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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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호 언어치료사의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를 읽었다. 부제는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쌓기의 기록”이다.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여 속독이 가능한 내용이 아니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저자가 아이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져 그냥 끝까지 읽기를 포기할까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책을 한 편에 접어두고 다른 소설책을 읽으며 정말로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만났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텐데 그리고 가족들은 여전히 그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온전한 시간을 견디어내고 있을텐데.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나와 상관없는 이들이라고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눈을 감아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갑작스럽게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처럼 아파와 눈물이 맺히는 것 또한 순간적인 위선은 아닌지 부끄럽기만 한 며칠이었다. 


저자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과의 치료 과정을 읽으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래 나에게도 심각한 장애가 있는 먼 친척이 있었다. 자주 볼 기회도 없었고 그 집을 가야만 볼 수 있었던 나보다 몇 살 많아보인 그는 마치 유아기 아이처럼 거대한 보행기 안에서 몸을 의지한 채 괴상한 소리를 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린 마음에 그가 무섭게만 느껴졌고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서 얼른 지나쳐 버리곤 했었는데. 어쩌면 나의 친척도 저자의 책에 나온 유형의 아이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남남이었지만 어떤 우연이 겹쳐 우리는 친척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가 더 오래살았다면 몇 번 더 지속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유년기의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한 장면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혈연관계를 넘어서 우리는 언제든 소통이 불가능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를 안고 태어났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유기적 생물체인 인간 또한 언제나 완벽한 구조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와 원인 때문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자람과 불편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적 고통과 어려움에 견주어 자신의 삶을 위로받는 치사함이 유혹을 무시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의미를 직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저자가 만났던 다양한 유형의 말하기의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또 다시 부끄러운 과거의 단편이 떠오른다. 이렇게 물리적 거리에서 멀리 활자를 통해 느껴지는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맞딱뜨렸을때는 제대로 작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면했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좋지 않아 다음에 만나면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막상 다시 마주하게 되면 또 다시 짜증이 나거나 어서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짓고만 싶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란 자책을 하고 싶지 않아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부디 소통이 어려운 이들과의 만남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언어치료사란 어떤 은총을 받았기에 이토록 지리멸렬한 싸움을 잘 해낸다 말인가란 주제넘은 감탄에 빠지게 된다. 저자가 매 순간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쓴 편지글은 경탄과 존경을 자아내며, 나와 같은 부족한 수많은 어른들을 대신하여 이 세상의 어긋나고 빈틈을 열심히 메꾸어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치료를 마치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끊임없이 응원하며 어디선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거침없이 말을 하면서도 매 순간 후회하고 자책해온 나의 하루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마음이 매 페이지마다 따뜻하게 느껴져 익명의 독자인 나 또한 힘을 얻어간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나는 그 말을 진실로 믿지만 한 번도 내 인생에서 무언가를 결정지어야 할 가치 기준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자기 희생이, 생명의 소중함과 내 삶을 맞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생명의 소중함’이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에서 통용되는 ‘좋은 말’에 불과했던 거야. 그래서 태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잘생긴 네 형은 그 당연한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거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143)”


“장애는 본인은 물론 가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처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가족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나마 삶의 파도를 헤쳐 가는 사람들과 오래 함께 일하며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동정과 연민은 행복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는 힘내라는 말보다 묵묵히 그 옆자리를 지키는 게 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장애라는 말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주니네 가족은 이미 그 일을 해냈는지도 모른다.(255)”


#언어가숨어있는세계 #김지호 #한겨례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언어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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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부탁해 소설x만화 : 보이는 이야기
박서련 지음, 정영롱 만화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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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정영롱 작가의 [제사를 부탁해]를 읽었다. ‘소설*만화 보이는 이야기’ 시리즈 첫 번째 책으로 제사상 코디네이터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과 그의 뻥쟁이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동안 유명해진 소설이 나중에 만화로 재탄생되는 경우는 간혹 본 적이 있어도 이렇게 소설과 만화가 동시에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뒤에 부록처럼 첨부된 창작일지를 보니 소설과와 만화가와 편집자가 함께 의견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새로운 형식의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동일한 스토리라인을 따라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추구하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통일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창작의 과정에서 협업은 혼자 하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혼자 작업을 할 때에는 과정에 대한 미더운 마음과 결과물에 대한 의구심이 밀려드는 것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지속되기는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기에 불필요한 감정적 소모는 덜 할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창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때로는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뜻한다.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성향 등은 협업을 피로하게 만들고 심지어 괜히 시작했다는 하지 말아야할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 소모를 잘 견디어내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면 혼자 작업할 때와는 색다른 매력을 가진 작품이 탄생되기도 한다. 

