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의 맛 문학동네 청소년 48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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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귤의 맛]을 읽었다. 청소년 문학 시리즈의 하나로 중학생 4명의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윤, 소란, 해인, 은지 이렇게 4명은 현대 도시 청소년들의 평범하고도 지독히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된 채 어떻게 굳게 닫혀진 마음을 서로에게 열어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입시제도, 학원 문화 그리고 변함없는 가족들의 갈등을 소재로 삼아 친구란 무엇인지, 단순히 어린 시절에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단순한 동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최근 종영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도 99학번 5명이 절친으로 나온다. 의대에서 만난 이들이 같은 병원에서 일하며 힘들고 어려운 고민들을 공유하고 소소히 일상을 나누며 밴드로 하나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의 교사이며 의사라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수준 높은 능력이 아니라, 이어받을 엄청난 유산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함께 밥을 먹어줄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다윤, 소란, 해인, 은지는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지만 영화동아리를 통해서 나름 친분을 갖게 되고, 제주도 3박 4일의 여행을 통해서 나중에 고등학교도 꼭 같은 곳에 가자는 약속을 하고 만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다윤이는 학교에서 외고를 보내려고 하고, 해인의 부모는 이모의 집 주소로 위장전입을 하여 자사고에 보내려고 하는 등 각자의 사정으로 모두가 다 같은 고등학교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들은 마치 각자가 원하던 것을 포기하고 단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같은 고등학교를 지원한 것처럼 보였으나, 소란은 사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이유와 사정으로 한 곳에 모인 것 뿐이라는 냉정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제주도에서 “기대하지 않아서, 예상하지 않아서, 계획하지 않아서.(161)”라는 다윤의 말처럼 마트에서 사는 귤보다 감귤 체험장에 따서 먹은 귤이 그렇게 맛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비록 우리의 만남이 아무런 기대, 예상, 계획이 없었음에도 이토록 오랜 시간 기억에 남아 나를 만들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반짝 반짝 작은별의 가사가 “How I wonder what you are. 네가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지, 너희들이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지(205)”라며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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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너리 푸드 : 오늘도 초록 띵 시리즈 3
한은형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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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그리너리 푸드: 오늘도 초록]을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3번째 책이다. 이번 음식의 주제는 초록을 연상시키는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초록빛을 띠는 채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닌 초록이라는 말에 담긴 싱그러움을 부르는 음식재료와 음식의 이야기이다. 읽다보니 한은형 작가는 허브 매니아라서 그런지 아마도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도 거침없이 잘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 먹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향신료가 들어간 근동 지역의 음식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왠지 이번 책을 읽다보면 나도 전세계 어디를 가서도 초록을 느끼게 해주는 음식들은 마구마구 잘 먹을 것 같은 마법을 부릴 것만 같은 만용을 부려보고 싶어졌다. 특히나 작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맛 보았다는 ‘스테이크 타르타르’는 과연 어떤 맛일지 몹시 궁금해졌다. 우리나라 육회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8월의 파리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민트와 쿠민의 조화가 기가 막혔고, 레몬의 산이 고기의 결을 조밀하게 바꿨음에 놀랐다. 그리고 고기의 결 사이로 다진 케이퍼의 맛과 샬롯의 새침함도 슬며시 드러났다. 이건 뭐랄까....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었다. 허브의 존재감이 가득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날고기마저 이렇게 상큼할 수 있나 싶고.(85)” 라는 평을 내놓는다면 분명 맛있지 않을까? 또 한 가지 ‘바냐 카우다(bagna càuda)’이다. “온갖 익히지 않은 야채를 갈색 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바냐 카우다는 이탈리아어로 뜨거운 그릇 혹은 뜨거운 소스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생야채를 찍어 먹는 게 뭘 그리 특별하겠어 싶을 수도 있겠는데, 나한테는 어느 음식보다 특별했다. 안초비와 마늘, 올리브 오일이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되는 녹진한 연갈색 소스에 찍어 먹는 생야채는 내가 아는 야채가 아니었다. 바냐 카우다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 요리라고 한다.(192-193: 청담동 ‘콩부인’)”

