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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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기자의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이다.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인터넷이 요즘처럼 상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종이 신문을 읽는 것이 지성인의 필수요건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당일 신문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를 논평한 사설을 읽는 것을 권장시켰다. 지금도 한자가 게재된 지면 신문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겨례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면 무척이나 반갑고 편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조사를 제외한 거의 중요한 단어들은 거의 다 한자로 병기했기에 옥편을 옆에 두지 않고는 사설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주제를 어렵게 서술한 깨알같은 글을 읽기 싫었는데 한자까지 찾아야 하니 그야말로 양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인터넷의 발달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니 보니, 지면으로 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희박해졌다. 예전에는 신문사에서 정한 순서에 따라 그날의 쟁점의 우선 순위가 정해졌다면, 이제는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이가 눈에 띄는 것을 클릭한 순서에 따라 중요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때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 순위가 항상 메인 화면에 떠 있을 때에는 상위에 올라간 주제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어도 기하급수적으로 관심도가 올라가 버렸다. 지면으로 된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읽는 사람이 적었던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뉴스 접속은 더욱 산발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보니 대체 뭐가 중요한 뉴스인지, 오늘 내가 읽은 기사가 정말로 정확하고 신뢰한 만한 것인지 의구심이 커져만 갔다. 


지면으로 된 신문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때에는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같은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어느 한 쪽의 의견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보다는 왜 이렇게 상반된 시각이 나온 것인지 견주어 볼 수 있었고,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신문사들은 좀 더 완성되고 수준 높은 기사를 게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포털 사이트에서 클릭한 기사가 어느 신문사에 속한 기자의 기사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오타가 심하거나(심지어 머릿말에서도) 비문을 접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이 들어 댓글을 확인해본다. 그런 여지없이 그 글을 쓴 기자에 대한 인신공격과 안 좋은 말들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오타와 비문들은 수정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야 지금처럼 변질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행간에 떠도는 말에 이제는 정규 방송의 뉴스나 신문보다는 유튜브를 봐야 제대로 된 뉴스를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유튜버의 실력과 노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과 동시에 회사처럼 정식으로 구성된 방송사와 신문사가 제대로 된 취재와 기사작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오늘도 몇 번이나 클릭했던 기사의 내용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이 기사는 또 어디에서 우라까이를 한 것일까란 의심부터 들었다. 어차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많은 품을 들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요즘 시대의 소모품처럼 소비되는 행태를 더욱 자극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분명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기사를 옳곧은 마음으로 쓰려는 분들이 있기에 기레기라는 말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우리나라 언론사의 심각한 병폐와 저널리즘의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지만, 저자가 취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읽다보니 소수와 약자들의 사연을 애써 외면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이목을 집중할 거대한 사건이 아닌 경우에 사람들의 시선은 금방 사그러들고 피해자들은 홀로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게 된다. 그들의 고독한 싸움과 투쟁은 그들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자신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들의 투쟁을 손쉽게 말한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해진 삶이라고 하지만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 구조 속에서 비참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되' 혹은 '그건 난 모르겠고' 라는 냉소적인 시선은 소외된 사람들을 패배감에 빠지도록 만들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마음은 자긍심을 놓치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의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으니 그대로 주저앉지 말라는 마음이 이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고 있다. 


"세상엔 억울함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매일 아침 메일함을 열 때마다 확인하는 제보들 중에서도 그런 억울함이 적지 않았지요. 억울함이란 위험한 감정입니다. 스스로 보기엔 부당한데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래서 해소할 수 없게 된 감정이 묵어서 억울함이 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억울함은 점점 단단해지다가 뜨거워집니다. 따로 해소할 방도가 없으니 파괴적으로 분출되기 쉽습니다. 상대를 부수지 못하면 나를 부수고, 끝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이 떠다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대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요. 