‘제사상 코디네이터’라는 색다른 직업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이야기는 당연히 누군가의 죽음을 담고 있다. 주인공 수현은 제사를 준비할 수 없거나 제사를 지낼 수 없거나 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찜찜한 이들의 제사를 대신 차려 주고 예를 거행한다. 유교문화의 일환인 제사는 우리나라 명절과 죽은 이를 기리는 예식에서 필수적인 전례였다. 하지만 제사의 예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단지 유교의 사상에만 입각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불교적인 해석과 더불어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방에 쓰인 신을 부르는 문구나 음식을 차려놓고 죽은 이가 와서 먹기를 기다라며 자정에 맞춰서 방문을 열어 놓았던 관행은 조상신이 자손을 잘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미신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아무리 종교적 신심이 강하다 할지라도 불행한 숫자와 요일에 대한 강박이나 손없는 날에 이사를 가는 게 좋다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종교 이전에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제사는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아 행할 수 없는 이들조차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사상을 차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되면 그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제사상 코디네이터 수현은 이렇게 제사를 대신해주며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의 근심을 누그러트린다. 소설 속에 등장한 새로운 직업이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직업이 보편화될지도 혹시 지금 어디선가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서련 작가의 짧은 소설을 읽을 때에는 수현과 정서의 관계 그리고 정서의 딸과 함께 1주기 기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막연히 상상하게 된다. 사춘기 딸의 무심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서가 가장 좋아했을 불량식품 쥐포를 준비해온 수현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정서의 아이돌 취향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정서의 딸에게 정서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정보를 검색하던 수현은 갑작스럽게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수현은 왜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간 것일까? 아직 상점이 닫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 수현은 무엇을 사러 나갈 것일까? 수현과 정서의 이야기에 가장 중요한 화두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몹시 궁금하면서도 혹시나 소설을 읽는 동안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이어지는 정영론 만화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은 장면들이 펼쳐졌다. 글로써 연상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말풍선을 담은 실제의 인물로 눈앞에 그려지니 좀 더 생생하게 그 둘의 과거와 현재를 그려볼 수 있었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정서가 유령처럼 수현과 정서의 딸이 제사를 지내는 주위를 맴도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해온 모습이어서 친근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는 수현과 정서의 딸이 제사를 지내는 도중 갑자기 방문이 닫히는 장면을 만화 속에서는 정서를 유령으로 등장시킴으로써 남편의 부재에 화를 내는 모습으로 그려내 재미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부분인 수현이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간 이유는 정서에 대한 그리움을 제대로 기리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수현이 맡은 제사상 코디네이터나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일상이 죽은 이들의 예를 기리는 절차를 밟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고 슬픔에 젖은 이들을 지켜보는 일이기에 죽음에 대해서 무덤덤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현도 그 일을 계속 해나갈수록 점점 더 그런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겉으로는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제사를 대행하며 진중한 말과 행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얼토당토 되지도 않는 말로 어릴적 자신을 위로했던 정서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그녀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생일케익을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간다. 결국 예의니 도리니 하는 말로 절차와 형식을 중요했던 종교적 문화적 제례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내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리라.

“제사를 모시는 게 직업이어서, 제사상이라면 지겹도록 차려봐서 이 일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 남들의 마음을 대신해 내 마음을 바치곤 해서 내 진짜 마음은 한참 전에 닳아 없어진 줄 알았다. 아니야, 착각이었지.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정말 다 갈아 없애겠어. 꼭꼭 잘 숨겨두고는 없어졌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쳤던 거지. 그걸 갑자기 깨달아버린 나는 지금, 뛰지 않을 수 없다.(46)” 


#박서련 #정영롱 #제사를부탁해 #문학동네 #제사상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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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마음 -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
이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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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희 작가의 [사는 마음]을 읽었다. 부제는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이다.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당연히 '살다'라는 동사가 활용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제를 살펴보니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산다는 뜻이 담긴 제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읽다보니 제목에는 '살다'와 '산다'의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지금처럼 현대화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소비에 무관심한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삶을 선택하지 않은 이상, 아니 그렇게 외딴 곳에 살려고 해도 최소한의 생필품은 어디선가 구입을 해야만 한다. 원시 문명은 맛조차 보지 못한 이미 근대화된 세계에 길들여진 몸은 편의를 제공하는 수많은 물건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듯 어떤 특정한 물건을 사용하다보면 같은 용도를 가진 여러 종류의 물건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좋거나 자신에게 맞는 물건을 개별적인 기준에 맞춰 구입하게 된다. 