“한때 향수병을 앓았다. 2016년 여름, 베를린에서였다. 내가 베를린에 간 것은 7월이었는데 간 지 열흘도 안 되어 향수병에 걸렸다. 향수병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고, 내 증상이 보편적인 향수병과 얼마나 합치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향수병이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눕고만 싶고, 그토록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최근에 내가 걸렸던 병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SAD. Seasonal Affective Disorder, 계절성 정서 장애. 겨울 우울증이라고도 불린다. 겨울에 주로 걸리는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그 증상이 내가 앓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북해의 영향을 받아 사무치는 바람이 불었던 베를린의 7월을, 내 마음은 겨울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자 몸도 7월의 베를린을 겨울로 느꼈다.(57)”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그럼 혹시 나도 그때 그래서? 2008년 6월 중순 베로나에서의 4개월차를 보내며 처음으로 주말에 혼자 당일치기 여행을 가게 되었다. 어학원 수업 시간에 나왔던 파도바에 있는 Giotto의 작품 ‘Cappella degli Scrovegni’를 보기 위해서였다. 숙소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날이 화창했기에 얇은 면티 하나만 입고 기차를 탔다. 그런데 1시간 후 파도바에 도착했을 때에는 갑자기 장때비가 내려 바지와 신발이 다 젖었다. 갑자기 덜덜 떨리는 추위를 느끼며 숙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다시 그 작품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젖은 몸으로 지오토의 작품이 그려진 작은 경당을 20분간 감상하고 나왔다. 작품 보존을 위해서 그 이상은 머물수도 없었다. 온통 ‘blu blu tutto blu’ 라고 외치던 어학원 선생님의 말 때문이었는지, 비를 맞아서였는지 그 유명한 파도파의 안토니오 대성당도 둘러보지 않고 다시 기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모든게 하기 싫어졌다. 어학 공부도, 입에 맞지 않는 서양음식도, 코쟁이들도 다 꼴배기 싫었다. 일주일 후에 모든 걸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고 온갖 난리를 피우다 다행히 그 향수병은 조금은 어이없는 대화로 치유받았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6월의 이탈리아는 정말 아름답다. 오늘도 초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미 조금씩 향수병에 점령당해가던 나의 몸과 마음이 홀로 떠난 첫 여행에서 맞은 비로 심각한 추위로 돌변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계절성 정서 장애라는 말에 affective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것은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아닐까 싶다. 그 무한한 애정의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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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 - 김남숙 소설
김남숙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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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숙 작가의 [아이젠]을 읽었다. 첫 소설집으로 ‘아이젠’, ‘파수’, ‘제수’, ‘캐치볼’, ‘자두’, ‘염소와 나’, ‘귀’, ‘이상한 소설’ 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스토리의 전개는 쉽사리 몰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화자가 어떤 사람일지 쉽게 그려지지 않으며 또한 그 화자와 긴밀한 접촉을 맺고 있는 대상도 진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추상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온다. 마치 고구마 한덩이를 삼킨 것처럼 대체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제 각각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단편이 마치 하나의 뚜렷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징검다리를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안개 속의 인물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미지의 인물들이 사실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의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그 별볼일 없는 얼굴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평소의 습관대로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이게 뭐 얘기가 될 만한 것인가? 평가부터 내린 것이다. 그렇게 주목받지 못할 삶을 살아온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저자의 단편들이 반복되어 나오는 병신같은 존재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를 기울이면 생각지도 못한 나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사연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이 우주에 두 번 다시 없을 단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의 말을 한 번 더 들여다 보게 된다. 

“진짜 재미없는 소설 같아서 짜증나는 삼촌. 의사의 말로는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는데,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무슨 풍선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럼 왜 진즉에 내가 원했을 때 펑, 하고 터져 버리지 못했을까. 나는 그 이후로 이런 어쩔 수 없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울고불고 무릎으로 걷는다 해도 바뀌지 않는 일들이 세상엔 많으니까. 그가 죽어도 괜찮다는 말을 일기에도 수없이 적었는데 막상 그가 진짜로 죽었을 때, 나는 수건으로 눈물을 너무 닦아서 얼굴이 헐어버릴 때까지 울었다. 그 이후 날이 따듯하고 평온한 주말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겼다. 그런 이상한 불안감 때문에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에도 실패하고 이별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잘 되지 않았으니까.(3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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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외국어 - 모든 나라에는 철수와 영희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 12
조지영 지음 / 위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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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영 님의 [아무튼, 외국어]를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 12번째 책이다. 저자는 외국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닌 직장생활을 십년 넘게 하고 있다고 말하며 외국어 배우기는 하나의 취미이자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불문과를 졸업했기에 당연히 프랑스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하며 알게 된 에피소드와 그 나라 말로 출간된 책들이나 작가의 이야기를 소소히 전해준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외국어에 대한 로망이 없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 의무적으로 6년 동안 영어로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봤기에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가끔 3개국어 이상을 하는 능력자들을 볼때면 경외심마저 드는 현상도 보인다. 
