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이트 타운
문경민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평점 :
문경민 작가의 [화이트 타운]을 읽었다. 누아르 영화를 보면 가장 악독한 놈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첫 장면의 자극적인 액션과 극악무도한 폭력이 난무할 때면 ‘아 이 놈이 정말 나쁜 놈인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그렇게 쎈 놈처럼 보이는 놈도 알고보면 누군가의 수하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악독한 놈을 지배하는 또 다른 실세가 등장하고 그렇게 실세로 보이는 완벽무결한 놈처럼 보이는 이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진짜 지시를 내리는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기도 한다. 처음부터 워낙 센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2시간이 지날 무렵에는 웬만한 폭력과 잔인한 장면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저 가기에 차라리 진짜 쎈 놈이 등장하지 않는게 오히려 신비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대체 폭력과 악독함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폭관련 영화는 지금도 끝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어쩌면 그런 영화의 원작이 될 만한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누아르 소설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터너처럼 휘리릭 전개되는 이야기에 금방 몰입되고 과연 주인공들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진다.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 중의 하나를 고른다면, 소설은 영화보다 결말을 확실히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이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지만 만일 주인공이 비참하고 어이없게 죽음을 당하고 악의 세력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속된다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이들의 마음이 고구마를 급히 먹은 것처럼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처럼 끝맺는 경우가 거의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비극적인 결말도 많고 아예 결말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영화처럼 속이 답답해지지는 않는다. 텍스트와 영상의 자극에서 오는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이 영화처럼 해피엔딩을 그리려고 한다면 소설을 지금처럼 많이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소설의 마지막은 장걸의 액션신이 과도함을 갖고 있음에도 자영의 이기적인 선택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리고 자영이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실제적인 배경으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지보유세에 대한 쟁점을 부각시킨다. 자영에게는 자폐 장애가 있는 남동생이 있다. 얼마전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자폐 장애가 있는 동생을 둔 주인공이 연애를 하다가 어차리 동생 때문에 상처 받을게 뻔한 결말을 두려워하며 일방적인 이별을 고한다. 소설 속에서도 자영은 장걸과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을 느끼며 일부러 장걸에게 동생 준호를 맡긴다. 장걸은 준호를 맡은 2박3일 동안 분노와 인내와 시름하며 만일 자영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준호에 대한 책임이 생길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제3자로 지켜보는 것과 실제로 준호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된다.
장걸의 엄마인 중선은 창현의 돈세탁 하수인이 되어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선이 창현에게 얽매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중선은 어째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장걸을 학대하며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일까? 같은 아파트 이웃으로 만난 자영과 준호에게는 아주 다정한 엄마처럼 지내면서도 샤또 오 브리옹을 마시면 멈추지 못하는 알콜릭 증세는 왜 생겨난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을 자아내며 특수학교 건립의 찬반대로 창현이 만들어낸 지주회라는 불법을 자행하는 조직과 자영의 주도로 모인 몇 장애인 가족들의 대립이 소설의 긴장을 극대화시킨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이 마치 신의 계명처럼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평범한 사람이 큰 돈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아니면 부동산을 통해 큰 돈을 버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복권 당첨자야 워낙에 드물고 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덜하지만, 부동산의 경우는 다르다. 한 다리만 건너면 부동산으로 수억을 손쉽게 번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기본 자산이 있어야 부동산에 투자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런저런 온갖 방법 요즘은 영혼까지 끓어모은다는 영끌로 투자하여 재수가 좋으면 집값이 오르고 수천에서 수억을 벌게 된다. 그래서 집값을 떨어뜨리는 각종 혐오시설이 자기 집 앞에 세워지는 것을 결사반대한다. 이런 님비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이런 이기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해결책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영을 도와주는 국회의원 강정혜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지만 그녀는 창현의 윗조직을 대항하여 토지보유세가 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열심히 애쓴다. 강정혜의 주장대로 토지보유세가 제정된다면 땅 투기를 비롯하여 과도한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된다. 이 이상적인 법안은 적지 않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땅을 가진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강정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눈엣가시 거리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을 평생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영은 우청식과 손을 잡게 된다. 단지 특수학교를 건립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하지만 자영의 선택은 중선의 죽음과 스스로를 악의 세력에 옭아매게 만들고 미래를 상상할 정도로 가까워진 장걸에게 큰 아픔을 주게 된다. 자영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자영을 욕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핵심은 불로소득이었다.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됐다. 불로소득을 마음껏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가진 사람들만 신나는 세상이 될 터였다. 가진 사람들이 앉아서 부를 쌓는 동안 없는 이들은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서 번 임금의 4분의 1이 넘는 돈을 집세로 내야 하는 세상이 강정혜는 싫었다. ~~ 토지보유세는 모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 전액을 전국민이 똑같이 나누는 제도였다. 토지보유세는 단순했다. 토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내는 것 없이 받기만 하면 됐다. 필요한 토지만 소유한 사람들은 부담보다 혜택이 많았다. 토지를 과하게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은 혜택보다 부담이 더 많았다. 간단한 만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제도였다.(15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