기자는 남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돌을 던질 수는 있지요. 그런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이란 얼마나 귀한가요.(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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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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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거짓말]을 읽었다. 제20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이다. 작년에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고 너무 큰 감동을 받고 저자의 왕팬이 되었는데, 2015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 나와서 기대를 안고 읽게 되었다. [레이디 맥도날드]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거짓말]에서도 독특하게 다가온 것은 인간에 대한 작가만의 시니컬한 시선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중요한 핵심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 것 같은, 나라면 도저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기구한 운명에 처한 이들을 쉽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삶을 단정짓는 습관에서 벗어나 나와 동일한 기회를 부여받은 한 객체로서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처럼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최하석은 자살을 꿈꾸고 있다. 방과 후 학교에서 남학생과 알몸으로 교실 커튼을 떼어내 덮고 있다가 경비 아저씨에 발각되어 정학 처분을 받지만, 부유한 부모님의 학교 방문과 학교측의 선처로 정학은 근신으로 바뀐다. 하지만 하석은 근신을 받는 기간에 어이없는 반성문을 써내며 결국 스스로 자퇴를 결행한다. 자살과 자퇴라는 말에는 스스로 뭔가를 결정한다는 주체성이 담겨 있지만, 그러한 행위 이후에 벌어진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주변 인물들에게는 적지 않는 충격을 남길 수 밖에 없는 류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석은 그냥 사춘기 소녀의 반항이라고 보기에는 남다른 냉소적인 시각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형편이기에 엄마 미구 씨는 꽤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리고 여느 부모들과는 달리 미구 씨와 아빠는 하석의 일탈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고 되려 과도한 너그러움으로 자식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도록 한다. 


꽤 괜찮은 학교를 자퇴한 하석은 기숙사가 있는 새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집과는 다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온통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1990년대의 중고등학교가 다 엇비슷했듯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체벌이 난무하던 때였다. 선생님들은 마치 어디에서 단체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법을 배웠기라도 한 듯이 다양한 방법으로 체벌을 행사했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시계를 풀고 본격적으로 때리겠다는 작정을 과시하듯 마대 자루가 부러지면 제 분에 못이겨 눈앞에 놓인 손에 잡히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며 너무나도 이상한게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선생님과 대신 1시간 이상 잔소리를 퍼붓는 선생님 중에 선택을 하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차라리 맞고 말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석이 다니기 시작한 새 학교도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법인가란 반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규율들이 많았다. 1시간 이상 지속되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라든지, 국민 체조와 별다르지 않는 무용 체조를 만들어 그 앞에서 지휘를 하는 선생님이라든지, 남자와 여자 기숙사의 중간에 철문을 만들고 잠궈 사감 선생님이 철저히 감독하고 있다든지, 우등반과 열등반을 나누고 성적순으로 방 배정을 한다든지, 결정적으로 여학생 반에서는 순한 양처럼 수업을 하던 국어 선생님이 남학생 반에서는 책상을 집어 던지는 괴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에서 진부한 체벌 스토리가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하석이 학교를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니스 공이 반복적으로 땅을 튕기며 내는 소리를 듣고 심리적 안정을 취하던 하석은 남 기숙사 학생들이 놓고 간 열쇠로 금지된 구역에 머물게 된 것이 발각되고, 다른 학생들에게 응근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된 하석의 행동은 그 나이대 답지 않은 강철 멘탈을 지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석의 기이한 행동들은 어차피 자신이 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체념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석이 자살을 동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유분방해 보인 엄마 미구 씨와 아빠의 고백으로 반전에 이르게 된다. 엄마와 아빠의 고백 이전에 하석에게는 죽은 언니가 있다는 내용이 간간히 나오는데, 어떻게 죽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미구 씨와 아빠는 천천히 하석이 언니라고 알고 있는 재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석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라고 알고 있었던 재인이 실제로는 자살시도와 3번의 가출 끝에 하석을 인큐베이터에 놔두고 미구 씨와 아빠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완벽한 딸에 가까웠던 재인이 갑자기 어느 날 대체 왜 가출을 하고 부산의 여관 방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깨어난 재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후 다시 가출을 하고 하석을 낳게 된다. 간난쟁이 하석을 남겨 둔 채 재인은 또 다시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구 씨와 아빠는 하석을 자기들의 딸로 키울 것을 다짐하고 하석이 성인이 되면 모든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하석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진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왜 그렇게 자살을 동경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언니가 아닌 엄마 재인의 피를 받아 자신의 DNA에도 20살 이전에 죽고 싶은 마음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다. 


