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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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은 작가의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읽었다. 망언이라는 말이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시대이다. 실언도 아니고 망언이라니 아마도 농담처럼 사용되지 않았다면 본래의 뜻을 제대로 담아 내뱉게 되는 순간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이상한 말을 들었을 때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망언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연유를 들여다보게 되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치가들의 헛소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논리를 펼치는 기사와 뉴스를 통해서 큰 헤드라인으로 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곤 했다.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내용을 담은 망언이라는 말이 어느덧 유행어처럼 사용되다보니 본래의 말이 지닌 뜻이 감소되는 것 같이 느껴져 아쉽기만 하다. 며칠 전 기사에서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어르신 중의 한 분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우리와 동시대의 삶을 살아간 분들조차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한맺힌 삶을 마감하셨어야 했으니, 그 옛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공녀로 끌려간 수천명의 소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슬픔과 한은 도대체 어디서 풀어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예전에 국사 공부를 하며 명나라에 공물과 함께 공녀로 보내진 수많은 10대의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운 적이 있었다. 워낙 시간적 거리감이 멀어서였을까. 당시에는 그냥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힘이 약해 나라의 딸들마져 바쳐야했던 비운의 역사에 씁쓸함을 느낀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소설을 통해서 가만히 떠올려보니 공녀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딸이 태어나면 아주 가까운 이웃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하니 딸을 가진 부모와 가족들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서도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고려 시대 학자였던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쓴 편지에 우리나라 처녀들을 데려가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에서 착안했다고 말한다. 원나라부터 이어진 공녀는 결국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2천 명이 넘는 소녀들이 끌려갔다고 하니, 그렇게 비운의 삶을 살다가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들의 삶을 그냥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한 번 고향을 떠나면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다시는 가족을 만나기 쉽지 않았을 지리적 상황에서 같은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 끌려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어찌 다 헤이릴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착안된 이 소설은 제주의 숲속에서 사라진 열세 명의 소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선의 최고의 수사관이었던 민환이와 민매월 자매의 아버지 민제우 종사관은 제주에서 소녀들을 찾다가 실종된다. 큰딸 환이는 목포의 고모집에서 새신부로 끌려가기 전 집을 나와 무작정 아버지를 찾아 제주가는 배를 탄다. 지금과는 다르게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왕의 눈 밖에 난 이들의 유배지이며, 가난과 척박함이 지속된 곳이었다. 또한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뭍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내륙과의 소통이 원할하지 않았기에 탐관오리와 같은 목사가 부임할 경우 수많은 양민들의 재산이 수탈되어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제주의 고유한 전통인 해녀가 생겨난 것은 그렇게 물질을 통해서라도 해산물을 구하지 않는다면 당장 굶어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원나라와 명나라에 끌려간 공녀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환이와 매월 두 자매가 있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지만 환이가 목포에 머물렀다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이는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거부하듯이 아버지처럼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결국 환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종용된 삶을 거부한 것이다. 매월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환이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동행한다. 환이와 매월과는 상반되는 인물로 등장하는 문촌장과 죄인 백씨는 자신의 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이의 딸을 납치하고 민 종사관을 죽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하지만 환이와 매월 자매의 용기있는 수사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며 문촌장과 죄인 백씨의 딸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매의 수사를 도와준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무슨 일까지 했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사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다.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죄인 백씨가 자신을 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소녀를 납치하고 딸의 얼굴을 난도질해서 공녀를 끌려가지 않도록 한 행동이 과연 딸을 위한 일이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딸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아비의 심정이 오죽했겠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 백씨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소설의 무대와 배경만 과거일 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과 딸의 모습은 지금다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처한 어려움과 고통의 종류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과 모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법망을 벗어나고 힘없고 약한 이들이 대신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문촌장과 죄인 백씨와 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뚫릴 것 같지 않는 단단한 바위도 낙숫물 한 방울 한 방울로 인해 반으로 갈라지듯이 독을 먹은 약해진 몸으로도, 신열에 들뜬 몸으로도 동굴 속에 갇힌 소녀들을 찾아낸 민 자매의 용기를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들에게 무한정 빚지고 있는 덕분에 그래도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면구스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것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시련을 주고,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앞길을 장애물로 가로막지. 그러는 동안 가슴에 악을 품은 자의 길으 수월하게 뚫린다네. 악을 퇴치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 사실을 일찍 받아들일수록 삶도 편해질 것이오.(243)”


“이 나라의 암담함에 겁먹은 새처럼 도망쳐서 자기들끼리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빛을 올곧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 대신 싸우고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은 항상 반짝일 거요.(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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