성인이 되기 전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아끼고 아껴 장바구니에 쟁여두었던 것을 몇 달 만에 사고 나서 소소한 기쁨에 만족해 하던 시기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계획이 필요하지 않은 때이다. 하지만 막상 직업을 갖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소비는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만족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그로 인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의 글에 나온 것처럼 뭔가를 사기 전에 비슷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뭘 사기 전에 자주 고민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1) 당장 죽을지도 모르고 죽으면 돈을 가져갈 수 없으니 돈을 쓴다. 2) 언제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니 돈을 쓰지 않고 아낀다. 하지만 일관된 입장에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하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하고 현재도 즐기곤 한다. 뿐만 아니라 선택지는 두 가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3) 오래 살지 모르는 데 돈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삶에 필수적인 물건들, 가령 집 같은 것을 살 때는 거기 오래오래 살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사들여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194-195)"


어떤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죄악시하고 속물처럼 여기는 때가 있었다면, 이제는 과감하게 플렉스를 즐기고 타인에게 보란듯이 과시하는 것을 동경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셀럽은 돈다발이나 금괴를 가득 고급 스포차카에 채우고 자신을 숭배하라는 듯 물신주의의 팽배를 보여준다. 검소와 절약은 어느덧 꼰대의 잔소리의 영역에 속한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린 것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윤리적 개념의 잣대를 무작정 들이대기보다는 적정한 소비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참고할 모델들이 필요한 때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유아들에게 애착인형이 보편화되어가는 것 같다. 꼭 인형이라고 볼 수는 없고 아끼는 베개일수도 이불일수도 아님 손때와 고유한 냄새가 새겨진 물건을 말한다.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하고, 잘 보관하기만 한다면 나이가 들어서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어 시름을 덜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유아기 때에만 어떤 특정한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애착을 갖는 물건이 한 두가지 정도는 반드시 있다. 그래서 저자는 부제에 '반려 물건'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 보았던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온 장동건 배우와 김하늘 배우는 서로가 호감을 갖고 만남을 이어가던 차에 남자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자를 난감한 상황에 빠지도록 만든다. 여자는 그 상황이 납득이 되면서도 골이 나서 남자에게 소심한 복수를 감행하는데, 바로 그 남자가 아끼는 차에 그윽한 향기가 가득 고이도록 말린 오징어를 널어놓아 바닷가의 부두 앞에 방치해버리는 것이다. 차를 찾으러 간 남자는 자신이 아끼던 차가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을 밤새 맞도록 방치해 둔 것에도 분노가 치밀지만 설상가상으로 차 문을 열자 구린내로 가득한 차 안에서 비명을 지른다. 고소한 여자는 울그락붉그락한 남자에게 한술 더 약올리기 위해 그렇게 아끼는 차에 혹시 고유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냐고 묻고 남자는 입을 삐죽 내밀고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 드라마를 볼 때만 해도 여자 주인공이 폭소를 터트리며 어떻게 차에 이름까지 붙이냐며 웃는 것처럼 무생물에 불과한 차에 반려 동물처럼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생애 첫 차가 생기고(비록 중고차임에도) 이래저래 관심을 쏟다보니 어느덧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름을 붙이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시간이 흘러 첫차를 떠나보내고 드디어 진짜 새 차를 구입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신기하게도 떠나보낸 차를 바로 옆 차선에서 보게 되었다. 아니 이런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어 번호판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신호가 바뀌지 않기를 바라며 나도 모르게 그 차의 이름을 크게 부른 적이 있다. 


애정을 담는다는 것은 신기하게도 그 물건이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마치 나의 삶을 도와주는 조력자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우리의 이런 마음을 저자는 과거의 나의 삶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설명해준다. 


"아무튼 내가 나의 옛 바이올린이나 오래된 자동차 앞에서 말을 조심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물론 내가 나이가 들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주책맞은 중년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나의 추억이 깃든 물건에 대해, 궁긍적으로는 나의 추억에 대해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예의는 '사회생활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다. 나의 추억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결국 과거의 나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추억에 매달리는 것이 어떤 면에서 건강하지 않을 수 있는지 나는 안다. 하지만 추억에 대해 적절한 예의를 차리는 것은 나를 아끼고 내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는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내 추억이 어린 물건을 잘 대접하는 태도, 옛것을 함부로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는 태도는 단지 물질이나 사물에 대한 숭배의 태도가 아니라 나를 긍정하는 태도라고 본다.(256)"


