿠션어’를 사용한다. 쿠션어란 틀린 내용 하나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들릴까봐 애교와 이모티콘 같은 ‘쿠션’을 이어붙여 문장을 맺는 어법을 말한다. 쿠션어를 쓰면 적어도 ‘드세 보인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어법이 오히려 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듣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어 결과적으로 발화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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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 돔 아래에서 - 송가을 정치부 가다
송경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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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화 기자의 [민트 돔 아래에서]를 읽었다. 부제는 “송가을 정치부 가다”이다. 작년 봄을 시작하며 노란색 자켓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기자 그림을 표지로 한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를 읽고 나서 현직 기자가 이렇게 소설까지 잘 써도 되는 거야 라며 ‘이러면 반칙이지’라는 놀라움을 안겨줬는데, 이듬해인 올해 가을을 시작하며 두 번째 소설을 만나게 되니 놀라움이 두배가 되었다. 지난 편은 송가을 기자가 첫 기자 생활을 하는 고군분투기였다면, 이제는 어느 덧 4년차가 된 송가을 기자가 정치부로 자리를 옮기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시나 이번 책도 동그란 안경을 쓴 송가을 기자가 파란색 자켓을 입고 민트색 돔이 있는 국회의사당 앞 그림을 표지로 해서 마치 소설 속에 나온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너무 개연성이 없어서 오히려 만화같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당연히 소설 속에 나온 사건들은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걸 보면 차라리 영화나 소설 속 상상이 오히려 개연성이 높지, 실제 벌어진 사건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아침에 토스트를 먹으며 뉴스를 보면 매번 정치 관련 기사가 제일 먼저 보도돼곤 한다. 정치인들이 매번 유사한 형태로 서로의 말과 행동을 헐뜯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짜증이 밀려와 채널을 바로 돌리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정치에는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그러다 권력을 지닌 이들이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착복과 불법 행위를 일삼는 작태가 고발되는 뉴스에는 분노가 정점에 달해 아예 뉴스조차 보고싶어지지 않는다. ‘나 하나 정도야 뉴스 안보고 살아도 뭐 알아서들 잘 하겠지’, ‘혹은 내가 뉴스 보고 정치판이 돌아가는 걸 잘 안다고 해서 뭐 세상이 달라지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이왕이면 재미있고 기분 상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보자며 채널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나 말고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해 진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그동안 귀찮고 복잡하고 머리아픈 일들을 자꾸만 뒤로 미뤘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도, 군사독재정권의 기득권에 있던 이들에 대한 처벌과 그들로 인해 의문의 죽음과 상처를 받은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심지어 아직도 미궁에 빠진 세월호 사건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냥 잊고 살자는 나약함이 정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정치는 생물이다. 여의도는 욕망의 용광로다. 이 두 문장이 어쩌면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졌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금빛 뱃지를 단 이들은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입법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공표된 법은 국민들의 실생활 곳곳에 적용되고 때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또한 국회에서는 정부 각 부처들이 국민들이 낸 세금을 제대로 사용하며 일하고 있는지 국정감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감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거대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중 누군가가 언젠가는 대선 후보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생물이고, 욕망의 용광로라는 말은 결국 정치에 입문한 사람은 결국 변할 수 밖에 없다는 말로 해석된다. 얼마나 많은 정치인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온갖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정치성향까지 정반대로 바꾸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실망할 일도 놀랄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포기와 실망은 이르다는 생각을 하고 싶다.


