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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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작가의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읽었다. 처음 제목을 접하고 하이틴 소설일까,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일까 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빠는 혈육인 친오빠를 뜻하고 채하나인 여동생이 채강천인 오빠가 서울에서 진짜 사고를 친거라 생각하고 고향인 태백으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 이틀 동안 강릉으로 출강을 다녀오면서 기차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보이는 논밭과 작은 야산들을 보고 있자니 드문드문 작은 마을이 보이고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인 곳도 있었다. 물론 아파트도 중간 중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딜가나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살다가 한적한 시골에 가면 더 답답함이 느껴지곤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 환경에서도 어느 순간 적응하고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며 벗어나길 거부하게 되니 말이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에 익숙해진 나는 시골의 한적함을 견디지 못한다. 자동차의 소음과 경적소리, 사람들이 술마시며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화를 내며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음에도 어둠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오는 시골의 고요함은 이름모를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석탄 소비가 줄어들면서 거의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기는 했지만, 한때 강원도의 사북과 태백은 수많은 광부들이 있었다. 태백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주인공 채하나와 절친 미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제적 상황이지만 하나는 미주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미주는 하나에게 있는 척을 하지 않아 친구로 지내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하나의 오빠 강천을 짝사랑하는 미주, 그리고 미주의 오빠 우주를 짝사랑하는 하나라는 인물 설정은 오히려 소설의 긴장감을 저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지만, 우주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하나와 미주의 관계 설정에 집중하며 과연 하나의 우려처럼 강천이 정말 사기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앳된 하나와 미주는 여전히 학생처럼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지만 하나는 엄마의 병환으로 인한 죽음과 아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혼자가 될까 두렵기만 하다. 하나는 육상부였던 오빠를 만나러 학교에 갔다가 투포환 선수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동안 올림픽을 보면서 거의 대부분의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독 육상의 필드경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경우처럼 여자 투포환 선수가 국내가 아닌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체격 조건이라고 한다. 메달을 따는 여자 투포환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100kg이 넘는 신체 조건을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성이 그런 조건을 갖추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기 때문에 메달권에 진입하는 힘을 뿜어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85kg에서 무게가 멈춘 하나는 현실을 파악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공장에 취직해 아빠 때문에 열악해진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우연히 유튜브에 나온 오빠 강천의 얼굴을 보고 하나는 경악하며 오빠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오빠를 잡으러 서울에 가기 위해 거의 불가능한 연차를 내고 함께 따라 나선 미주와 함께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빠의 흔적을 찾게 된다. 하나와 미주의 경제적 상황이 정반대라면, 태백의 황지 페투페라는 카페 겸 호프집은 도시의 스타벅스와 대조를 이루며 소설 속에서 여러번 등장한다. 미주를 기다리며 스타벅스에 머물던 하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비슷한 가격을 지불하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곳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곳인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또 하나의 전쟁터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도시화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은 비싼 매물이 될 확률이 높고 유동 인구는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차량의 흐름도 만만치 않게 복잡한 곳이 대부분이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오빠와의 만남을 위해서 미주와 함께 옛 고향 언니 하연은 언론사에 취직하여 기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막상 하연 언니를 만나 설명을 들으니 그녀가 하는 일이란 고작 다른 기사의 내용을 우라까이 하여 다시 웹상에 게재하는 기래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연은 하나와 미주보다 냉철한 시각으로 강천이 하는 일이 분명 책기꾼에 만들어놓은 사슬에 걸려들었다고 자신했다. 그럴만한 것이 유튜브에 나온 강천의 소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타트업 대표이자 교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렇게 어이없는 뻥을 치는 강천이 누구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강천에게 마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상에 자기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어서 빨리 강천을 제정신 차리도록 태백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종용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연이 하나와 미주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책기꾼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부분은 강천의 사기로 의심되는 부분과 상관되기에 필요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오빠새끼잡으러간다 #염기원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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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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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었다. 부제는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다. 얼마 전 [친애하는 나의 집으로]를 읽고 한마디로 ‘너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신작을 읽고 나니 저자가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번 책도 너무 좋고 감동적이고 논리적이고 진솔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책 읽기를 좋아해도 결말을 알고 싶고 책 한 권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아쉽지 않은데, 유독 하재영 작가의 책은 항상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생면부지의 남남이고 앞으로도 우연히라도 마주칠 기회가 없겠지만, 이렇게 책으로 누군가의 진지한 삶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 계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가감없이 들려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저자의 책을 읽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몇 년 전에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고 체력이 떨어져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갑자기 엄마는 내가 모르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란 궁금증이 생겼다. 마치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처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집안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내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본가를 떠나와 살기 전에는 집에서 가끔 가족 앨범을 둘러보곤 했다. 정리되지 않은 부모님의 흑백사진을 대충 훓어보며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 젊을 때가 있으셨구나라는 잠깐의 감흥에 빠지곤 했는데, 이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함께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지만 사춘기를 비롯한 20대 시절에는 그야말로 자기 밖에 몰라서 그런지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임에도 부모들의 마음 상황을 헤아릴 여지가 거의 없다. 그 당시에는 마치 인생의 가장 큰 고뇌에 빠진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며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 생각해보면 특출난 사춘기를 보낸 기억이 없다. 큰 사고를 친 적도, 가출이나 일탈을 한 적도 없다. 어쩌면 너무 밋밋하게 열정의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닌가란 아쉬움마저 든다. 


