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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평점 :
이유리 작가의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읽었다. 부제는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이다. 어릴때에는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전문성을 가진 직업을 갖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부와 명예를 가져오는 업적까지 쌓게 된다면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괜찮은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겉으로 보여지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처럼 정보 공유가 쉽고 빠른 시대를 살지 않았다면 어릴때의 생각이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의 추문과 심지어 내가 알고 지냈던 존경받았던 누군가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면서 성공한 삶이란, 잘 살아온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시쳇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어?’가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심지어 패륜아 같은 악질적인 사람도 1대1 만남이 아닌 대중적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면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거나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180도 돌변하여 금수만도 못한 말과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CCTV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힘든 첨단 사회가 되어갈수록 공적인 증거가 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는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진짜 존경하고 추앙받아 마땅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사각지대에서도 한결같은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선택적으로 ‘나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함께 할 때의 소속감과 공감대 형성이 주는 따뜻함과는 반대로 혼자 일 때는 나른함, 게으름, 무기력함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다. 이런 피상적인 모습 말고 앞서 말한 사각지대의 한결같은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시간을 잘 마주해야 한다.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내놓은 위대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일상적인 모습은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요즘은 SNS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일상의 자세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도 하지만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멋지고 예쁘고 힙하고 쿨하고 뭔가 그럴싸한 일상들만 공개할 뿐이다.
인간은 언제 가장 뿌듯한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일까? 명품으로 제 몸을 도배한다 한들 또 다른 신제품이 나오게 되고 자기보다 누군가가 앞서 레어템을 얻게 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누군가의 칭찬도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잘했는데, 내가 이렇게 성실했는데, 내가 너에게 이렇게 잘해줬는데,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의 칭찬과 고마움의 말들을 금방 휘발되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때 가장 큰 기쁨과 충만함을 얻게 된다. 나 자신이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은 금방 소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기특한 행동을 위해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너무나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나 혼자’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의 명화 속에 담겨진 화가와 얽힌 속내들을 읽으며 놀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애써 감추려고 지하 창고의 먼지가 가득쌓인 두툼한 열쇠로 봉인된 상자를 열어젖힌 것처럼 차라리 몰랐다면 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이렇기 긴 시간을 너무나도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일까?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하니까 되던데’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쌓아왔던 시간들이 갑작스러운 쓰나미처럼 우리의 일상을 덥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특히나 이 책은 아주 오랜시간 견고하게 쌓아온 가부장제의 처절한 민낯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느냐고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하라며 경종을 울린다. 특히나 저자의 글 속에서 드러난 가부장제로 인해 벌어진 지난한 역사의 반복은 어느 국가의, 어느 공동체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바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자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과연 가부장제의 이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나? 성별에 지정된 역할과 행위를 지지하며 우위를 점하고 발판으로 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는가?
책 속에 등장한 유명한 화가들이 뮤즈라는 미명하에 너무니없는 나이차를 넘어서는 결혼을 하고 어린 배우자를 모델로 수십년간 세운 일들과 충분한 교육과 지원이 있었다면 배우자 못지 않게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저 남편의 내조자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의 역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저자의 강렬한 표현 중의 하나인 ‘인생을 갈아넣었다’라는 말을 통해 한 명의 화가가 한 평생 그림에 올곳이 집중할 수 있기 위한 아내의 헌신적인 가사 노동을 비롯한 제반 관련 일들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그럼에도 온 삶을 갈아넣은 아내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잔혹한 현실을 드러나게 해 준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모든 여자들은 샤프롱(chaperon)이라고 불렸던 동반자 없이는 아예 이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여자에게는 집 밖에서 혼자 있을 권리도, 혼자서는 이동할 자유도 없었던 것이다.(194-195)”
“21세기 한국에 사는 블루 스타킹의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인기가 없다’ ‘너무 잘난 여자는 적을 만들고 남자들도 피곤해한다’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사회의 악평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쿠션어’를 사용한다. 쿠션어란 틀린 내용 하나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들릴까봐 애교와 이모티콘 같은 ‘쿠션’을 이어붙여 문장을 맺는 어법을 말한다. 쿠션어를 쓰면 적어도 ‘드세 보인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어법이 오히려 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듣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어 결과적으로 발화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