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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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거짓말]을 읽었다. 제20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이다. 작년에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고 너무 큰 감동을 받고 저자의 왕팬이 되었는데, 2015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 나와서 기대를 안고 읽게 되었다. [레이디 맥도날드]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거짓말]에서도 독특하게 다가온 것은 인간에 대한 작가만의 시니컬한 시선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중요한 핵심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 것 같은, 나라면 도저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기구한 운명에 처한 이들을 쉽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삶을 단정짓는 습관에서 벗어나 나와 동일한 기회를 부여받은 한 객체로서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처럼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최하석은 자살을 꿈꾸고 있다. 방과 후 학교에서 남학생과 알몸으로 교실 커튼을 떼어내 덮고 있다가 경비 아저씨에 발각되어 정학 처분을 받지만, 부유한 부모님의 학교 방문과 학교측의 선처로 정학은 근신으로 바뀐다. 하지만 하석은 근신을 받는 기간에 어이없는 반성문을 써내며 결국 스스로 자퇴를 결행한다. 자살과 자퇴라는 말에는 스스로 뭔가를 결정한다는 주체성이 담겨 있지만, 그러한 행위 이후에 벌어진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주변 인물들에게는 적지 않는 충격을 남길 수 밖에 없는 류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석은 그냥 사춘기 소녀의 반항이라고 보기에는 남다른 냉소적인 시각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형편이기에 엄마 미구 씨는 꽤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리고 여느 부모들과는 달리 미구 씨와 아빠는 하석의 일탈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고 되려 과도한 너그러움으로 자식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도록 한다. 


꽤 괜찮은 학교를 자퇴한 하석은 기숙사가 있는 새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집과는 다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온통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1990년대의 중고등학교가 다 엇비슷했듯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체벌이 난무하던 때였다. 선생님들은 마치 어디에서 단체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법을 배웠기라도 한 듯이 다양한 방법으로 체벌을 행사했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시계를 풀고 본격적으로 때리겠다는 작정을 과시하듯 마대 자루가 부러지면 제 분에 못이겨 눈앞에 놓인 손에 잡히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며 너무나도 이상한게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선생님과 대신 1시간 이상 잔소리를 퍼붓는 선생님 중에 선택을 하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차라리 맞고 말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석이 다니기 시작한 새 학교도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법인가란 반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규율들이 많았다. 1시간 이상 지속되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라든지, 국민 체조와 별다르지 않는 무용 체조를 만들어 그 앞에서 지휘를 하는 선생님이라든지, 남자와 여자 기숙사의 중간에 철문을 만들고 잠궈 사감 선생님이 철저히 감독하고 있다든지, 우등반과 열등반을 나누고 성적순으로 방 배정을 한다든지, 결정적으로 여학생 반에서는 순한 양처럼 수업을 하던 국어 선생님이 남학생 반에서는 책상을 집어 던지는 괴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에서 진부한 체벌 스토리가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하석이 학교를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니스 공이 반복적으로 땅을 튕기며 내는 소리를 듣고 심리적 안정을 취하던 하석은 남 기숙사 학생들이 놓고 간 열쇠로 금지된 구역에 머물게 된 것이 발각되고, 다른 학생들에게 응근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된 하석의 행동은 그 나이대 답지 않은 강철 멘탈을 지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석의 기이한 행동들은 어차피 자신이 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체념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석이 자살을 동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유분방해 보인 엄마 미구 씨와 아빠의 고백으로 반전에 이르게 된다. 엄마와 아빠의 고백 이전에 하석에게는 죽은 언니가 있다는 내용이 간간히 나오는데, 어떻게 죽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미구 씨와 아빠는 천천히 하석이 언니라고 알고 있는 재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석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라고 알고 있었던 재인이 실제로는 자살시도와 3번의 가출 끝에 하석을 인큐베이터에 놔두고 미구 씨와 아빠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완벽한 딸에 가까웠던 재인이 갑자기 어느 날 대체 왜 가출을 하고 부산의 여관 방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깨어난 재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후 다시 가출을 하고 하석을 낳게 된다. 간난쟁이 하석을 남겨 둔 채 재인은 또 다시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구 씨와 아빠는 하석을 자기들의 딸로 키울 것을 다짐하고 하석이 성인이 되면 모든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하석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진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왜 그렇게 자살을 동경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언니가 아닌 엄마 재인의 피를 받아 자신의 DNA에도 20살 이전에 죽고 싶은 마음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다. 


그나마 하석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마음껏 터놓을 수 있었던 PC통신에서 프로작이라는 대화명을 가진 친구를 만나게 되고, 하석은 쥴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작에게 자살을 감행하기 전에 스스로를 망가뜨릴 계획을 알려준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즉흥적인 거짓말에 능한 쥴 마저 프로작을 대면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단정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쥴은 프로작이 누군지 모른 채 물빛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안 좋은 소문으로 유명한 남학생인 프로작을 마주하게 된다. 프로작은 쥴의 이야기를 통해서 쥴이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게 된다. 프로작의 등장에 하석은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살 하고자 하는 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일까? 프로작은 하석의 말 중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담겨 있는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진짜야라는 말로 확인하지 않는다. 하석의 계획을 방해하지도 모함하지도 않고 그저 하석이 자신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기차를 타고 하석이 상상해온 작은 꽃병이 놓인 식당칸에서 프로작과 마주하지만 그동안 막연히 계획해 온 여러가지 자살의 방법을 실현할 수는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석의 엄마 재인이 그랬던 것처럼 호연히 사라지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에게 이유를 찾고 싶어한다. 대체 왜 그런 거냐고? 뭐가 문제냐고 답을 알려달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재인의 사라짐에 대한 이유가 소설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 이유를 결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석의 거짓말을 용납하고 경청하며 지켜봐 준 미구 씨와 아빠와 영재 씨와 프로작처럼 그냥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누군가 떠나지 않고 옆에 있어 준다면 그들의 거짓말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동아줄이 되지 않을까!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무섭다. 왜? 대학에 가고 싶지 않으니까. 왜? 어떤 과에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니까. 왜? 뭐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니까. 왜? 무얼 바라는지 모르니까. 왜?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모르니까. 왜?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니까. 왜?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왜? 무서우니까.

그래서 집을 나간다. 왜?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을 만난다. 그련들에게는 꿈이 있다. 무엇? 여고생이 되는 것. 그다음에는 여대생이 되는 것. 혹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집안을 위해 보탬이 되는 것.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소녀들은 언니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언니는 아무 말도 못 한다. 대학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난에서 벗어날 필요도 없고, 집안을 위해 뭔가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사회를 위해? 그것도 아니다. 언니는 혼자 있는 게 좋기 때문이다. 언니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 학교생활이 숨 막혀서 도망쳤는데, 자신이 도망쳐버린 학교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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