전작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집안의 흥망성쇠를 어느 정도 설명했기에 이번 신작에서 언급된 사건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갖고 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같에 대해서 딸와 어머니의 관점과 처신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었고, 어머니의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직하여 그 사랑의 헌신 덕분에 이렇게 무관한 나와 같은 독자들이 저자의 글을 읽는 혜택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시집을 와서 시집살이와 집안 일, 고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반목, 남편의 냉담함 등 어찌보면 이미 지난간 일이라 할지라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 책이 가진 재미의 9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구전 동화를 듣는 것처럼 어머니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함께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장면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심각하고 진지하다. 어머니는 마치 세상사를 초월한 도사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딸인 저자는 어머니가 겪은 상황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겪은 불합리함과 편협한 사고는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도 새로운 세대에게 지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알게 모르게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살아온 남자인 나 또한 아주 오랜시간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인내한 시간을 모른척 해왔기 때문이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뭐하냐며 책을 아궁이에 쑤셔넣어 불태워버렸던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 세대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체념과 수동성을 배웠을 것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로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용인하던 시대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음에도 감히 가부장의 말에는 토를 달지 못하게 만드는 독재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딸들이 공장을 다니며 하나 뿐이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고 출세한 아들과는 반대로 지지부진한 생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 오랜시간 동안 여성들은 남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더 많은 노동을 감내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세뇌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도 동등하거나 더 우위에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보직을 맡기거나 승진을 시킬 때 결혼과 출산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배제시키는 일이 여전히 발생된다. 워킹맘이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가 언급한 일하는 여성에게는 자신의 일과 더불어 가사일과 육아돌봄이 가중된다. 우리 사회는 그 모든 것을 다 잘 해내는 여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것이겠지.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34)”


“‘평범한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로서 결혼 제도권에 편입하는 것,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갖춘 남편과 자녀를 두는 것, 중산층에 안착하는 것,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등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것이 평범성이라면 미디어가 ‘노출’하는 동시에 ‘누락’하는 삶을 ‘평범한 삶’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평범함은 정체성, 가족 형태, 경제적 배경 등의 다름을 무시한 채 남용된다. 모두가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의 가치는 어디에서 배회하고 있을까?(39)”


“엄마가 선택한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온 일을 생각하면 수많은 가정과 질문 들이 떠오른다. 가사노동이라는 ‘반복의 노동’이자 ‘필수적 노동’을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만 담당한다면, 그 한 사람이 어머니-아내-며느리로 부리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성역할 모델에 맞춰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와 그녀가 추구하는 자화상이 동떨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그녀의 노동이 ‘스스로 원해서’ 맡은 일이 아니라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아분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란 선택권이 없는 자의 자아분열이 아닐까? 현실과 의식이 유리되어 있을 때 그녀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으니 그저 현실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의식의 깨어남을 억누르거나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209)”


“…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바뀌는 모자를 알아채주는 정도의 일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정원 시인 [시와 산책]: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중에서(247)” 


