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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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적극이든 예금이든 평소에 아끼고 절약해서 노후를 위한 돈을 모은다 한들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병치레를 해야 한다거나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렇게 아끼고 절약한 시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반대로 이런 무상함에 대한 결론으로 어차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일단 지금의 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노후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사는 것.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양극단의 선택을 하기 보다는 마치 줄타기를 하듯이 나름대로 노후에 대한 준비도 하며 현재의 삶을 즐기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온 레이디는 우리의 전형적인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마치 일반적인 노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기만의 선택을 존중하며 이어간다. 


소설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이거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검색을 해보니 역시나 어느 방송사의 추적프로그램의 등장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트렌치 코트를 입은 할머니가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검색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 나온 블로그와 카페의 게시글은 대부분 레이디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듯해 자세히 읽지 않고 검색창을 닫아버렸다. 

레이디, 숙녀 김윤자 씨는 벤치에 앉아 죽은 채로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부고 소식을 전달받은 피디 신중호를 통해 레이디의 사연이 드러난다. 75세라는 고령의 여성이 밤 늦게 24시간 운영되는 맥도날드를 찾아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은 채로 새벽까지 머물다 떠난다는 얘기는 누구에게나 솔깃한 소재가 아닐까? 대체 뭐하는 사람이래? 아니 그럼 집이 없어서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하는 건가? 사람이 잠을 자야 할텐데 대체 그 할머니는 어디서 언제 잠을 자는 걸까? 이 추운 겨울에 얇은 트렌치 코트 하나 걸치고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신중호는 맥도날드에서 노숙하는 할머니를 취재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아무렇게 접근해서 사연을 캐물어서는 아무것도 방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멀찌감치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주일 동안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신중호에게 김윤자 씨가 먼저 말을 건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취재가 시작된다. 

신중호는 김윤자 씨의 사연을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바람처럼 할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숙녀, 레이디의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집이 어디인지? 가족은 없는지?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레이디는 ‘마이 시크릿’이라는 대답으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신중호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펼쳐질 때에는 단순히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그리고 교회를 오가는 모습만으로는 다음 편을 방송하기에는 부족했기에 좀 더 깊은 레이디의 사연을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신중호의 궁금증과 염려의 마음은 레이디가 방송으로 해갈해주기 보다는 김윤자 씨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그녀가 노숙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조금씩 알려주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집도 없고 레이디를 찾는 가족도 없고 심지어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상황은 젊은 시절의 허영심과 현실에 대한 무감각한 이상 때문으로 보인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어려운 시절에 좋은 대학을 나와 당시에는 아마도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왔을 레이디가 노후 준비가 전혀 안 된 채로 거리에 나 앉게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자업자득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실존인물이 소설과 비슷한 상황으로 삶을 마감했을 테지만, 실제로 레이디의 마음 속이 어떠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소설 속의 김윤자 씨가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신중호 피디의 촬영 제안에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아라카르트로 음식을 주문하고 즐기는 모습이나 방송 이후 학교 동창들이 찾아와 전해준 돈봉투로 호텔 사우나에서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는 모습은 레이디의 사치와 허영심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어떤 다른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고 그 고된 일정을 고수하는 레이디에게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레이디가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모습은 흡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비춰지다. 거리에서 7년 넘게 생활하며 레이디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혹사시킨 것일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던 레이디의 선택에 대한 의문은 신문에 나온 일본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기사를 보는 장면으로 극대화된다. 사실 레이디는 지난 과거의 자신의 삶과 행동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조금 더 친절할 수는 없었을까” “오타이 쇼헤이의 얼굴을 볼수록. 이 어린 남자아이는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자만심이 느껴지지 않았고, 이 정도의 칭찬은 정말이지 과분하여 자기는 그 정도로는 한 게 없다는 수줍음과 민망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훌륭한 애였다.(315)”


