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슬아 작가의 칼럼집 [날씨와 얼굴]을 읽었다. 십여년 전부터 미세먼지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봄철에 황사바람과 함께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가급적 외출할 때에 마스크를 쓰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듣고 했었다. 정말로 눈으로 봐도 뿌옇다는 느낌이 드는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나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더 크고 왠지 나혼자만 유난떤다는 기분에 금방 마스크를 벗어버리곤 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강제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초미세먼지로 시작된 마스크와의 인연은 팬데믹이라는 어머어마한 재난의 전초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미약하게 여겨지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한 순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면 초미세먼지는 아주 천천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서서히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 빈번하게 들어와서인지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갖는 중대함과 두려움이 감소된 듯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재앙을 겪는 이들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찌는듯한 폭염과 북극같은 혹한도 가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당분간의 불편함에 불과할 뿐이다. 쪽방촌에서 여름을 나는 것과 시스템 에어컨을 갖춘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비슷한 냉방을 갖춘 집에서 잠을 자며 기후위기를 겪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고 대책을 마련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위기에 대한 생각과 실제 위기를 겪는 몸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기만 하다. 탄소 배출량을 당장 줄이지 않으면 해수면의 높이가 올라가 어느 나라의 땅은 바다속으로 잠기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후협약에 모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심드렁한 마음으로 눈치게임만 할 뿐이다. 마치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의 이동을 줄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개별 여행을 제한한다고 한다면 기꺼이 동참하기 위해 해외여행 계획을 전면 취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뻔히 예상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석탄과 석유로 인한 탄소 배출량의 증가에 못지 않게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들의 가스 배출이다. 아니 소가 방귀를 껴도 얼마나 낀다고 그게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코웃음쳤는데, 공장식 축산으로 소비되는 소와 돼지의 양을 헤아려보니 그렇게 소모된 많은 동물들을 고통스러운 짧은 생을 마감하며, 마치 자기들을 과도하고 소비하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듯이 탄소 배출량 증가에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비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초미세먼지를 대할 때와 유사하지 않았나 싶다. 고기를 안 먹는게 뭐 그리 대수라며 유난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비건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굶주린 시대를 살아온 세대와 함께 살아가기에 먹을 것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건의 선택이 단지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날씨와 동물과 공장식축산과 연관지어 보게 되면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치킨이라면 환장하는 아이들도 닭목아지를 비틀고 닭털을 뽑는 장면을 보고는 식욕이 금방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울타리 안에 놓아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귀한 손주와 사위가 왔다고 잡는 겪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놓아 기르는 가축은 귀한 시대가 되었다. 제 몸 하나 마음껏 방향을 틀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항생제를 맞으며 오로지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충실한 재료가 되기 위한 극한의 시간을 보낼 뿐이다. 


먹방의 난립과 맛집 탐방이 취미가 되어버린 시대에 필수적인 영양보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외식의 주재료 대부분이 고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뜻을 품은 것이 아닌 단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한약을 복용할 때에 몇 달 간 고기를 입에도 안댄 적이 있다. 집에서야 어떻게든 식사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 음식의 종류가 꽤 많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도 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식당아 아니고서는 고기를 비껴간 외식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개별적인 만남이 아닌 많은 이들이 모이는 모임의 식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회식하면 대부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러 가는데, 그렇다고 횟집은 더욱 비싸고 호불호도 있으니 차선책이 될 수 없었다. 외식을 할 때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고 뭔가 안쓰럽다거나 까탈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달만에 한약 복용이 끝나고 드디어 편하게 식단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비건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맘편히 살아왔던 자신과 이별을 고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고착된 생각과 오랜시간 용인된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나 순교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앞선다. 하지만 이슬아 작가는 그런 엄청난 용단을 내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 하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든다. 쿠팡의 노동자들이 극한의 장소에서 근육이 녹아내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로켓배송으로 원하는 물건을 빨리 받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일시적인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무력함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누리는 편안과 안락의 시간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결정권을 쥔 자들은 어떤 어른들인가. 그들은 어떤 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가. 그들을 눈물짓게 할 타인은 누구인가. 21만 원에서 40만원 사이의 돈을 빌릴 누군가가 주변에 없는 사람. 그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정보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자만 슬픔에 목이 잠긴다. 한국은행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저속득 가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클 것’이라는 건조한 문장으로 결코 표현되지 않는 고통 말이다. 나는 이것에 슬퍼하는 수장들을 원한다. 취약한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곁에 둔 수장들을 원한다. 가장 취약한 이들의 해방과 자신의 해방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수장들을 원한다. 그런 수장들만이 숫자 속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112)”


#날씨와얼굴 #이슬아 #위고 #이슬아칼럼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