그나마 하석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마음껏 터놓을 수 있었던 PC통신에서 프로작이라는 대화명을 가진 친구를 만나게 되고, 하석은 쥴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작에게 자살을 감행하기 전에 스스로를 망가뜨릴 계획을 알려준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즉흥적인 거짓말에 능한 쥴 마저 프로작을 대면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단정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쥴은 프로작이 누군지 모른 채 물빛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안 좋은 소문으로 유명한 남학생인 프로작을 마주하게 된다. 프로작은 쥴의 이야기를 통해서 쥴이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게 된다. 프로작의 등장에 하석은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살 하고자 하는 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일까? 프로작은 하석의 말 중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담겨 있는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진짜야라는 말로 확인하지 않는다. 하석의 계획을 방해하지도 모함하지도 않고 그저 하석이 자신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기차를 타고 하석이 상상해온 작은 꽃병이 놓인 식당칸에서 프로작과 마주하지만 그동안 막연히 계획해 온 여러가지 자살의 방법을 실현할 수는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석의 엄마 재인이 그랬던 것처럼 호연히 사라지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에게 이유를 찾고 싶어한다. 대체 왜 그런 거냐고? 뭐가 문제냐고 답을 알려달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재인의 사라짐에 대한 이유가 소설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 이유를 결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석의 거짓말을 용납하고 경청하며 지켜봐 준 미구 씨와 아빠와 영재 씨와 프로작처럼 그냥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누군가 떠나지 않고 옆에 있어 준다면 그들의 거짓말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동아줄이 되지 않을까!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무섭다. 왜? 대학에 가고 싶지 않으니까. 왜? 어떤 과에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니까. 왜? 뭐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니까. 왜? 무얼 바라는지 모르니까. 왜?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모르니까. 왜?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니까. 왜?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왜? 무서우니까.

그래서 집을 나간다. 왜?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을 만난다. 그련들에게는 꿈이 있다. 무엇? 여고생이 되는 것. 그다음에는 여대생이 되는 것. 혹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집안을 위해 보탬이 되는 것.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소녀들은 언니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언니는 아무 말도 못 한다. 대학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난에서 벗어날 필요도 없고, 집안을 위해 뭔가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사회를 위해? 그것도 아니다. 언니는 혼자 있는 게 좋기 때문이다. 언니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 학교생활이 숨 막혀서 도망쳤는데, 자신이 도망쳐버린 학교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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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김소영 지음 / 책발전소X테라코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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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를 읽었다. 벌써 5년 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저자의 첫 번째 책인 [진작 할 걸 그랬어]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첫 번째 리뷰는 저자의 남편인 오상진 아나운서의 [당신과 함께라면 말이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히 TV에 나온 두 분의 모습을 보면 괜히 반갑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든다. 처음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아주 짧게 감상을 남겼었다. 매번 책을 읽고 나서도 얼마 후면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아서 뭔가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새 하루 일과 중 아주 중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독후감을 쓰지 않고는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강박까지 생긴 것은 아닌지 부작용이 의심되지만, 어차피 한 평생 뭔가를 써야 하기에 독후감은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뭐 검사 받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제출할 것도 아니니 맘편히 쓰기만 하면 되어서 좋다. 


전작을 읽었을 때도 아나운서의 모습만 생각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었는데, 그 당시 저자가 책방을 내는 준비를 하며 쓴 내용들이라 더욱 호기심을 유발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저자가 엄청난 독서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다음 책을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이번 에세이 또한 아주 훌륭한 책 길잡이 한편이 아닌가 싶다.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각 7권씩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점을 운영하면서 북클럽의 북큐레이터로 책을 권하는 편지를 모은 내용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던 때에 무분별하게 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책 읽는 속도가 책을 사들이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보니 읽지 못한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어느덧 책장의 저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을 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책에 대한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것인지 아닌지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들을 자꾸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독가들은 다 읽지 않아도 표지만 보아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책을 사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 형편에 무턱대도 책을 사들이는 것은 짐을 쌀 때마다 지옥불을 경험하게 해 준다. 솔직히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아카이브나 정재승 교수의 서재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는 환경이기에 그냥 침흘리며 부러워만 해야할 것 같다. 