젊은 날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나의 인생길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란 막연한 기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레이디의 완벽무결한 삶을 꿈꾸었던 젊음의 시절도 여느 젊은이들보다 조금 유난한 정도였을 것이다. 혹자는 남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기 싫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일반 목욕탕의 몇십배에 해당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호텔 사우나를 이용했던 그녀의 철없던 젊은 시절을 비난할 것이다. 그깟 프라이버시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남들도 다 자기 분수에 맞춰서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레이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맞게 프라이버시나 우아함을 애저녁에 저 멀리 던저버린다 하더라도 레이디와 같은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녀만의 권리가 아닐까. 그래서 레이디는 집사가 주는 20만원으로 한달을 살아내며 매일이 아니라 며칠에 한 번씩 스타벅스에서 오늘의 커피에 버터 한 덩어리를 녹인 방탄 커피로 하루를 며칠을 견뎌냈다. 그녀가 설문 조사원에게 삶의 질에 대한 질문지 작성을 위해 대화를 나누며 블루베리 케이크를 사게 된 것은 레이디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며칠을 굶게 되더라도 자신이 정한 삶의 영역을 지켜나가겠노라는 진심 그리고 확고한 의지. 그래서 레이디는 어느 곳에서도 눕지 않고 그나마 교회에서 졸며 지나간 삶에서 후회되는 일과 사건들을 위한 보속의 시간을 보낸게 아닌가 싶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도와줄테니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야기 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상식과 일상을 벗어난 레이디의 선택을 조롱하고 동정해 온 이들에게 그녀의 선택은 어리석은 포기로 보이지 않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레이디의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이 때로는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아등바등거려도 내 삶에 진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언젠가는 보속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라는 삶의 법칙에서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스타벅스를 좋아하시나봐요?>

<좋아한다기보다는 뭐랄까… 거슬리는 게 그다지 없다고 할까요. 직접조명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고. 블라인드 내려서 이렇게 채광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좋고요. 파트너들도 교육을 잘 받아서 어떤 손님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합리적이죠. 음악도 요상한 댄스 가요 같은 거 틀지 않고, 정해진 매뉴얼이 있잖아. 미국 본사에서 세팅해서 보내는 규범 있는 리스트라는 게 느껴지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레이디가 동의를 구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신중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이어서 말한다. 

<계절을 느낄 수 있어. 연말에는 캐럴을 틀어주고 그런거 말이에요. 이렇게 잡지도 있고, 신문도 볼 수 있고. 나처럼 생활이 단조로운 사람들은 너무 지루하면 또 못 살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면 숨이라도 쉴 수 있어. 젊은 사람들이 차려입고 다니는 거 보면 얼마나 기운이 나는지 몰라. 새 옷 냄새, 바로 빨아서 입은 냄새, 향수 냄새 같은 게 나. 매일매일 자기를 아끼면서 살아가려는 의욕의 냄새가 나거든. 나는 그런 걸 맡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아주, 아주요.>(165-166)”


“더 이상 집을 살 수가 없는 시대다. 혼자 힘으로는 말이다. 부모가 도와줘야 하거나 대단히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끝내주는 걸 한 방 터뜨리거나.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일부러 돈을 모으지 않는다. 모아봤자 이자도 거의 붙지 않는다. 보람도, 성취도 없다. 월급의 대부분은 월세로 나간다. 그렇게 얻은 집은 좁기만 하다. 그래서 휴일에 집에 있고 싶지가 않다. 처지가 답답하고, 미래가 걱정이다. 

밖으로 나간다. 하다못해 카페라도.

그러니 카페마다 젊은 사람들이 죽치고 있는 거다.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하거나 방송을 보거나 웹툰을 보거나 한다. 집을 놔두고 뭐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뻔뻔하거나 무식한 사람이다. 

기성세대다. 

