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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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작가의 [나주에 대하여]를 읽었다. 가끔씩 '민음사TV'를 통해서 편집자로 알고 있었는데, 신작을 둘러보다가 저자의 이름을 보고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게다가 출판사가 문학동네라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띠지에 나온 사진을 보고 '맞구나'싶고 왠지 모르게 아는 사람이 책을 낸 것 같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책을 사놓고도 한 동안 다른 책들을 읽다가 새해를 맞이하는 겨울이 되어서야 손에 쥐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조금 미루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소설이 겨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따뜻한 방 안에서 스탠드 불빛에 비추어 오롯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쓸쓸한 마음들을 보듬기에는 겨울이 제격인거 같아서. 


이번 소설집에는 "새 이야기", "나주에 대하여", "꿈과 요리", "근육의 모양", "척출기", "정체기", "쉬운 마음", "침묵의 사자" 이렇게 8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의 해설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 단편들의 주인공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 관계적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성인이 되기 이전에 정규 교육 과정의 학교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교우 관계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는 사뭇 다른 이제는 누군가의 법적 보호자가 필요치 않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완성되지 못한 자신과의 내적 투쟁을 뜻한다. 특히나 주인공들의 공통된 관심은 바로 타자의 마음이다. 사실 내 마음도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때가 많은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이라니, 독심술과 같은 투시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지레짐작으로 무엇보다도 공감으로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 노력한다. 


가끔은 '타인의 마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란 의심이 드는 이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타인에게 쉽사리 불쾌감을 안기고 자기는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며 선연히 제 갈길을 가버리는 그들의 쿨함을 이기성의 극치라고 욕하며, 다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의 주변에도 타인의 마음이 존재했다. 당연히 왕따가 되고 고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가 함께 하며 웃었고 정보를 교환했으며 칭찬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차오르는 무력함은 세상이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면서 어쩌면 내가 욕했던 그 사람도 타인의 마음에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헤아려보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몹시 사랑해주고 아껴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 "침묵의 사자"에서 화자인 '나'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지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수의 모든 것을 따라 하다가 결국 지수에게 이런 말을듣게 된다. "너 왜 자꾸 나 따라 해?" 누군가의 마음을 동경하게 되면 무작정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롤모델이라는 말도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는 것 또한 위대한 이들의 삶을 따라해보라는 권유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자기를 좋아하는 화자가 자신을 따라하는 것을 왜 싫어했을까? 이런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 비슷한 것 같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티셔츠나 자켓을 누군가 똑같은 옷을 입고 온 것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내가 입은 옷이 멋져 보여서 따라 입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갑자기 기분이 상한다. 왜냐하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타인의 마음을 갑자기 알아챘기 때문이다. 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냥 모른 척 내 마음만 들여다보며 살고 싶은데, 어느 순간 이미 확인해버린 타인의 마음이 이기적인 나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무례하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범. 그런 말을 할 때 너는 너무나 규희 같다. 자기 공간을 소중하는 사람들. 오롯한 혼자를 내버려둬야 하고 스스로가 세운 원칙을 존중받아야 해서 섣불리 노크하거나 노크조차 않고 불쑥 가까워지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내향적이라고 소개하며 절대 먼저 뭔가를 제안하지 않는 사람들. 깉이 저녁 먹을래요? 시간 되면 볼래요? 하는 말을 주로 듣는 쪽인 사람들(62-63)"


"나주에 대하여"의 화자인 '나'는 한 평생 이렇게 제안을 기다리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몸부림치며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 덕분에 기다리는 이들은 어느덧 고고한 학처럼 정갈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반문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분위기를 주도하고 설레발을 치는 이들을 보며 왜 저렇게 설치나 싶다가도 그러한 활기참을 부러워하다가도 과도한 리액션에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지는. 타인의 마음은 다양한 모양의 처신이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몸에 집중하는 일. 은영은 그걸 바라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서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을 악질적으로 즐겼다. 은영의 상사부터가 그랬다. 은영은 회사에서 사람들을 깊이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의 일을 잘하는 것. 그것이 은영의 회사생활 원칙이었다. 그 외엔 신경쓰고 싶지 않았고 휘둘리고 싶지 않았는데, 상사의 곁에 있으면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언제든 후배들을 비꼬았고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 비꼬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옷차림, 말투, 습관 같은 업무 능력 외의 것을 평가하며 우습게 만들고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그의 업무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며 우습게 만ㄷ르었다. 그러면서 티나게 사람을 가려 칭찬을 하거나 추켜세워서 후배들로 하여금 계속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은영의 동기와 후배들은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며 알았다. 저 사람 눈 밖에 나면 지옥 같을 것이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하는 예감이 모두에게 있었다.(131)"


일을 하려고 모인 곳에서는 당연히 서로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영의 상사가 그런 것처럼, 상사에게는 일을 잘하는 직원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도 잘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언제든 알아챌 준비를 하라는 것. 생각보다 어렵고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상사의 마음을 알아채는 노력을 서투르게 하는 순간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소설은 알려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이기적인 타인의 마음을 맞춰주는 역할에 서투른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다. 