앞으로도 수많은 물건을 필요에 따라 구입하고 낡은 것을 버려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물건에 의지해 도움을 받아 안위한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낭비를 일삼으며 그 물건의 원천이 되는 자연에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서 저자의 글이 꼭 필요한 것 같다. 나의 추억과 함께 한 물건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은 새로 함께 할 물건을 구입할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물건을 만드는 이의 정성과 그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내 손에 이르도록 해준 수많은 이들이 노동이 함께 했음을 기억하는 것 또한 삶에 있어 중요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사는마음 #이다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반려물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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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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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 남궁인 작가의 [우리 사인에 오해가 있다]를 읽었다. 두 작가가 1년간 지속해온 서간문의 모음집이다. 책이 나올 무렵부터 익히 보아온 제목이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읽을 기회를 놓쳤다가 이번에도 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카톡과 DM과 댓글이 넘쳐나는 순간접속의 시대에 서간이라니 마치 지하철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우연히 마주친 고대 유물의 흔적처럼 이미 인간의 역사에서 저만치 사라진 기억을 작가들만의 전유물처럼 지속해온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요즘은 군대에 가서도 부모님께 편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훈련소를 비롯한 부대의 장교들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가 사병들의 안위를 가족들이 볼 수 있도록 카페나 블로그와 같은 형식의 웹사이트에 업로드 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과가 끝난 후에는 자유롭게 개인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대체 편지를 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진짜 편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갠톡이든 단톡이든 톡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가끔은 상대방의 메시지에 대한 오해가 생길 때가 있다. 특히어설프게 아는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라서 행여나 공격적인 감정의 요소가 담기지 않을까 염려하며 진중하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냥 통화하면 편할텐데, 메시지에 길들여지면 나도 모르게 폰포비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통화는 바로 연결되지 않아도 메시지를 남겨 놓으면 언제든 여유가 생길때 대답을 해줄테니 그것 또한 편리한 소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점점 더 직접적인 통화의 어려움이 커져간다. 단답형의 인스턴트 메시지에서는 이런 오해가 빈번히 일어날 수 밖에 없지만, 1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쓴 서간문을 주고받은 작가들의 책 제목마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니 어쩌면 이 책의 주된 요지인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귀하다’는 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몰라도 되는 사전 정보이겠지만 두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보니, 두 분은 서로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배를 타고 함께 한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일간 이슬아를 시작으로 전업작가의 대열에 들어선 이슬아 작가와 의사이자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남궁인 작가의 만남은 어쩌면 시작부터 화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어찌보면 각자의 자리에서 핵인싸인 두 분이 이렇게 솔직담백하게 불호령을 내리고 변명을 하고 용서를 하고 이해하고 또 다름을 주장하는 서간의 연속은 물리적으로 떨어진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편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편지를 쓰며 편지를 받은 수신자를 생각하다보면 어느덧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는 말과 수신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다보니 수신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은 정반대이면서도 닮아 있다. 


아마도 몇 주간에 걸쳐 주고 받은 서간의 내용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두 작가의 일상도 엿볼 수 있었는데, 과연 사람에게 바쁘다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었다. 앞서 말한 사전 정보에 해당되는 부분일텐데 두 작가는 서로가 서로의 글을 모조리 다 읽어서 그런지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두 분 다 보통 바쁘게 사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구독료를 받고 쓴다고 해도 매일 매일 독자들을 만족시킬 일정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래저래 다른 일도 분명 있을테고 사람도 만나고 휴식도 취해야할텐데 말이다. 글을 쓰는 것에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말하는 또 다른 저자는 의사이고 그것도 응급실에서 근무를 하는데 퇴근을 하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슬아 작가의 남궁이 작가의 강인한 체력을 칭송하며 전업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코어의 힘을 강조한다. 체력의 재분배를 통해서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담념할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서간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슬아 작가의 통계 논문과도 같은 서로의 서간문을 비교하는 내용은 누군가 내가 보낸 편지를 이토록 정성들여 분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적이면서도 약간은 뒷통수를 맞은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두 작가의 이전 작품과 앞으로 나올 새로운 책들이 기대되며 서간문의 매력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새해 첫날에도 저는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그런 날들의 응급실은 어떨 것 같습니까. 병원 밖 보통 사람들은 행복한 날이지요. 대신 응달에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처절하게 불행에 떠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들뜬 세상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고독을 목격하는 일입니다.(73)”