그런면에서 이번 책은 나처럼 새로운 분야와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주저할 때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저자가 소개한 21권의 책을 모두 다 읽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다. 소개된 책 들 중에 내가 읽은 책은 예전에 쓴 나의 리뷰를 다시 읽어보고 저자의 감상을 뒤따라 가게 되고, 대부분 제목조차 몰랐던 책들은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하나씩 검색해보게 되었다. 어차피 소개된 모든 책들을 다 읽겠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고 그 중에서 몇 권만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다. 이번에 소개된 책들은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이슬아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이장욱 [트로츠키와 야생란],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서], 김겨울 [책의 말들], F. 스콧 피츠제럴드 [행복의 나락], 김혼비 [다정소감], 프레드 울만 [동급생], 김민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클레어 챔버스 [스몰 플레저],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에리카 산체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최희서 [기적일지도 몰라],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금정연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이다. 


서점을 갈때마다 책장처럼 진열된 곳에는 오래된 책들이, 매대에 뉘어 있는 책들은 주로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들이다. 당연히 매대에 놓여 있는 책들이 눈에 잘 띄이게 되고 책을 보러 온 사람들은 표지와 목차를 둘러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신간코너에 놓여 있는 책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 나열 순번처럼 정해진 책장에 꽂히게 된다. 책장에 꽂히게 되면 책머리만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 책을 꺼내보기 전까지 책표지와 그 안에 담긴 매력은 고스란히 감춰지게 된다. 마치 오래된 와인이 코르크 마개로 오랜시간 고유한 맛과 향을 응축하고 있는 것처럼 책 등에 쌓여가는 먼지는 도대체 언제쯤 이 책의 주인이 나타날까 고요히 내려앉는다. 그렇게 신간코너를 쓰윽 살펴보고 책장 숲을 지날 때면 무력함이 밀려오곤 한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책을 많이 내는 걸까? 어디에 사는 누군가가 이렇게 많은 글을 써대는 것일까?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서점에 있는 책의 한 부분이라도 읽을 수 있을까란 무력함 말이다. 그렇게 책장 하나도 다 읽지 못하면서 사람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있게 내 생각을 내뱉었다니 이런 만용이 또 있을까란 생각도 더불어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책을 많이 읽는다고 나에게 엄청난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웬만하면 고착된 생각을 쉽사리 바꾸지 않으려 할 것이고 오히려 잡식이 늘어나서 아는 척을 더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겪고도 살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그리고 내가 가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일이 없는 미지의 곳에서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또 누군가는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주지시킨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머릿속에 그려 내고, 나와는 관계없는 희로애락을 헤아리며 한층 깊어지곤 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도 우리가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삶에 놓인 선택지를 진실로 이해하고 깊이 감사하며 실해하는 사람이 되려면, 때로는 우리의 일상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128)”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나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 -최희서 [기적일지도 몰라]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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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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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 작가의 [급류]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0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전작인 [GV 빌런 고태경]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던터라, 이번 소설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 더군다나 표지의 그림이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는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며, 추천사에 언급된 '종일 사랑만 생각했다'는 말이 책 제목인 급류처럼 예기치않고 내 마음을 장악해버렸다. 'falling in love' 우리가 흔히 듣고 사용하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말은 원래 우리 말에 있었던 표현일까? 아니면 영어를 번역하며 생겨난 말이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다 관용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일단 이 표현의 뜻을 생각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동성이 담겨 있다. 어찌보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응한다. 아침부터 상쾌했던 기분이 출근 길에 우연히 지나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곤두박질 칠수도 있다. 짜증나는 상태로 사무실에 도착하니 또 반대로 직장 동료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분이 풀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마음 다스리기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상담을 받거나 종교적 믿음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격정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그냥 그렇게 나의 의지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소설 속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창석과 미영의 관계를 용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창석은 유능하고 성실한 소방서 구조대 반장이었지만, 아내 정미가 폐렴으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한 사이에 진평으로 이사와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영과 부적절한 만남을 갖게 된다. 창석은 딸 도담과 다이빙을 하러 계곡에 갔다가 물에 빠진 미영의 아들 해솔을 구하게 되고 그들의 인연인 진창 속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묘사되고 창석과 미영의 뒤엉킨 시신이 발견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은 도담과 해솔의 삶이 평탄치 않을 것을 예감케 한다. 어찌보면 진부하고 뻔한 소재로 시작했다는 무력함은 해당 사건을 급속도로 마무리하고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불의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으며 기억되지만, 실상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처럼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소설에서도 여러 차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금지어가 되어버린 진평에서의 사건은 도담이 해솔에게, 그리고 정미가 도담에게 상처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권리가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그 불행의 씨앗이 멀쩡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세상 모든 불행한 일들을 당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 뿐이다. 이 힘없고 아무 쓸모 없을 것 같은 위로의 말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납득이 된다. 하지만 그 납득은 위로의 말을 건냈던 이의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의 늪에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기어나온 자기 자신 덕분이다. 