언젠가 강의 도중에 인격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칠판에 적고 읽은 적이 있었다. “Persona est individua substantia rationalis naturae.” 아마도 학생들은 처음 들어보는 라틴어 발음에 순간 ‘와’라는 탄성을 내뱉기에 갑자기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마치 외국어 능력자가 된 듯한 착각마저 ㅋㅋ 
막상 유학시절을 떠올려 보면 매일매일이 외국어와의 전장에 나가는 군인같은 마음이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탑재하지 못했으니 항상 조바심이 나고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듣고 딴소리를 할까봐 신경이 곤두서있어 방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국민이 아닌 외국 사람이 한 번에 못 알아듣거나 이해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행여나 말싸움을 할 때 제대로 맞받아치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울화통이 치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여기서도 하지 못했던 할아버지 신부님과의 단둘이 떠난 소풍같은 경험은 어쩌면 온전히 다 알아듣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서로의 의사소통이 완전히 가능하다가 하더라도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마음을 숨기려 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통하지 못할 또 다른 외국어를 말하고 있는 셈일테니까 말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준다(73)는 저자의 말처럼, 외국어 공부는 내가 알지 못하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그저 나와 다른 사람으로 이해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여느 때처럼, 늦지 않게 부지런히 출근하고 등교하려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 난데 없는 살의에 묵숨과 가족과 영혼과 일상을 잃게 되는 그 촘촘한 과정이 현미경처럼 그려진다. 하루키가 그때 그 시각, 지하철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을 굳이 수소문해서, 어렵게 찾아가 힘든 이야기를 청하고 글을 쓴 이유라면, 세상의 모든 비극과 슬픔은 모두 하나 하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나 주변의 질시에 위축된 사람들, ‘언제까지 아픈 척을 할 셈이냐’라는 공공연한 적의들 앞에서 두 번 상처를 입는 사람들, ‘힘을 내서 살지 않고 그렇게 엄살이라니 나약해빠졌다’라는 비난들에 일터를 떠나간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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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0 소설 보다
김혜진.장류진.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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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봄 2020]을 읽었다. 문지에서 분기마다 출간하는 이번 모음집에는 김혜진 작가의 “3구역, 1구역”, 장류진 작가의 “펀펀 페스티벌”, 한정현 작가의 “오늘의 일기예보” 이렇게 3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김혜진 작가는 [9번의 일]에서 드러난 계층간의 갈등에 다시 한 번 주목한 모습이다. 마치 프랑스 파리가 구역으로 계층간의 이동과 구별을 보여주듯이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곳도 점차 커다란 인공 다리를 만들어 내가 사는 곳과 너가 사는 곳을 구분지어 계급을 만들고 그 정당함을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너’가 보여준 길 고양이를 돌보는 착한 마음과 기꺼이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자 하는 너그러운 마음에 끌리다가도, 불현듯 ‘너’가 가진 부유함이나 7살이나 어린데도 불구하고 약삭빠른 모습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살얼음처럼 이어진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하는 욕구도 치밀어 오른다. 재개발을 시도하는 여러 지역에서 쉽사리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만 얻게되는 반복된 상황도 그저 세입자에 불과한 ‘나’는 온전히 투신하지 못한 채 ‘너’가 말하는데로 끌려가기만 할 뿐이다. 
장류진 작가는 역시나 이번 단편에서도 가독성 높은 글을 보여준다. 주인공 유지원은 세명은행에 신입사원모집에 응시하여 1, 2차 합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3차 합숙 면접을 앞두고 있다. 합숙 면접에서는 2박 3일동안 간단한 강연과 교육을 듣고, 조를 짜서 마지막 날 밤 열리는 ‘펀펀 페스티벌’에서 면접관들에게 선보일 공연을 보이는 것이다. 지원은 과거 교회에서 밴드 보컬을 했던 경험을 살려 밴드 조에 지원을 하게 된다. 그곳에 가서 보니 대형 기획사 연습생이자 슈퍼스타 K에도 나왔었던, 지원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너무나도 자주봐서 알던 사람처럼 느껴졌던 이찬휘가 있었다. 지원은 이찬휘와 더블 보컬이 되어 공연을 준비하지만 자신이 선망해왔던 이찬휘의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낀다. 이찬휘가 키보드와 갈등을 겪을 때 중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되려 이찬휘는 지원의 노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면박을 준다. 무대를 마치고 에프터 파티에서 그들에게 다가온 면접관에게 이찬휘는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점수를 땄고 결국 그는 최종 입사 했지만 지원은 떨어지고 만다. 

“그 순간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건 이찬휘가 내 어깨에 함부로 손을 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직 그 손이 그렇게까지는 싫게 느껴지지 않는 건 나 자신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아직도 너무..... 잘 생겼어. 분명히 말하지만 이찬휘에게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형의 반대말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이찬휘는 이제 그것에 가까웠다. 이찬휘 같은 태도, 이찬휘 같은 표정, 이찬휘 같은 말투, 이찬휘 같은 취향, 한마디로 이찬휘 같은 바이브. 모두 내가 꺼리는 것들이었고 사람을 판단할 때 절대적으로 피하는 기준 같은 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이찬휘의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다만 저 애의 얼굴과 몸, 그 껍데기만 빼고, 그건 아직까진, 아무리 봐도 싫어지지가 않았다. 그걸 싫어하지 못하는 나 자신만 자꾸 싫어질 뿐. 나는 누구에겐지 모르게 다급히 변명했다. 껍데기일 뿐이지만 이런 껍데기는 귀하다고.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다고.... 그리고 다시 어딘지 모를 반대편을 향해 외쳤다.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정말 쓰레기야. 난 육신의 노예야. 제발 누가 날 좀 말려.(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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