#나는결코어머니가없었다 #하재영 #휴머니스트 #논픽션작가 #공동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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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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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칼럼집 [날씨와 얼굴]을 읽었다. 십여년 전부터 미세먼지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봄철에 황사바람과 함께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가급적 외출할 때에 마스크를 쓰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듣고 했었다. 정말로 눈으로 봐도 뿌옇다는 느낌이 드는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나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더 크고 왠지 나혼자만 유난떤다는 기분에 금방 마스크를 벗어버리곤 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강제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초미세먼지로 시작된 마스크와의 인연은 팬데믹이라는 어머어마한 재난의 전초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미약하게 여겨지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한 순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면 초미세먼지는 아주 천천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서서히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 빈번하게 들어와서인지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갖는 중대함과 두려움이 감소된 듯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재앙을 겪는 이들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찌는듯한 폭염과 북극같은 혹한도 가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당분간의 불편함에 불과할 뿐이다. 쪽방촌에서 여름을 나는 것과 시스템 에어컨을 갖춘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비슷한 냉방을 갖춘 집에서 잠을 자며 기후위기를 겪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고 대책을 마련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위기에 대한 생각과 실제 위기를 겪는 몸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기만 하다. 탄소 배출량을 당장 줄이지 않으면 해수면의 높이가 올라가 어느 나라의 땅은 바다속으로 잠기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후협약에 모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심드렁한 마음으로 눈치게임만 할 뿐이다. 마치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의 이동을 줄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개별 여행을 제한한다고 한다면 기꺼이 동참하기 위해 해외여행 계획을 전면 취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뻔히 예상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석탄과 석유로 인한 탄소 배출량의 증가에 못지 않게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들의 가스 배출이다. 아니 소가 방귀를 껴도 얼마나 낀다고 그게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코웃음쳤는데, 공장식 축산으로 소비되는 소와 돼지의 양을 헤아려보니 그렇게 소모된 많은 동물들을 고통스러운 짧은 생을 마감하며, 마치 자기들을 과도하고 소비하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듯이 탄소 배출량 증가에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비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초미세먼지를 대할 때와 유사하지 않았나 싶다. 고기를 안 먹는게 뭐 그리 대수라며 유난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비건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굶주린 시대를 살아온 세대와 함께 살아가기에 먹을 것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건의 선택이 단지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날씨와 동물과 공장식축산과 연관지어 보게 되면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치킨이라면 환장하는 아이들도 닭목아지를 비틀고 닭털을 뽑는 장면을 보고는 식욕이 금방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울타리 안에 놓아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귀한 손주와 사위가 왔다고 잡는 겪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놓아 기르는 가축은 귀한 시대가 되었다. 제 몸 하나 마음껏 방향을 틀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항생제를 맞으며 오로지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충실한 재료가 되기 위한 극한의 시간을 보낼 뿐이다. 


먹방의 난립과 맛집 탐방이 취미가 되어버린 시대에 필수적인 영양보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외식의 주재료 대부분이 고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뜻을 품은 것이 아닌 단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한약을 복용할 때에 몇 달 간 고기를 입에도 안댄 적이 있다. 집에서야 어떻게든 식사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 음식의 종류가 꽤 많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도 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식당아 아니고서는 고기를 비껴간 외식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개별적인 만남이 아닌 많은 이들이 모이는 모임의 식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회식하면 대부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러 가는데, 그렇다고 횟집은 더욱 비싸고 호불호도 있으니 차선책이 될 수 없었다. 외식을 할 때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고 뭔가 안쓰럽다거나 까탈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달만에 한약 복용이 끝나고 드디어 편하게 식단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비건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맘편히 살아왔던 자신과 이별을 고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고착된 생각과 오랜시간 용인된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나 순교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앞선다. 하지만 이슬아 작가는 그런 엄청난 용단을 내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 하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든다. 쿠팡의 노동자들이 극한의 장소에서 근육이 녹아내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로켓배송으로 원하는 물건을 빨리 받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일시적인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무력함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누리는 편안과 안락의 시간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결정권을 쥔 자들은 어떤 어른들인가. 그들은 어떤 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가. 그들을 눈물짓게 할 타인은 누구인가. 21만 원에서 40만원 사이의 돈을 빌릴 누군가가 주변에 없는 사람. 그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정보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자만 슬픔에 목이 잠긴다. 한국은행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저속득 가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클 것’이라는 건조한 문장으로 결코 표현되지 않는 고통 말이다. 나는 이것에 슬퍼하는 수장들을 원한다. 취약한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곁에 둔 수장들을 원한다. 가장 취약한 이들의 해방과 자신의 해방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수장들을 원한다. 그런 수장들만이 숫자 속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112)”