도담과 해솔의 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아빠와 엄마를 잃게 된 진평의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마다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은 애틋한 포옹과 입맞춤으로도 도저히 해소되지 않았다. 진평에서의 이별 후 대학을 진학한 도담과 해솔은 우연히 재회하고 도담의 자취방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도담은 해솔의 규칙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갈등이 커져간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정미가 예고없이 도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도담과 해솔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정미는 분노에 차올라 헤어질 것을 강요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도담과 해솔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때이다. 도담은 물리치료사로 병원에서 근무하며 파혼의 상처를 가진 승주와의 연인 비슷한 관계를 이어가고 해솔은 도담과의 이별 후 소방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휴가 때 우연히 마주친 선화와 함께 간 한강 공원에서 투신한 고등학생을 구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도담은 자신을 파괴하려던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던 도중 뉴스에서 보도되는 해솔의 사고를 접하게 된다. 해솔은 한강에서 고등학생을 구한 후 약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소방서에서 구조대로 활동하게 된다. 도담의 아버지 창석이 그랬던 것처럼 해솔은 사고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한다. 도담이 뉴스에서 봤던 사고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해솔이 그렇게 자신을 투신하며 언젠가 도담이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며 보내온 시그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소설은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부모의 불행을 대 잇지 않고 도담과 해솔만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솔은 도담이 처음 만났던 부드러운 손을 가진 유약한 소년이 아니라 몸의 여러곳에 화상 자국이 깊이 남은 어른의 모습으로 그들의 사랑이 다시 연결되기까지의 생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를 끊임없이 피와 진물이 흐르고 마르는 딱지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도담과 해솔은 당당히 그 시간을 마주했고 급류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100)"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출동을 나가서 매일 사고 현장을 목격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 자다가 말벌에 쏘여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는 살아남고,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사망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 그런 현장을 수두룩하게 겪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신도 없고 인과응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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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가라사대 - 청년 목수의 '건방 쩌는' 건설 현장 이야기, 2022 우수출판컨텐츠 선정작
송주홍 지음 / 시대의창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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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홍 작가의 [노가다 가라사대]를 읽었다. 부제는 “청년 목수의 ‘건방 쩌는’ 건설 현장 이야기”이다. 2022년을 시작하며 [노가다 칸타빌레]를 읽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고, 우리나라 건설 노동 현장의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해를 지나 우연히 다시 서점에서 저자의 후속작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궁금했고, 여전히 형틀목수의 일을 하며 1년 만에 다시 책을 내었다니 정말 놀라운 성실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러한 부류의 책을 읽을 때면 리뷰를 남기는 것조차 망설여지곤 한다. 대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와 행여나 현장의 삶을 사는 분들에게 심려를 끼치는 말을 남기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노가다를 해보지 않아도 삽질이나 곡괭이질을 할 수 있는 것은 군복무를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다양한 작업거리의 지시가 하달된다. 심지어 진지보수를 하거나 구덩이를 만드는 이유가 딱히 할 일이 없는 기간에 몸을 놀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야말로 무상의 노동력을 가만히 나둘 이유가 있겠는가?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1등급을 받으려 애쓰며 어디에 배치가 되던 상관없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보충대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면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편한 보직을 받을 수 있을까란 상념에 빠졌다. 군대에서도 학벌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기 전까지 말이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사단 본부에서 필요한 우수한 자원들이 빠지고 연대 본부에서 또 조금 덜 우수한 자원들이 빠지고 대대 본부에서 또 그렇게 쫌 덜 우수한 자원을 빼고 더 이상 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최후의 보루로 행정실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아주 우수와 그럭저럭 우수의 모든 자원들이 빠져나가기까지 난 어째서 한 번도 걸려지지 않은 것인지 그냥 몸으로 때워야 하는 보직을 받게 되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는데, 나를 잘 몰랐던 고참들끼리 나를 두고 ‘힘들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니 왜 나에게 그런 이상한 별명이 붙었는지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이런 저런 작업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아오 힘들어 죽겠네’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것이다. 내막을 알고나니 부끄러움이 한도까지 차올라 내 입을 꿰메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럭저럭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시작한 군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를 꽤나 아껴주는 선임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 군번에 해당되는 선임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라 반갑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뭘하고 지내느냐는 질문에 갑자기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선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뭐 재주가 있냐? 그냥 노가다 하면서 입에 풀칠한다. 넌 어떻게 지내? 이제 복학하는 거야?” 어떻게 통화를 마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그 선임 생각이 났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이제는 노동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어디선가 책임자를 맡고 있지는 않을까 막연히 기대해본다. 