“아무래도 자신의 사연이 소진될 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일 겁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조금 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입장에 설 수박에 없습니다. 반성하고 주위를 되돌아보고 읽고 이해하는 것이 글쓰기를 계속하는 행위니까요.(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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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시리즈 55
장강명 지음 / 위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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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아무튼, 현수동]을 읽었다. 부제는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이다. 아무튼 시리즈 55번째 책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늦은 밤에는 어린 나만 작은 플라스틱 대야에 응가를 처리했고, 낮이면 주인집에 있는 퍼세식 화장실의 문을 빼꼼 열어놓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응가의 대사를 치뤘다고 한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운데 그 어린 나이에도 아닌척 허세를 떨며 노래를 불렀던게 아닌가 싶다. 지금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이미 철거되어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찾으려고 한다면 그 집이 있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텐데,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어쩌면 태어난 도시를 떠나 처음으로 오래 살았던 타국의 도시를 십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몇 번이나 그 나라를 방문했음에도 그 도시만큼은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야하는 만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십년이 넘었는데도 성인이 된 다음의 기억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타국에서 지낸 첫 번째 도시여서 그랬는지 그곳의 삶을 마무리하며 나름 정든 장소를 갈무리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어쩌다 손님이 찾아오면 노을이 질 무렵 때를 맞춰 잔잔한 강물이 흐르는 오래된 다리에 데리고 가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가 바로 프로포즈에 딱 맞는 핫스폿이라고 마치 이곳에 내 지분이 어느 정도는 있는 양 자랑스럽게 추천하곤 했다. 사실 그렇게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떨었던 이유는 그 다리의 정경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아픈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림같은 절경을 품은 그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온전히 감내해내야만 했던 고독의 시간들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서 왠지 모르게 그 다리를 건너면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밤이 되어 사진을 찍게 되면 주광색 조명과 붉은 벽돌이 자아내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휩싸여 대충 찍어도 작품 사진처럼 나온다. 그때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타임랩스를 되감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때의 내가 돌출되는 듯 하다. 그래서 이번 방문은 어쩌면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따로 기차표를 사고 숙박을 정해야 했음에도 그곳을 가자는 나의 권유에 친구는 이렇게 답해주었다. “그래, 나도 네가 살았던 곳에 한 번 가보고 싶었어.”라고. 


때마침 응근히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하고 배도 채워서 그런지 친구는 피로함을 호소하며 조금 쉬겠다고 했다. 그런 시간을 기다렸던 것인지, 그런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했던 것인지 호텔방에 잠시 누워있다가 용기를 내서 그 다리를 혼자 걸어보기로 했다. 지난날의 내가 매일 산책했던 시간과 비슷한 때에 찬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그때의 그 길을 걸었고 다리에서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어디선가 그때 자주 마주치던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두리번 거리며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지 가만히 손을 대어보았다. 


장강명 작가가 가상의 동네로 명명한 현수동에 대한 책을 읽으며 왜 갑자기 그때의 감상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시기를 겪었을지 모를 후배에게 그곳을 다녀왔다고 하니 눈가에 애처로움이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형은 그곳에 가도 아무렇지 않지요. 저는 아직은 그곳을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요.”라고. 누군가에게는 귀한 시간을 내고 비싼 값을 치뤄 아쉬움을 남기고 오는 곳이 누군가에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를 준 곳이라는 아이러니가 새삼 달갑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 라는 수용적 자세에 대한 동의와 더불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자리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의 오고감이 반복되는 게 삶이 아닐까. 


“무언가 장엄한 것, 신비로운 것을 체험하며 살고 싶다. 영성을 알고 싶다. 때로는 계몽시대 이후의 현대인은 근본적으로 이런 소망을 이룰 수 없는 것 아닌가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하늘을 가득 채운 구룸이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만 한참 보고 있어도 압도적으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가사의를 얼마간 경험하게 된다. 풍성하게 살고 싶다면, 그런 체험을 정기적으로 꼭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71)”


“밤섬은 무엇을 상징할까.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 억눌러야 할 인간의 파괴력? 기술문명과 환경이 유지해야 할 적당한 거리? 20세기 한국에 살았던 약자들의 아픔?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후손들이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우리 역시 아버지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 인간의 이해를 훌쩍 초월한 섭리와 예상치 않은 구원?

밤섬은 그 모든 것의 상징이고, 우리는 자연의 힘을, 우린 안에 있는 파괴적인 욕망과 우리가 소유하게 된 기술을, 인간의 강함을, 인간의 약함을, 사람들의 고통을,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시간이 해내는 일들을, 아이러니와 불가사의를, 복잡하고 연약하고 중요한 연결들을, 세계의 질서와 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무섭게 여겨야 한다는 게 내 대답이다.(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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