"아픈 것은 그런 일인 것 같았다. 평소의 나와 아주 많이 달라지는 일. 혼자가 되는 일. 평소에도 영은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다르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서로 모두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달라도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외로운 걸.(157)"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타인의 마음을 읽기 위해 마음과 마음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그 헤아릴 길 없는 왕복 운동, 그 지난한 마음 읽기의 실패는 사랑이다. 마음 읽기는 알 수 없다는 막연함과 끝내 모르겠다는 실패 속에서만 가능하다. 실패 속에 있을 때만 우리는 사랑을 한다. 실패하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작가 김화진이 쓴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지치지 않는 열정일 것이다. 그 열정은 우리를 애타는 마음의 온도보다 더 뜨겁고 깊은 곳에 데려다 놓는다. 실패로서의 사랑과 그런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 밑도 끝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무모한 사랑의 주체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읽는 중이다. 때로 천국이고 주로 지옥인 그곳을 무엇 하나 건너뛰는 법 없이 모두 읽어내는 이 완전한 짝사랑의 고백을 읽는 내 마음도 어느새 사랑이다.(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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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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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은 작가의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읽었다. 망언이라는 말이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시대이다. 실언도 아니고 망언이라니 아마도 농담처럼 사용되지 않았다면 본래의 뜻을 제대로 담아 내뱉게 되는 순간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이상한 말을 들었을 때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망언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연유를 들여다보게 되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치가들의 헛소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논리를 펼치는 기사와 뉴스를 통해서 큰 헤드라인으로 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곤 했다.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내용을 담은 망언이라는 말이 어느덧 유행어처럼 사용되다보니 본래의 말이 지닌 뜻이 감소되는 것 같이 느껴져 아쉽기만 하다. 며칠 전 기사에서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어르신 중의 한 분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우리와 동시대의 삶을 살아간 분들조차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한맺힌 삶을 마감하셨어야 했으니, 그 옛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공녀로 끌려간 수천명의 소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슬픔과 한은 도대체 어디서 풀어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예전에 국사 공부를 하며 명나라에 공물과 함께 공녀로 보내진 수많은 10대의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운 적이 있었다. 워낙 시간적 거리감이 멀어서였을까. 당시에는 그냥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힘이 약해 나라의 딸들마져 바쳐야했던 비운의 역사에 씁쓸함을 느낀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소설을 통해서 가만히 떠올려보니 공녀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딸이 태어나면 아주 가까운 이웃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하니 딸을 가진 부모와 가족들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서도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고려 시대 학자였던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쓴 편지에 우리나라 처녀들을 데려가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에서 착안했다고 말한다. 원나라부터 이어진 공녀는 결국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2천 명이 넘는 소녀들이 끌려갔다고 하니, 그렇게 비운의 삶을 살다가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들의 삶을 그냥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한 번 고향을 떠나면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다시는 가족을 만나기 쉽지 않았을 지리적 상황에서 같은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 끌려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어찌 다 헤이릴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착안된 이 소설은 제주의 숲속에서 사라진 열세 명의 소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선의 최고의 수사관이었던 민환이와 민매월 자매의 아버지 민제우 종사관은 제주에서 소녀들을 찾다가 실종된다. 큰딸 환이는 목포의 고모집에서 새신부로 끌려가기 전 집을 나와 무작정 아버지를 찾아 제주가는 배를 탄다. 지금과는 다르게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왕의 눈 밖에 난 이들의 유배지이며, 가난과 척박함이 지속된 곳이었다. 