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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세 ㅣ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평점 :
정용준 작가의 [소설 만세]를 읽었다. 민음사 매일과 영원 6번째 에세이다. 소설가의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탄과 감동에 빠지며 동시에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분명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소감이나 이번 책처럼 여러 편의 소설을 출판한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읽게 되면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소설가들도 글이 써지지 않아 고뇌하고 자기가 쓴 글을 몇 번이나 되고치며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또 다른 위대한 작가들을 선망한다. 대체 소설가와 같은 이들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건 마치 유명한 쉐프가 오늘 음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나도 그럴듯한 요리를 쓰레기통에 처 넣은 것과 같은 나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 아닐까?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는 불같은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로 단숨에 멋진 소설과 시와 평론을 완성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왔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작가들이 일정한 루틴을 유지하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치 출근과 퇴근 도장을 찍듯이 글을 써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아 그들도 사람들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출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처럼 글이 써지던 안 써지던 무작정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예상밖의 위로를 전해준다. 그동안 감동하고 열렬히 지지해온 소설가들의 글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번쩍하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공평하고 나와 별다르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애쓴 노력으로 나의 삶을 위로해주듯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와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일상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써야 한다는 뜻밖의 깨우침 또한 전해준다.
아마도 뒤늦게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저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저자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 것 같다. 사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하면 의례히 고전들을 다 섭렵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자신이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아 의기소침했음을 고백하고 뒤늦게라도 위대한 작품들을 읽으며 소설가로서의 삶을 준비한다. 사실 그렇다. 고전이라 칭하는 또는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쉼없이 읽고 쓰기를 지속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글에 대한 비평과 반응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늦었다 생각되지만 지금이라도 다양한 작품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때로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라 글쓰기를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드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사람들은 분명 이야기를 원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투영하게 되는데, 그런 밑바탕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이들이 쓰고자 하는 선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그럼에도 저자의 제목처럼 ‘소설 만세’라고 후회없이 외치는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어느 정도 빚진 시간을 갖게 되고 뿌듯한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우리는 질문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런 꿈을 가지고 있나요? 왜 그것을 좋아하나요? 왜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나요? 왜 요즘 같은 시대에 당신은 읽기와 쓰기를 하나요? 그것이 재밌나요? 좋나요? 심지어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혹은 그것은 내 기준에 별로 좋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39)”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비극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그 인물의 내일과 미래다. 어쩌면 진정한 이야기일지 모르는 삶이 작가의 무책임한 엔딩으로 인해 영원히 고통과 슬픔으로만 기입되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고통 이후 계속될 삶을, 소설은 말하거나 열어 줘야 한다. 사건이 발생했고 충격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통증을 느꼈고 슬픔 혹은 분노로 일상은 잠시 마비됐을 수 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계속 산다면, 계속 살기로 했다면, 그 경험에서 살아남았다면, 상처는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흉터는 남겠지만 그것은 새롭게 차오른 살일 뿐 영원히 지속되는 상처는 아니다.
세월이 흘렀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유로 인해 회복되었다는 것.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다. 근거 없는 낙관도 아니다. 신파와 낭만으로 가득한 해피엔딩도 아니다. 사실과 진실의 영역이다.(88-89)”
“일상에서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다. 좋은 책을 읽어도 말할 사람이 없다. 가령 친구를 만나면 이런 대화를 한다.
-이번에 김연수의 신작을 읽었는데 정말 좋았어.
김연수? 누구
-‘고도를 기다리며’를 최근에 다시 읽었더니 다르게 보이더라.
아, 나 그거 들어봤어.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글이 너무 안 써진다.
나도 출근하기 싫다.(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