사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아주 심하게 이상한 게 아니라면 표가 나지 않는다. 섬세하게 보지 않으면 그렇다.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건 세상 때문이고, 앞으로 그런 이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신중호는 생각한다. 맥 레이디와 헝그리 보이 같은 이들이.(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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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김밥 : 힘들 땐 참치 마요 - 행복은 원 플러스 원 띵 시리즈 16
봉달호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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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호 작가의 [삼각김밥: 힘들 땐 참치 마요]를 읽었다. 부제는 ‘행복은 원 플러스 원’이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6번째 책이다. 편의점 점주 10년차이자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삼각김밥에 대한 내용을 잘 전달해주고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오마주삼아 삼각김밥을 의인화시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삼각김밥에 대한 책을 읽으며 언제 내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었나 떠올려보니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았다. 편의점 자체도 잘 가지 않지만 내가 직접 삼각김밥을 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고보니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바쁘지 않아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또 한 가지 삼각김밥을 먹은지 오래된 이유는 간식으로는 주로 빵을 사먹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간단하게 먹어야 할 때 주로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곤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음부터는 삼각김밥을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에서 자주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주인공이 맥주 캔을 들이키며 신세한탄을 한다던지,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던지, 또는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육탄전이 멀어지기도 한다던지 아무튼 편의점은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의 단골 장소이다. 특히나 자리세가 포함된 그럴듯한 호프집이 부담된다면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간단한 마른 안주에 만원에 4캔 짜리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 그야말로 경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편의점이 24시간을 영업하니 시간에 대한 구애도 받지 않는다. 여기에 허기를 채울만한 음식들이 꽤나 구성지게 진열되어 있으니 한 번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거리들이 인스턴트라는 선입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는데, 저자의 삼각김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고나니 삼각김밥이 꽤나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참치마요 하나에 컵라면 하나 땡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쓱 지나간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에서 공부꽤나 한다는 학생들의 상당수가 의대나 법대를 진학한다. 워낙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졸업을 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 자격을 얻고 나면 그야말로 철밥통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특히나 의사가 되면 웬만한 직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소득자가 된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고소득을 올리는 의사들을 옆에서 지켜보니 공부를 잘했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병원이나 학교에 소속된 의사들은 항상 점심시간에 회의를 한다. 서로 진료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오전이나 오후에 다 모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회의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면서 회의를 했다고 하니, 그게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맛을 느낄수나 있었을까.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도 눈치가 보여 회의 이전에 먹거나 이후에 먹을 수 밖에 없다. 의사들 중에 병원밥이 지겨워서 그런지 상당수가 병원 내에 있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그럴때 아마도 삼각김밥은 빠질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말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삼각김밥으로서 인간 세상을 감상하고 나름대로 내린 소박한 결론은 ‘사람 살아가는 풍경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것. 대기업 사장님, 법복 입은 판사님, 샐러리맨 용준 씨, 재수생 희선 씨, 여섯 살 희준이… 직업과 처지는 달라도 누구나 ‘밥심’으로 산다. 120g짜리, 210g짜리, 혹은 320g 고봉밥을 먹더라도 어쨌든 다 ‘밥’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 황금이나 이슬을 먹고 살지는 않는다. 부자라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를 게 있겠나. 사람은 법 앞에선 평등하지 않을지 몰라도 밥 앞에선 누구나 평등해진다. 나는 그렇게 밥의 평등에 기여하는 작은 삼각형이다.(170)”


“편의점 점주에게 삼각김밥이란 꾸밈없이 그런 존재다. 애증의 대상이다. 나를 먹여 살려주고 있으니 고맙고 기쁘기도 하지만 딱 일터에서만 상대하고 싶은 존재인, 마음속 경계선이 분명한 대상이다. 날카로운 당신은 이 책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착잡함과 애증의 감정을 진즉 눈치챘을 것이다. ‘파는 자’와 ‘사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의 감정과 계산은 다르다. ‘가끔 한 번’인 자와 ‘그것이 매일’인 자의 권태로움은 다르다. ‘즐기고 나서 버리는’ 자와 ‘치우고 정리하는’ 자의 고단함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상대성 가운데 어느 정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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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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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작가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었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굴 드라이브’, ‘결로’, ‘작정기’, ‘그런 나약한 말들’, ‘마음에 없는 소리’,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사랑하는 일’, ‘공원에서’ 이렇게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여성이고 30대 중반 이후의 나이대이며 일반적이 시선으로 보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기 보다는 아직 혼자이고 가족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길로 인해 가족들과 때론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는 여성들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인물들이 우는 장면이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는 것보다 우는 일을 더 공들여 했고, 누군가 그 울음을 가만히 들었다. 요즘 나에게 있어 글쓰기란 엉엉 우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온 힘을 다해 남김없이 잘 울고 싶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어디선가 혼자 우는 사람이 없는지도 돌아보고 싶다. 누구도 혼자 울지 않았으면 한다.(315)”