또한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뭍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내륙과의 소통이 원할하지 않았기에 탐관오리와 같은 목사가 부임할 경우 수많은 양민들의 재산이 수탈되어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제주의 고유한 전통인 해녀가 생겨난 것은 그렇게 물질을 통해서라도 해산물을 구하지 않는다면 당장 굶어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원나라와 명나라에 끌려간 공녀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환이와 매월 두 자매가 있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지만 환이가 목포에 머물렀다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이는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거부하듯이 아버지처럼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결국 환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종용된 삶을 거부한 것이다. 매월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환이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동행한다. 환이와 매월과는 상반되는 인물로 등장하는 문촌장과 죄인 백씨는 자신의 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이의 딸을 납치하고 민 종사관을 죽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하지만 환이와 매월 자매의 용기있는 수사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며 문촌장과 죄인 백씨의 딸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매의 수사를 도와준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무슨 일까지 했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사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다.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죄인 백씨가 자신을 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소녀를 납치하고 딸의 얼굴을 난도질해서 공녀를 끌려가지 않도록 한 행동이 과연 딸을 위한 일이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딸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아비의 심정이 오죽했겠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 백씨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소설의 무대와 배경만 과거일 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과 딸의 모습은 지금다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처한 어려움과 고통의 종류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과 모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법망을 벗어나고 힘없고 약한 이들이 대신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문촌장과 죄인 백씨와 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뚫릴 것 같지 않는 단단한 바위도 낙숫물 한 방울 한 방울로 인해 반으로 갈라지듯이 독을 먹은 약해진 몸으로도, 신열에 들뜬 몸으로도 동굴 속에 갇힌 소녀들을 찾아낸 민 자매의 용기를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들에게 무한정 빚지고 있는 덕분에 그래도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면구스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것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시련을 주고,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앞길을 장애물로 가로막지. 그러는 동안 가슴에 악을 품은 자의 길으 수월하게 뚫린다네. 악을 퇴치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 사실을 일찍 받아들일수록 삶도 편해질 것이오.(243)”


“이 나라의 암담함에 겁먹은 새처럼 도망쳐서 자기들끼리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빛을 올곧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 대신 싸우고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은 항상 반짝일 거요.(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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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리커버 에디션)
김옥선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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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선 작가의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를 읽었다. 팬데믹 상황이 시작되고 나서 여행관련 책자들의 출간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든 시점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식적은 아니지만 엔데믹에 이른 것 같이 전염병 발발 이전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아주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들이 반증하고 있지만, 막상 내 앞의 일로 닥치니 이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여겨지기만 한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수많은 인구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니. 그동안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를 통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 이들 모두가 뒤통수 정도가 아니라 철퇴를 맞은 느낌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리하고 온갖 고통을 자아난 시간 이 흘러 전염병의 마지막에 이른 것이 아닐까란 희망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그런면에서 저자의 책은 누구나 좋아해마지 않는 여행이라는 주제를 새삼스레 싱그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다. 셀레는게 있다는 것은 누구 뭐래도 행복감을 느낀다는 증거일테니 말이다. 