송가을 기자가 정치부 말진이 되어 여의도를 날아다니는 장면들은 마치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고 흥미진진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알지 못했던 많은 이면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악독한 갑질 의원 밑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던 박새롬의 이야기는 차라리 그냥 뜬구름 잡는 허황된 이야기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려왔다. 소솔 속에서는 대차게 복수를 하지만 부디 현실 속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어디선가 송가을 기자가 나타나 번뜩이는 기지와 뛰어난 복기 능력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마이크가 되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이들, 약자들에게 먼저 손 내밀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기자. 난 그게 좋은 기자라고 생각해. 우리는 주로 고위층을 만나잖아. 권력자들, 힘 있는 강자들 목소리만 기사화하기 쉽거든. 여기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두는 기자. 그게 좋은 기자라고 본다.(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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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브라더스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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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를 읽었다. [파우스터]로 시작된 저자와의 만남이 [불편한 편의점] 시리즈에 이어 초기작까지 이르게 되었다. 역시나 저자의 소설은 잘 읽히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어찌보면 [불편한 편의점]의 프리퀼 버전 같은 [망원동 브라더스]는 실제로 보면 얼마나 찌질해 보일지 감당하기 힘든 4명의 남자가 나온다. 이야기의 화자인 오영준은 잡지 만화 연재로 우수상을 받으며 멋지게 데뷔했지만 그 이후로 이렇다할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잡지 만화의 쇠락과 더불어 그의 삶 또한 궁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이 2013년에 나왔으니 아마도 당시 즈음부터 망원동에 핫플레이스가 많이 생겨나고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사는 동네가 핫해졌다고 해서 주인공이 갑자기 여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니, 영준은 4층 8평짜리 옥탑방에 머물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영준의 최대적은 슈퍼할아버지, 갑자기 나타나 이것 저것 참견하며 월세의 압박을 주는 빌런이다. 영준에게 어느 날 예전 출판업계의 부장이었던 김부장에게 연락이 오고 그는 캐나다에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홀로 귀국하여 영준에게 빌붙기 시작한다. 옥탑방에서의 더부살이라니 혼자 지내기도 비좁은 공간에 중년의 배나온 아저씨가 들어와 같이 지내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요즘 우리나라의 핫플레이스 곳곳에 때아닌 옥상, 좀 있어보이게 루프탑이라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예전같으면 죽은 공간이거나 간이 창고로 쓰일 만한 곳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좌석을 놓으니 전망도 좋고 햇살과 노을을 감상할 수 있어서 많이 이들이 루프탑을 선호하고 있다. 사실 루프탑 이전에도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당이나 물가에 평상을 놓고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먹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상에 둘러앉는 것은 요즘 세대에는 맞지 않고 유럽 여행을 다녀온 많은 이들이 야외 테이블에서 술과 음식을 즐긴 경험을 이어가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먼지 풀풀 날리는 길거리에도 테이블이 놓인 음식점을 간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루프탑은 마치 산토리니의 어느 언덕에 있는 파랗고 하얀 식당의 옥상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손님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그렇게 루프탑에서 밥을 먹는 것은 그럴듯 하지만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오지기 추운 루프탑에서 산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지 않을까? 근래에는 에스프레소바도 많이 생겨서 이탈리아식의 커피를 파는 곳에 가보니 루프탑을 개방한다고 해서 커피를 들고 비상계단을 위태롭게 올라 자리를 잡았다.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는 근사한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어디선가 TV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누가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것인가 둘러보니, 루프탑과 옆 옥탑방 사이가 인조 대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몰랐는데,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누군가가 보고 있는 TV 소리였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 옥탑방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아 매일 이렇게 옆 건물 카페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들이 쉴세없이 떠들며 소음을 일으킬텐데, 옥탑방에 거주하던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고 지겨울까 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이 밀려왔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영준은 김부장과의 어이없는 동거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일거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K 선배의 딸 돌잔치에 가서 만화를 그려 데뷔하도록 해준 싸부를 만나게 된다. 싸부는 한때 만화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스토리텔러였지만 이제는 퇴물에 불과하고 돌잔치에 난동을 부리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영준은 싸부와의 2차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얼떨결에 망원동 옥탑방에 사는 것을 알리게 되고, 마치 싸부와 10년만의 재회는 영준의 옥탑방에 김부장 말고도 또 다른 동거인이 생길 것임을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영준과 김부장은 옥탑방에 올라오는 계단에 죽은 사람처럼 엎어져 있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중년 남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아내와의 불화로 집을 나온 싸부는 영준의 비좁은 방에 얹혀살게 된다. 이쯤 되면 슈퍼할아버지가 나타나 영준과 김부장과 싸부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월세를 비롯한 각종 공과금에 대한 엄포를 내리는데, 김부장과는 다르게 싸부는 굽실거리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슈퍼할아버지를 멘붕에 빠지게 만든다. 이렇게 3명의 브라더스로 끝나는 것인가 싶을 때, 영준의 학교 후배였던 삼척동자가 옥탑방 근처 고시원에서 지내다가 새로 생긴 마트에서 이목을 끌기 위해 벌인 분식 먹기 대회에서 영준과 재회하게 되고, 그 대회에 참가했던 김부장은 아쉽게 삼척동자에게 패하며 옥탑방에는 4명의 빈대, 바퀴벌레 들이 머물게 된다. 이쯤되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진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때에는 세든 방 하나에 5식구 이상이 산 이들도 많았으니 안될 것도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생존을 이어가니 말이다. 


영준의 옥탑방에 빈대 붙은 김부장, 싸부, 삼척동자는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김부장은 군산식 콩나물해장국을 필두로 음식점을 개업하게 되고 싸부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무기력해지지만 분식 먹기 이벤트에 참가했던 이웃집 아줌마를 흠모하며 기운을 내기 시작한다. 삼척동자는 비록 9급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지만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가정사를 토로하고 영준의 위로를 받으며 힘을 내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 영준은 옥탑방에 얹혀 사는 이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월세방을 알아보다가 드디어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된다. 영준과 알바의 신 선화는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에 빠지고 영준의 옥탑방에서 김부장, 싸부, 삼척동자도 만나게 된다. 평범한 이들이 일상을 영위하고자 부단히 애쓰지만 때로는 강제로 루저가 된 듯한 실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읽다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십년 밖에 안된 소설이지만 워낙 세태의 속도가 빠르다보니 지금과는 조금 다른 그때의 문화적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일에도 삶에도 마감이 필요하다. 마감.

