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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정대건 작가의 [급류]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0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전작인 [GV 빌런 고태경]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던터라, 이번 소설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 더군다나 표지의 그림이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는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며, 추천사에 언급된 '종일 사랑만 생각했다'는 말이 책 제목인 급류처럼 예기치않고 내 마음을 장악해버렸다. 'falling in love' 우리가 흔히 듣고 사용하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말은 원래 우리 말에 있었던 표현일까? 아니면 영어를 번역하며 생겨난 말이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다 관용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일단 이 표현의 뜻을 생각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동성이 담겨 있다. 어찌보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응한다. 아침부터 상쾌했던 기분이 출근 길에 우연히 지나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곤두박질 칠수도 있다. 짜증나는 상태로 사무실에 도착하니 또 반대로 직장 동료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분이 풀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마음 다스리기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상담을 받거나 종교적 믿음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격정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그냥 그렇게 나의 의지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소설 속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창석과 미영의 관계를 용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창석은 유능하고 성실한 소방서 구조대 반장이었지만, 아내 정미가 폐렴으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한 사이에 진평으로 이사와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영과 부적절한 만남을 갖게 된다. 창석은 딸 도담과 다이빙을 하러 계곡에 갔다가 물에 빠진 미영의 아들 해솔을 구하게 되고 그들의 인연인 진창 속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묘사되고 창석과 미영의 뒤엉킨 시신이 발견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은 도담과 해솔의 삶이 평탄치 않을 것을 예감케 한다. 어찌보면 진부하고 뻔한 소재로 시작했다는 무력함은 해당 사건을 급속도로 마무리하고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불의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으며 기억되지만, 실상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처럼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소설에서도 여러 차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금지어가 되어버린 진평에서의 사건은 도담이 해솔에게, 그리고 정미가 도담에게 상처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권리가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그 불행의 씨앗이 멀쩡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세상 모든 불행한 일들을 당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 뿐이다. 이 힘없고 아무 쓸모 없을 것 같은 위로의 말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납득이 된다. 하지만 그 납득은 위로의 말을 건냈던 이의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의 늪에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기어나온 자기 자신 덕분이다.
도담과 해솔의 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아빠와 엄마를 잃게 된 진평의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마다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은 애틋한 포옹과 입맞춤으로도 도저히 해소되지 않았다. 진평에서의 이별 후 대학을 진학한 도담과 해솔은 우연히 재회하고 도담의 자취방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도담은 해솔의 규칙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갈등이 커져간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정미가 예고없이 도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도담과 해솔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정미는 분노에 차올라 헤어질 것을 강요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도담과 해솔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때이다. 도담은 물리치료사로 병원에서 근무하며 파혼의 상처를 가진 승주와의 연인 비슷한 관계를 이어가고 해솔은 도담과의 이별 후 소방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휴가 때 우연히 마주친 선화와 함께 간 한강 공원에서 투신한 고등학생을 구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도담은 자신을 파괴하려던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던 도중 뉴스에서 보도되는 해솔의 사고를 접하게 된다. 해솔은 한강에서 고등학생을 구한 후 약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소방서에서 구조대로 활동하게 된다. 도담의 아버지 창석이 그랬던 것처럼 해솔은 사고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한다. 도담이 뉴스에서 봤던 사고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해솔이 그렇게 자신을 투신하며 언젠가 도담이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며 보내온 시그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소설은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부모의 불행을 대 잇지 않고 도담과 해솔만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솔은 도담이 처음 만났던 부드러운 손을 가진 유약한 소년이 아니라 몸의 여러곳에 화상 자국이 깊이 남은 어른의 모습으로 그들의 사랑이 다시 연결되기까지의 생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를 끊임없이 피와 진물이 흐르고 마르는 딱지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도담과 해솔은 당당히 그 시간을 마주했고 급류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100)"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출동을 나가서 매일 사고 현장을 목격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 자다가 말벌에 쏘여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는 살아남고,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사망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 그런 현장을 수두룩하게 겪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신도 없고 인과응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