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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다 사진관
허태연 지음 / 놀 / 2022년 7월
평점 :
허태연 작가의 [하쿠다 사진관]을 읽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여운 때문인지 읽는 내내 후속편을 보는 듯한 감상에 빠져버렸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 사투리도 자세히 들으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 수 있지만, 제주 방언만은 마치 해독기와 번역이 필요한 외국어처럼 들린다. 대체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우리나라가 그렇게 큰 땅덩어리도 아닌데, 단지 바다 건너에 있는 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큰 격차가 느껴지는 방언이 생겨난 것일까 항상 신기했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 사투리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3년째 견디는 중에 제주에 갈때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매번 감사의 마음을 갖곤 했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해녀들의 이야기가 나와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해녀들의 물질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올해 제주로 연수를 갔다가 우도로 가는 선착장 근처에 있는 오래된 해녀 탈의실을 개조하여 공연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해녀의 부엌’이라는 프로그램을 관람할 수 있었다. 연극하는 청년들이 현지의 해녀분들과 함께 해녀들의 삶을 그린 연극을 공연하고 이후에 해녀분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직접 맛볼 수 있는 특색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연극 배우들은 실제 상군해녀가 겪은 슬픈 이야기를 형상화했고, 연극이 끝나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80세가 넘은 고령의 해녀 분의 인터뷰 시간이 이어졌다. 지금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해녀복은 고무로 된 전신슈트이지만, 70년대 이전에는 박물관에서 본 듯한 하얀 저고리와 검은 반바지를 입고 차가운 바닷물에 입수를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주인공 제비가 한 겨울에 대왕물꾸럭마을 축제의 사자가 되어 고무슈트가 아닌 옛날 해녀복을 알몸에 입고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야 하다는 사실에 기겁을 하지만, 목포 할망의 말처럼 생존을 위해서 해녀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며 물질을 해야만 했다.
사실 도시에서는 신선하고 맛이 좋은 문어를 맛보기가 쉽지 않다. 값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잘못하면 질긴 문어를 먹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에 가면 돌문어와 대왕문어를 맛볼 수 있다. 심지어 문어가 들어간 해물라면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먹을 수도 있다. ‘해녀의 부엌’에서 해녀들이 바로 채취한 뿔소라 회를 먹노라니 아무런 잠수장비 없이 그저 숙련된 다이빙으로 전복하나, 소라하나 이렇게 거둬들여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갔다는 할머니 해녀의 말씀이 마음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프리 다이빙 실력은 숙련된 다이버들도 흉내낼 수 없는 숨비소리를 만들어냈고 그러한 독특한 호흡법으로 오랜 시간 물 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제비는 나중에 그의 슬픈 사연이 드러나지만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미혼모가 되어 아이를 입양기관에 맡긴 상처를 갖고 있다. 기댈 가족조차 없이 새로운 삶을 기약하기 위해 떠나온 제주 여행을 끝마치는 날 바닷가에서 핸드폰을 물에 떨어뜨려 길을 헤매다 ‘하쿠다 사진관’에까지 이르게 된다. 제비가 사진관 주인 석영과 만나 그곳에서 직원으로 채용되어 목포 할망의 집에 하숙하게 되는 과정은 조금은 작위적이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플롯이라고 가정한다면 실제로도 그러한 우연이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 않을까 동의하게 된다. 하쿠다 사진관을 중심으로 연제비, 이석영, 고양희 그리고 양희의 아들 효재, 목포 할망과 대왕물꾸럭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가 쉽게 말하지 못할 내면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단언을 실천하는 것처럼 가슴속에 묻어둔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가 씩씩하게 주어진 운명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다.
제비가 석영의 사진관에서 일하며 홍보 활동을 열심히 해서 조금씩 고객들이 늘어나고 사진관을 방문한 이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지며 이야기는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특히나 제비와 석영이 콤비를 이루어 의뢰자들이 원하는 컨셉으로 하루종일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서 식사를 하며 그날 찍은 사진을 관람하는 코스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그리고 여행지에서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 대왕물꾸러마을의 평안을 위해 사자의 역할을 맡게된 제비가 물숨을 들어마시는 고통을 감내하며 대왕물꾸럭을 바다속으로 인도하는 장면은 입양보낸 밤톨이를 위한 극한의 인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에 무척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사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한 제비에게 목포 할망이 건네 한 마디, “기여. 혼 번 사자는 영원한 괸당이주. 이녁은 앞으로 어떵살코저들지 말라.(그래. 한 번 사자는 영원한 괸당이야.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걱정하지 마.)” 기댈 가족 하나 없는 제비에게 이 말처럼 든든한 말이 또 있을까? 괸당이라는 혈연과 지연으로 얽히지 않은 이들을 매몰차게 외면하는 배타적인 공동체의 모습에서 나온 것 같지만, 목포 할망의 말에서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 세상의 모든 장애물이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비야, 어떤 사람들은 돈과 예술이 별개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돈과 바꿀 수 있는 것만 진짜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의 생명 다음으로 중요한 게 돈이니까. 그런 돈하고 바꿀 가치가 있어야만 예술이 되는거야. 비쌀수록 더 가치가 있는 거고.(142)”
“만일 물꾸럭 신이 있어 사람에게 길흉을 가져온다면, 그리고 네가 잠수에 실패해 액운을 당한다면, 그때 너는 후회할 거야. ‘아 물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해냈어야 했는데,’ 그런 다음 울겠지. 지금처럼 서럽게. 하지만 네가 잠수에 성공한다면, 언젠가 네게 액운이 닥쳐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수영을 배워. 살아보니 그렇더라. 뭔가를 위해 무슨 일을 하다 보면, 계속 하다 보면, 그게 언젠가 너를 구하는 거야.(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