내가 마감을 잘 지키는 만화가가 된 것은 마감이 스스로 작품을 그려나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억지 같지만 진짜로 마감이 되면 알 수 없는 집중력이 솟아올라 어떻게든 원고를 끝내게 만든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때의 벼락치기 같다. 그때의 집중력. 그게 마감이란 놈이고, 그놈이 결국 스스로를 완성한다. 

반드시 작가만 마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직장인에게 퇴직해야 할 때가 있고, 자영업자에겐 영업을 접을 때가 있고, 연인에게는 이별의 때가 있고, 군인에게는 제대가 있다. 그게 마감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스스로 묶어야 하는 매듭 같은 거.(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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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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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작가의 [소설 만세]를 읽었다. 민음사 매일과 영원 6번째 에세이다. 소설가의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탄과 감동에 빠지며 동시에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분명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소감이나 이번 책처럼 여러 편의 소설을 출판한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읽게 되면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소설가들도 글이 써지지 않아 고뇌하고 자기가 쓴 글을 몇 번이나 되고치며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또 다른 위대한 작가들을 선망한다. 대체 소설가와 같은 이들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건 마치 유명한 쉐프가 오늘 음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나도 그럴듯한 요리를 쓰레기통에 처 넣은 것과 같은 나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 아닐까?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는 불같은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로 단숨에 멋진 소설과 시와 평론을 완성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왔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작가들이 일정한 루틴을 유지하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치 출근과 퇴근 도장을 찍듯이 글을 써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아 그들도 사람들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출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처럼 글이 써지던 안 써지던 무작정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예상밖의 위로를 전해준다. 그동안 감동하고 열렬히 지지해온 소설가들의 글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번쩍하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공평하고 나와 별다르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애쓴 노력으로 나의 삶을 위로해주듯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와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일상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써야 한다는 뜻밖의 깨우침 또한 전해준다. 


아마도 뒤늦게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저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저자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 것 같다. 사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하면 의례히 고전들을 다 섭렵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자신이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아 의기소침했음을 고백하고 뒤늦게라도 위대한 작품들을 읽으며 소설가로서의 삶을 준비한다. 사실 그렇다. 고전이라 칭하는 또는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쉼없이 읽고 쓰기를 지속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글에 대한 비평과 반응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늦었다 생각되지만 지금이라도 다양한 작품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때로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라 글쓰기를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드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사람들은 분명 이야기를 원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투영하게 되는데, 그런 밑바탕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이들이 쓰고자 하는 선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그럼에도 저자의 제목처럼 ‘소설 만세’라고 후회없이 외치는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어느 정도 빚진 시간을 갖게 되고 뿌듯한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우리는 질문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런 꿈을 가지고 있나요? 왜 그것을 좋아하나요? 왜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나요? 왜 요즘 같은 시대에 당신은 읽기와 쓰기를 하나요? 그것이 재밌나요? 좋나요? 심지어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혹은 그것은 내 기준에 별로 좋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39)”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비극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그 인물의 내일과 미래다. 어쩌면 진정한 이야기일지 모르는 삶이 작가의 무책임한 엔딩으로 인해 영원히 고통과 슬픔으로만 기입되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고통 이후 계속될 삶을, 소설은 말하거나 열어 줘야 한다. 사건이 발생했고 충격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통증을 느꼈고 슬픔 혹은 분노로 일상은 잠시 마비됐을 수 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계속 산다면, 계속 살기로 했다면, 그 경험에서 살아남았다면, 상처는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흉터는 남겠지만 그것은 새롭게 차오른 살일 뿐 영원히 지속되는 상처는 아니다. 

세월이 흘렀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유로 인해 회복되었다는 것.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다. 근거 없는 낙관도 아니다. 신파와 낭만으로 가득한 해피엔딩도 아니다. 사실과 진실의 영역이다.(88-89)”


“일상에서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다. 좋은 책을 읽어도 말할 사람이 없다. 가령 친구를 만나면 이런 대화를 한다. 

-이번에 김연수의 신작을 읽었는데 정말 좋았어. 

김연수? 누구

-‘고도를 기다리며’를 최근에 다시 읽었더니 다르게 보이더라.

아, 나 그거 들어봤어.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글이 너무 안 써진다.