얼마전 가족모임을 하며 조만간 맞이하게 될 조카들의 취업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형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바로 공부야. 공부만큼 쉬운 일이 없어.” 혹자가 들으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형 말이 맞는 것 같다. 공부야말로 그냥 나 혼자 성실하게 잘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공부말고 나 혼자 잘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특히나 노가다 현장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빨리와 헐레벌떡 일하는 현장에서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관계를 통해서 가장 큰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관계가 필요없으니 가장 쉬운 일이 맞는것 아닐까? 물론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어디에서든지 관계를 맺고 일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내 입에 밥을 먹여주는 노동은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이 가장 신성하며, 가장 욕된 순간에도 나를 버티게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인용한 김훈 작가의 글은 몸을 지탱하기 위한 지긋지긋한 밥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준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99)”


특히나 이번 책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부분은 ‘촉촉하게 젖은 사람들’라는 쳅터이다. 항상 큰 현장에서만 일하던 저자가 원룸 공사 현장에서 만난 아저씨들의 이야기이다. 큰 현장에서는 작업 중에 술을 마시는 일 불가능한데, 저자가 놀란 작은 현장에서는 아저씨들이 아침부터 아니 어제 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종일 거의 취한 상태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불감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짐작하며 이어진 내용을 읽다보니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천명관 작가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라는 소설을 오마주하여 그 아저씨들의 일상을 전해준다. 

“다들 그랬다고 한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인생이었다. 군대 다녀와 노가다판에 왔더니만, 일 못 한다고 욕먹고, 눈치 없다고 욕먹는 신세였다. 돈 없고 빽 없는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서러운데 욕까지 먹으면서 일하려니 더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참 먹을 때 나눠주는 한잔 술에 위안을 얻었다. 그것으로 젊은 날 차올랐던 세상에 대한 울분을 식힐 수 있었다. ~~ 언젠가부터 외롭다고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가봐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자기 방으로 ‘훽’ 들어가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날 더운데 수고했다는 한마디 건네주지 않는 아내와 마주할 때마다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 일찍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23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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