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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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원 작가의 [미확인 홀]을 읽었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구멍을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촛점은 어디에도 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치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일지라도 그 구멍과 흔들림을 모른 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예전에는 그런 심적 상태에 오랜 시간 머무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생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런 무기력의 늪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배가 불러서 저렇다는 핀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무지의 소산에서 나오는 막말은 구멍과 흔들림을 더욱 깊고 거세게 만들어 다시는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는 것만 같던 때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방면에서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이 생긴 사람들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는 시선이 생겨났고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생각의 폭도 넓어진 편이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구멍에 메꿔지고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시대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원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제목으로도 재출간 되기는 했지만, ‘상실’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뭔가 애수가 가득한 슬픈 눈을 연상시켰기에 [상실의 시대]로 출판된 두툼한 책을 들고 다니면 왠지 모르게 ‘나는 지금 이렇게 삶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는 애증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반증처럼 여겨졌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상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시간 형벌처럼 다가오는지 말이다. 인간에게는 공감, 연민과도 같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여 동화되고자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맺히며 글썽거리게 된다. 문제는 시간이다.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함께 마주하는 순간에는 당사자의 아픔을 같이 느끼지만 돌아서고 나면 원래의 평온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일을 겪느냐에 다르겠지만 이전의 안온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이다. 상실이 준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커다란 구멍은 도대체 메꿔질 기미가 보이지 않곤 한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형벌처럼 느껴져 죄없는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학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에 허덕이는 시기를 보내다 결국 뒤죽박죽 되어버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일까?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이 지옥같은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서 더욱 세차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은수리에서 만난 희영과 은정 그리고 필희는 감수성이 넘치는 참 좋은 때에 부모들의 연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바람핀 남주가 여주에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목놓아 소리치는 장면처럼, 사랑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찌하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가 눈이 맞아 도망을 치게 되었는지는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하지 않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켜켜이 일상의 먼지를 일순간에 제거하는 선택을 하자 불행은 마하의 속도로 각자의 가족에게 달겨들었다. 소설의 말미에 은정과 은정의 엄마가 등장하고 부모들의 불륜과는 상관없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었던 세 소녀는 은정의 엄마가 필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두 동강이 나고 만다. 그리고 엄마를 잃어버린 필희는 희영에게 뭔가를 고백할게 있듯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던 저수지로 함께 가고, 그곳에서 희영은 필희를 위로할 구실을 찾으러 수면 위에 돌을 던지다 신기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위 뒤로 넘어간 돌은 바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잠깐 머물다 부서지며 어두운 구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미확인 홀을 발견한 후 필희는 사라졌고 필희의 실종 이후 희영에게도 구멍이 생겨버렸다. 


소설은 이렇게 부모의 불륜으로 어긋난 만남에만 주목하지 않고 수십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된 희영을 시작으로 그와 비슷한 구멍을 갖게 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어릴적 친구의 실종이 혹시나 자기 탓은 아니었을까 자책하던 희영은 의사인 남편과 두 자녀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매일 밤 베란다에서 건너편 동에 사는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몰래 관찰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희영이 망원경을 통해서 매일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은 사람들이 불행과 슬픔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구멍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나아지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해결책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희영의 남편인 찬영은 희영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같은 전처를 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어느덧 자신의 마음 속에 생긴 공동으로 인해 가려움증을 느끼며 텅빈 병원에서 알몸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물리적 빈 공간이 아닌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둔 공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부디 희영이 그 공동의 공간에 의미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기를 기다린다. 희영의 서사에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도망친 필희의 엄마 순옥은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은 이웃 집 손녀 이든에게 마음을 주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상처를 받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자책의 공동을 키워나간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마음 속에 공동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영원히 미제로 남을 억울함, 미안함 등이 뒤섞여 진공 상태 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면 끝없는 바닥으로 내려앉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심해에서 유영하는 알몸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혀 어서 빨리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쉴세없이 밀려들지만, 내 안의 공동이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참아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뻔해지고 더 염치가 없어질 거라고, 그리고 그래야만 어디선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필성도 괴로웠다. 하지만 언니처럼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그래서 그 여자가 우리를 찾으면 매몰차게 외면해야지, 그땐 내가 먼저 버려야지. 그렇게 마음먹는 과정에서 필성은 자신이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실이 끊길 위기가 닥치면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할 힘이 있는 사람이란 것도.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한 뒤로 언니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성은 언니도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음질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떤 사람은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는 걸 몰랐다.(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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