여행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여행의 기회를 갖을 수 있는 복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여행이라는 걸 처음 계획하고 떠날 때만 해도 여행은 그냥 새로운 곳을 방문해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못 먹어본 음식을 먹고 함께 여행을 간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좀 더 내적인 친밀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의 구력이 쌓이다보니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금의 삶의 자리에 만족하고 감사하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하게 준비된 여행을 떠난 다고 해도 집을 떠나는 것은 상당한 귀찮음을 수반하게 된다. 짐을 꾸리는 것에서부터 낯선 잠자리에서 오는 불편함과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떨떠름과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언어가 주는 압박과 두려움들이 일상을 살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스트레스를 양산시킨다. 그래서 그런지 고질병처럼 집 떠난지 3일만 지나면 내 입에서 저절로 ‘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터져나온다. 행여나 함께 간 이들이 들을까봐 혼잣말처럼 중얼거려야 했지만, 그 이후로 육체적 피로가 가중될 때면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무조건 더블’로 상승한다. 이런 생각이 들면 동시에 아니 대체 왜 내가 비싼 돈 들여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지루하고 재미없기는 해도 집에 있다면 이런 낭비를 하지 않았을텐데 라는 원초적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바보같고 무한반복되는 푸념은 집으로 돌아올 즈음 되어서야 떠남의 확실하 이유를 찾게 된다. 바로 집과 나의 일터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여행지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내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불편함 잠자리, 그리운 고국의 음식, 맘에 맞지 않아 어색해진 동료와의 거리감. 마치 신발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처럼 대놓고 티낼 수 없는 불편함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이다. 단지 일정이 다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비싼 돈 들여 내돈내산한 여행지의 스트레스는 일상에서 겪어내야만 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일상에서 겪었던 갈등의 기억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분주하게 여행지를 돌아다니다가도 갑작스레 밀려온 장엄한 자연 경관이 주는 감동으로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며 눈물을 줄줄 흘릴 수도 있다. 그때서야 깨닫게 된다. ‘아 내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할 필요가 있어.’라며 스스로를 칭찬해 줄 여유를 되찾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주로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줘야 하는 순간에 사진첩을 보며 여행지를 떠올리곤 한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힘을 주다가 혼자 끼득거리는 게 미친놈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여행지의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담겨 있음을 증명한다. 지난 금요일에 방송된 ‘나 혼자 산다’의 팜유세미나를 보던 기안84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이리저리 분주해진 등장인물들이 극적으로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는 장면을 보며 “아 근데 이렇게 끈끈해지는 걸 보니까 부럽네요.”라고 말한다. 당사자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민망하고 부끄러웠겠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는 함께 공유할 추억을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이 부러운 것이다. 결국 여행은 나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떠나기 전에는 늪지대같이 느껴지던 집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좁다고 느껴졌던 한국이 두 다리로 걷고 나니 무지막지하게 크다고 느껴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카페에 앉아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들어 보니 우리 동네도 사건 사고가 참 많았다. 최근에 책에서 ‘땅 멀미’라는 단어를 봤다. 매일 육지에 서 있다가 흔들리는 배에 타면 뱃멀미를 느끼는 것처럼 배를 오래 타던 사람이 배에 내리면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땅 멀미를 느낀다고 한다. 뱃멀미를 하든 땅 멀미를 하든 멀리는 괴롭다. 

어릴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워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 많은 것들을 보고, 만나고, 느끼고 많이도 웃었다. 그러다 한동안은 끝없이 펼쳐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불안해했다. 이제는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와 일상이 주는 것들의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다. 아마 나는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어딘가로 나아가는 도중에 멀리를 한 게 아닐까.(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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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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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안젤리크]를 읽었다. 