#날씨와얼굴 #이슬아 #위고 #이슬아칼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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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위트 홈 -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진영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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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대상 수상작은 최진영 “홈 스위트 홈”이고, 우수작은 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 박서련 “나, 나, 마들렌”, 서성란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이장욱 “크로캅”, 최은미 “그곳” 등 이다. 해마다 새해를 시작하며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집은 유독 재미있었다. 마치 종편과 케이블 채널을 돌리며 다양한 장르의 예능과 드라마와 쇼를 접하게 되는 것처럼,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그런지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고 다음 단편에 쉽게 집중이 안되곤 했던 예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매 순간 몰입도가 높았고 잘 읽혀서 좋았다. 특히나 대상을 받은 최진영 작가의 “홈 스위트 홈”을 읽고 나서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에 들었나 놓았나 할 수 있을까란 놀라움과 함께 소설이 주는 여운이 한동안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 사십 대가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어진과 상의할 수 있다고, 곤란하고 힘든 일도 함께 겪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고가 나면 수습하고, 싸우면 화해하고, 고장 나면 고치고, 잃어버리면 같이 찾고, 상대가 악몽에 갇혀 있을 때는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 서로를 천천히 구원하는 일상. 나에게 미래란 내일이었다.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기도와 같은 기대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22)” 


현대인에게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하지 않기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내일이면 혹시 집값이 폭락하지 않을까? 금리가 터무니없이 올라 이번달에는 이자를 갚을 수 있을까? 투자한 주식이 반토막나는 것은 아닐까?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를 갈아넣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러 가며 터벅터벅 천천히 걷는다면 십중팔구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어깨뻥을 맞거나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 중 누군가의 눈흘김을 받기 마련이다. 대체 바빠 죽겠는데, 이 시간에 한량처럼 걷고 있다니 거추장스러워죽겠네 라는 경멸의 시선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게 만든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도시에서의 혼잡한 생활을 접고 한적한 곳으로 주거지를 옮긴 ‘나’는 얼마 후 암 진단을 받게 되고, 수술과 항암 치료 후 재발, 2차 재발을 거쳐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암 치료를 그만두고 ‘나’는 기억할 수 없는 2살의 나이에 보았던 어릴 때 살던 집을 재현하고자 결심한다. 


어떤 기억들은 통상적인 수준에서 용납될 수 없는 나이때에도 각인되는 것일까? 사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을 역사적 사건의 시기와 맞춰보면 겨우 3살 때의 일이라 혹시나 내가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역동적이 사건과 맞물려 있기에 내가 기억하는 장면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 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이 하필이면 나와 가족과도 아무관련 없는 그냥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일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아쉽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패턴을 멈추게 했던 일은 간신히 걸음마를 하던 나에게도 어떤 변화를 감지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화자인 ‘나’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 살던 집의 형태를 엄마를 통해 확인하게 되고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믿지 못한다. 무너져가는 폐가를 사들여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고쳐나가는 과정속에서 항암을 포기한 딸을 바라보는 심란해진 엄마의 얼굴은 어땠을까? 


“아픈 사람이란 말 좀 그만해, 엄마. 나는 나을 수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더 행복해질 수는 있어.

그리고 어느 날엔 이런 이야기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쓸 거야.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도록 두라는 뜻이야. 내 몸에 어떤 튜브도 넣지 말고 나를 살리겠다고 나의 가슴을 짓누르지도 말란 뜻이야.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것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사랑을 여기 두고 떠날 거야. 같은 말을 어진에게도 했다.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유로울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34)“


죽음이 두려워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오지 않고 기나긴 삶이 이어질까봐 두려워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죽고 싶지는 않은데 걱정이 앞서는 미래라니 참으로 피곤하기만 하다. 이렇게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 스트레스로만 다가온다면 도대체 행복은 언제 맛볼 수 있는 것일까? 그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 같은 행복의 순간을 화자인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의 행복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마치 선구안 같이 말한다. 이것은 모든 진리를 깨달은 초연한 자의 모습도 아니고, 치료를 그만둔 암 환자의 낙담한 심정에서 내뱉는 한숨의 흔적도 아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다 이해하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 불가능한 이해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어쩌면 화자인 ‘나’는 폐가를 고치며 이곳에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그 불가해한 영역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랑 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안서현 평론가의 해설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우선 치료에만 집중하라는 말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자신의 시간만 멈추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중에 다 낫고 나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시간이 복원되기 전까지는 현재를 상실하였으며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힘든 것은 어쩌면 아픈 몸보다도 이런 상투적인 단절과 유예의 서사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발산한다’라는 한 마디는 병을 앓고 난 ‘내’가 찾아낸 새로운 서사의 지향이다. 질병이 바꾸어 놓은 시간의 감각을 다시 구성하고 남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서사의 구조를 창조하는 일이 필요하다.(61-62)”