나도 출근하기 싫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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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운
문경민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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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민 작가의 [화이트 타운]을 읽었다. 누아르 영화를 보면 가장 악독한 놈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첫 장면의 자극적인 액션과 극악무도한 폭력이 난무할 때면 ‘아 이 놈이 정말 나쁜 놈인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그렇게 쎈 놈처럼 보이는 놈도 알고보면 누군가의 수하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악독한 놈을 지배하는 또 다른 실세가 등장하고 그렇게 실세로 보이는 완벽무결한 놈처럼 보이는 이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진짜 지시를 내리는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기도 한다. 처음부터 워낙 센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2시간이 지날 무렵에는 웬만한 폭력과 잔인한 장면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저 가기에 차라리 진짜 쎈 놈이 등장하지 않는게 오히려 신비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대체 폭력과 악독함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폭관련 영화는 지금도 끝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어쩌면 그런 영화의 원작이 될 만한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누아르 소설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터너처럼 휘리릭 전개되는 이야기에 금방 몰입되고 과연 주인공들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진다.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 중의 하나를 고른다면, 소설은 영화보다 결말을 확실히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이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지만 만일 주인공이 비참하고 어이없게 죽음을 당하고 악의 세력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속된다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이들의 마음이 고구마를 급히 먹은 것처럼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처럼 끝맺는 경우가 거의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비극적인 결말도 많고 아예 결말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영화처럼 속이 답답해지지는 않는다. 텍스트와 영상의 자극에서 오는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이 영화처럼 해피엔딩을 그리려고 한다면 소설을 지금처럼 많이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소설의 마지막은 장걸의 액션신이 과도함을 갖고 있음에도 자영의 이기적인 선택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리고 자영이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실제적인 배경으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지보유세에 대한 쟁점을 부각시킨다. 자영에게는 자폐 장애가 있는 남동생이 있다. 얼마전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자폐 장애가 있는 동생을 둔 주인공이 연애를 하다가 어차리 동생 때문에 상처 받을게 뻔한 결말을 두려워하며 일방적인 이별을 고한다. 소설 속에서도 자영은 장걸과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을 느끼며 일부러 장걸에게 동생 준호를 맡긴다. 장걸은 준호를 맡은 2박3일 동안 분노와 인내와 시름하며 만일 자영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준호에 대한 책임이 생길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제3자로 지켜보는 것과 실제로 준호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된다. 


장걸의 엄마인 중선은 창현의 돈세탁 하수인이 되어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선이 창현에게 얽매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중선은 어째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장걸을 학대하며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일까? 같은 아파트 이웃으로 만난 자영과 준호에게는 아주 다정한 엄마처럼 지내면서도 샤또 오 브리옹을 마시면 멈추지 못하는 알콜릭 증세는 왜 생겨난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을 자아내며 특수학교 건립의 찬반대로 창현이 만들어낸 지주회라는 불법을 자행하는 조직과 자영의 주도로 모인 몇 장애인 가족들의 대립이 소설의 긴장을 극대화시킨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이 마치 신의 계명처럼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평범한 사람이 큰 돈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아니면 부동산을 통해 큰 돈을 버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복권 당첨자야 워낙에 드물고 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덜하지만, 부동산의 경우는 다르다. 한 다리만 건너면 부동산으로 수억을 손쉽게 번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기본 자산이 있어야 부동산에 투자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런저런 온갖 방법 요즘은 영혼까지 끓어모은다는 영끌로 투자하여 재수가 좋으면 집값이 오르고 수천에서 수억을 벌게 된다. 그래서 집값을 떨어뜨리는 각종 혐오시설이 자기 집 앞에 세워지는 것을 결사반대한다. 이런 님비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이런 이기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해결책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영을 도와주는 국회의원 강정혜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지만 그녀는 창현의 윗조직을 대항하여 토지보유세가 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열심히 애쓴다. 강정혜의 주장대로 토지보유세가 제정된다면 땅 투기를 비롯하여 과도한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된다. 이 이상적인 법안은 적지 않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땅을 가진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강정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눈엣가시 거리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을 평생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영은 우청식과 손을 잡게 된다. 단지 특수학교를 건립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하지만 자영의 선택은 중선의 죽음과 스스로를 악의 세력에 옭아매게 만들고 미래를 상상할 정도로 가까워진 장걸에게 큰 아픔을 주게 된다. 자영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자영을 욕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핵심은 불로소득이었다.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됐다. 불로소득을 마음껏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가진 사람들만 신나는 세상이 될 터였다. 가진 사람들이 앉아서 부를 쌓는 동안 없는 이들은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서 번 임금의 4분의 1이 넘는 돈을 집세로 내야 하는 세상이 강정혜는 싫었다. ~~ 토지보유세는 모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 전액을 전국민이 똑같이 나누는 제도였다. 토지보유세는 단순했다. 토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내는 것 없이 받기만 하면 됐다. 필요한 토지만 소유한 사람들은 부담보다 혜택이 많았다. 토지를 과하게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은 혜택보다 부담이 더 많았다. 간단한 만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제도였다.(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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