해마가 겨울이 오는 길목에 기욤 뮈소의 신작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옮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바로 전 작품인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에 대해 쓴 올해 초의 리뷰를 보니 후속편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라파엘이 베라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본다"라고 씌어 있는데, 아마도 그 후속편은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보다. 이번에는 몇 년 간 지속된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도 아닌 새로운 포맷의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제목에 '안젤리크'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그녀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오히려 마티아스 타유페르 전직 강력계 형사를 주인공으로 봐야한다. 소설은 커다란 쳅터의 제목으로 주요 등장인물인 루이즈 콜랑주, 안젤리크 샤르베, 마티아스 타유페르 이렇게 3명의 인물 이름을 사용하며 각 인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으로 각 쳅터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포맷을 사용하며 등장인물들이 스텔라 페트렌코의 추락 사고로 접점을 만들어가며 진행되지만, 전작들이 비해 긴장감이 상당히 떨어지고 유기적 연결점이 미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오히려 전적들에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갔음에도 납들할 만한 개연성이 느껴졌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지금의 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실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했음에도 등장인물들의 연결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나 루이즈 콜랑주인 17세의 소녀가 전직 강력계 형사보다 앞서 정보를 수집하고 마티아스조차 모르던 숨겨진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몇 가지 미비한 구성요소들이 그동안 다른 소설에서 보여줬던 기욤 뮈소만의 촘촘한 설계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려서 그런지 뒤로 갈수록 반전을 꾀하는 내용들이 전개되어도 더 이상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의 재미는 반감되었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는 아마도 어쩌면 자기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자리가 정해진 범부들에게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소설의 시작은 루이즈라는 소녀가 심장이식 이후 다시 입원한 마티아스 전직 형사를 위문하는 장면부터이다. 첼로를 껴며 환자를 방문한 루이즈에게 마티아스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어서 나갈 것을 종용하지만 루이즈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마티아스의 곁을 맴돌며 자신의 어머니가 사고사로 죽지 않았음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한다. 마티아스는 루이즈의 수사 의뢰를 통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루이즈의 엄마인 스텔라 페트렌코의 사고 기사를 수집한다. 책 표지에도 에투알 무용수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이라는 문구가 있기에 제목나 나온 인물인 안젤리크가 이 무용수이거나 무용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이라고 추측하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전개된 내용에서는 에투알 무용수인 스텔라는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젤리크 또한 스텔라와 관련이 깊은 인물 또한 아니었다. 만약 안젤리크가 스텔라의 치료를 전담하던 간호사의 휴가로 인해 일주일 동안 치료 업무를 대체하지 않았다면, 또는 스텔라와 같은 곳에 살던 마르코 사바티니가 코로나 19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다면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근 나온 소설들 중에 상당수가 3년째 지속중인 코로나 19 사태를 간간히 언급하고 있다. 기욤 뮈소도 전세계를 마비시킨 전염병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아니면 그 전염병에 대한 인간 사회의 변화를 언급하고 싶었던 것인지,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마르코가 병원에 실려가고 응급처치를 도운 안젤리크가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을 한 번에 바꿔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능케 만든 바이러스 역할을 하게 된다. 안젤리크는 마르코가 아쿠아알타라는 이탈리아의 전도유망한 대단한 기업의 창업주 가족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르코의 연인 행세를 하게 된다. 아들의 위급한 상태를 안젤리크를 통해 연락받은 비앙카 사바티니는 안젤리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동행하게 된다. 하지만 마르코의 상태가 서서히 안정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은 안젤리크는 이미 시작된 사기극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르코의 병실에 몰래 들어가 심장에 무리가 가도록 약물을 주입해 죽게 만든다. 그리고 안젤리크의 사기행각을 눈치챈 스텔라는 안젤리크를 위협하게 되고 안젤리크는 스텔라마져 사고사를 위장해서 죽이고 만다. 


전직 형사인 마티아스는 조사를 통해 안젤리크를 의심하게 되고 루이즈의 개입을 막기 위해 그녀를 포박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티아스의 과거가 드러나고 루이즈가 알아낸 마티아스의 헤어진 연인에 대한 정보를 통해 어이없게도 마티아스는 루이즈로 인해 포박당하게 된다. 아무리 불시의 타격이었다고 해도 40대 초반의 전직 강력계 형사가 17세 소녀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게 된다는 설정은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내용들이 긴급하게 흘러가기에 일단 결론이 무엇일지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루이즈에 고백한 마티아스의 비밀은 명예 법정의 결정을 따라 판결을 내리는 집행자의 역할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무슨 비밀결사대를 조종하는 어머어마한 귀족 집단이 있다는 설정 또한 무리수처럼 느껴졌다. 