#최진영 #홈스위트홈 #문학사상 #2023제46회이상문학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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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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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원 작가의 [미확인 홀]을 읽었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구멍을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촛점은 어디에도 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치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일지라도 그 구멍과 흔들림을 모른 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예전에는 그런 심적 상태에 오랜 시간 머무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생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런 무기력의 늪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배가 불러서 저렇다는 핀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무지의 소산에서 나오는 막말은 구멍과 흔들림을 더욱 깊고 거세게 만들어 다시는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는 것만 같던 때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방면에서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이 생긴 사람들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는 시선이 생겨났고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생각의 폭도 넓어진 편이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구멍에 메꿔지고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시대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원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제목으로도 재출간 되기는 했지만, ‘상실’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뭔가 애수가 가득한 슬픈 눈을 연상시켰기에 [상실의 시대]로 출판된 두툼한 책을 들고 다니면 왠지 모르게 ‘나는 지금 이렇게 삶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는 애증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반증처럼 여겨졌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상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시간 형벌처럼 다가오는지 말이다. 인간에게는 공감, 연민과도 같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여 동화되고자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맺히며 글썽거리게 된다. 문제는 시간이다.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함께 마주하는 순간에는 당사자의 아픔을 같이 느끼지만 돌아서고 나면 원래의 평온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일을 겪느냐에 다르겠지만 이전의 안온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이다. 상실이 준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커다란 구멍은 도대체 메꿔질 기미가 보이지 않곤 한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형벌처럼 느껴져 죄없는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학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에 허덕이는 시기를 보내다 결국 뒤죽박죽 되어버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일까?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이 지옥같은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서 더욱 세차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은수리에서 만난 희영과 은정 그리고 필희는 감수성이 넘치는 참 좋은 때에 부모들의 연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바람핀 남주가 여주에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목놓아 소리치는 장면처럼, 사랑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찌하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가 눈이 맞아 도망을 치게 되었는지는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하지 않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켜켜이 일상의 먼지를 일순간에 제거하는 선택을 하자 불행은 마하의 속도로 각자의 가족에게 달겨들었다. 소설의 말미에 은정과 은정의 엄마가 등장하고 부모들의 불륜과는 상관없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었던 세 소녀는 은정의 엄마가 필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두 동강이 나고 만다. 그리고 엄마를 잃어버린 필희는 희영에게 뭔가를 고백할게 있듯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던 저수지로 함께 가고, 그곳에서 희영은 필희를 위로할 구실을 찾으러 수면 위에 돌을 던지다 신기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위 뒤로 넘어간 돌은 바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잠깐 머물다 부서지며 어두운 구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미확인 홀을 발견한 후 필희는 사라졌고 필희의 실종 이후 희영에게도 구멍이 생겨버렸다. 


소설은 이렇게 부모의 불륜으로 어긋난 만남에만 주목하지 않고 수십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된 희영을 시작으로 그와 비슷한 구멍을 갖게 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어릴적 친구의 실종이 혹시나 자기 탓은 아니었을까 자책하던 희영은 의사인 남편과 두 자녀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매일 밤 베란다에서 건너편 동에 사는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몰래 관찰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희영이 망원경을 통해서 매일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은 사람들이 불행과 슬픔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구멍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나아지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해결책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희영의 남편인 찬영은 희영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같은 전처를 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어느덧 자신의 마음 속에 생긴 공동으로 인해 가려움증을 느끼며 텅빈 병원에서 알몸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물리적 빈 공간이 아닌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둔 공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부디 희영이 그 공동의 공간에 의미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기를 기다린다. 희영의 서사에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도망친 필희의 엄마 순옥은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은 이웃 집 손녀 이든에게 마음을 주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상처를 받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자책의 공동을 키워나간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마음 속에 공동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영원히 미제로 남을 억울함, 미안함 등이 뒤섞여 진공 상태 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면 끝없는 바닥으로 내려앉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심해에서 유영하는 알몸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혀 어서 빨리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쉴세없이 밀려들지만, 내 안의 공동이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참아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뻔해지고 더 염치가 없어질 거라고, 그리고 그래야만 어디선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필성도 괴로웠다. 하지만 언니처럼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그래서 그 여자가 우리를 찾으면 매몰차게 외면해야지, 그땐 내가 먼저 버려야지. 그렇게 마음먹는 과정에서 필성은 자신이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실이 끊길 위기가 닥치면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할 힘이 있는 사람이란 것도.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한 뒤로 언니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성은 언니도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음질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떤 사람은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는 걸 몰랐다.(135-136)”


#미확인홀 #김유원 #한겨례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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