인간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법 체계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헌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도 실질적인 사건의 내막에 이르렀을 때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할 경우 엄청난 피해를 당한 이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주 오래 전의 법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처럼 보복의 논리로 처벌이 가능하다면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의 어딘가에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집단이 명예 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판결하고 벌을 집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한과 울분과 복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행으로 인해 명예와 존엄함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맞선 이들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자구책에 불과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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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 띵 시리즈 21
신지민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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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민 기자의 [와인: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을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21번째 책이다. 지난 여름 아이스크림 편까지 출간된 띵 시리즈는 겨울을 맞아 특히나 어쩌면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늘어나는 모임에 와인에 대한 시리즈를 발간한 것은 시기적으로나 분위기상으로나 딱 맞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띵 시리즈는 음식에 대한 내용이지만 각 주제의 음식에 별다른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것 같다. 이번 와인 편도 꽤나 즐겁고 유쾌하게 읽혀 몇 번인가 와인잔을 들고 모임을 갖은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부제가 시사하는 바는 역시나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술도 비슷하긴 하겠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이 함정이기에 미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치 '그건 난 모르겠구 일단 와인을 즐기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선언이라고나 할까. ㅋㅋ


어찌보면 우리나라 지방 곳곳도 제대로 여행해 본적이 없는 나에게, 이탈리아 베로나라는 생소한 지명은 뭔가 나만 대도시와 동떨어진 시골 마을로 버려진다는 낙담을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막상 베로나에서 어학과정을 하다보니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집중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통일된 나라여서 그런지 각 도시들 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개성이 넘쳐났다. 그리고 베로나는 결코 후미진 시골 동네가 아니었다. 람보르기니와 같은 수십억에 이르는 스포츠카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부자 도시에 해당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해마다 전세계 와인이 전시되고 시음을 할 수 있는 '비니탈리'라는 와인대회가 열린다. 기회가 되어 한 번 참석해 본 적이 있는데, 예전에는 무한대로 시음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3잔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석 잔으로도 충분히 만취 상태에 이를 만큼 충분한 양을 시음할 수 있게 해줘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진짜 와인에 대한 앎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뭘 마셔도 그게 그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머물던 기숙사에서 매일 거의 무료로 제공되던 다양한 와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겨울 인스부룩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을 둘러보다가 성탄절이 막지나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매서운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오는 차에 우리나라 노점상처럼 생긴 작은 이동식 마켓에서 커다란 잔에 무엇인가를 담아 팔고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커다란 잔을 들고 호호 입김을 불며 마시고 있기에 마치 홀린듯이 나도 한 잔 사서 맛을 보니 그게 바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뱅쇼였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글루바인이라고 불리는 끓인 와인은 여러가지 마른 향신료와 과일을 넣고 끓여 도수를 낮추고 달달함을 더해 그야말로 추위에 얼은 몸을 녹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와인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로마로 내려와서 겨울을 지내게 되면 뱅쇼나 크리스마스 마켓과도 같은 낭만적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비가 너무 자주와서 와인을 데워마실만큼 춥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바티칸이 있는 성탄절은 뭔가 더 대단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는 쓸쓸하고 휑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튼 오랜만에 오래전 애증의 추억이 담긴 베로나를 다녀올 수 수 있게 되었고,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할 수 있었다. 로마와 거의 7-8도 이상 차이 나는 베로나의 쌀쌀함은 뱅쇼를 마시기에 적절했고, 와인이라면 프랑스에 절대 굴복할 수 없어하던 이탈리아의 끓인 와인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Vin brule' 근데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아마도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끓인 와인을 마시지 않기에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북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이라 더욱 생소하게 다가 온 것 같다. 아무튼 뱅쇼라는 알려진 이름이 편하기에 따뜻한 와인 한 잔에 티롤 지방의 소세지와 폴렌타를 함께 먹으니 비싼 기차 타고 온 값을 제대로 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책에도 몇 번 언급되는 [신의 물방]을 와인을 공부하겠다고 몇 권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대사도 너무 많지만 와인을 마시고 맛을 묘사하는 주인공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감상에 닭살이 돋아 책장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 그 만화에서 언급된 유명한 와인이나 디켄팅이 필요한 고급 와인을 마주하게 되면 역시나 다시 [신의 물방울]을 완독해야 하는 것인가란 숙제를 다 하지 못한 떨떠름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마트나 편의점에서 손쉽게 와인을 구매할 수 있기에 분위기 내고 싶은 날이나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을 먹게 될 때 와인을 권하며 친목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럴때마다 어슬프게 아는 와인 지식을 들먹이며 꽤나 아는 척을 했던 지난 날이 떠올라 밍망함이 재생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이번 책이 더 재미있고 유쾌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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