제대로 우는 일은 쉽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다가 감동적인 장면에 찔금찔금 흘러내리는 눈물로는 눈꼽만치도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기 마련이다. 제대로 울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일단 내가 울때 누군가 있어야 한다. 토닥이든 휴지를 건네든 살포시 안아주든 지금 내가 서럽고 폭발적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 울음을 갑작스럽게 멈출 외부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이 없어야 한다. 길 한 가운데에서 눈물샘이 폭발한다던지, 운전 중에 쉴세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면 내 눈물을 지켜볼 사람은 그 과정을 멈추려 할 것이고 나 또한 어디선가 브레이크를 잡으려 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화점이다.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 하나에서 어마어마한 산불이 시작되듯이 묵히고 쌓아두었던 내 감정의 강둑을 와르르 무너뜨릴 우연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모든 조건들이 잘 맞아떨어져 남들이 보면 대성통곡을 하듯이 눈물보가 터지는 경우는 평생에 걸쳐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아마도 어쩌면 엄청난 눈물의 폭발력을 감추고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인 것처럼 느껴진다. 재난의 연속도, 불행의 난타전도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주인공들의 삶이 고독해보인다. 그들이 눈물을 강둑에 차곡차곡 감아두고 싶지 않아도 한 방울, 한 방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견디고 감내하는 가운데 그렇게 쌓여가는 것만 같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의 어린 애인 진영이 나이든 상대의 건강 상태를 알고 떠나갈까봐 두려워서 검진 이후 결과를 알리지 않고 이별을 감내하는 것처럼, ‘굴 드라이브’에서 이주노동자 미셸과 함께 배달 일을 마치고 자신도 서울로 데려가는 말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결로’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처음 만나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의 내용을 전해주다가 얻어입은 가디건을 결국은 헌옷 수거함에 넣으며 동생의 죽음을 상기하는 것처럼, ‘작정기’에서 갑작스런 원진과의 일본 여행이 틀어지고 홀로 떠난 곳에서 만난 유코에게 원진이 죽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결국은 사실이 되어버리는 위로의 재회를 통해서, ‘그런 나약한 말들’에서 정은은 친구 혜수를 통해서 자신이 돌아가신 선생님과 함께 시간이 때론 스토커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에서는 할머니의 휴업한 식당을 이어받아 고향에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려는 나에게 화영과 민구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찾다가 그들과는 다르게 같은 공간에서 예술적인 행위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하면서, ‘사랑하는 일’에서는 영지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마, 아빠, 할머니의 태도에서 상처를 받고 미워하며 결국은 영지에게서 끔찍해하는 아빠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에, ‘공원에서’는 불륜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공원을 지나치며 겪게된 끔찍한 일을 통해서 울음을 터트리거나 울음이 시작된다. 


“한바탕 울고 난 다음에도 완전히 용해되지 못한 어떤 것들이 천천히 가라앉아 앙금이 된다. 앙금이 부정적인 걸 이르는 말이라면 긍정의 감정으로 가라앉은 것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누나, 긍정의 감정은 다 녹아들겠지. 가라앉을 리가 없잖아.(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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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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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돌보는 마음]을 읽었다. 소설집으로 ‘대추’, ‘안’, ‘경자’, ‘연주의 절반’, ‘조리원 천국’, ‘돌보는 마음’, ‘내 이웃과의 거리’, ‘입원’, ‘특별재난구역’, ‘태풍주의보’ 이렇게 여러 편의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연작 소설이 아니기에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이 모두 다 다르고 배경도 정황도 다르지만,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금방 몰입할 수 있었고 매 순간 난감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가 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주 가끔씩 간난 아기를 마주할 때가 있다. 한 번 안아보라는 권유에도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아직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행여나 떨어드릴까 두려워 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그냥 괜찮다며 손사레를 치고 아기의 볼을 살짝 눌러볼 뿐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를 볼 때마다 항상 비슷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기가 나중에 그렇게 변한단 말이지? 어떻게 변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평생 해야 할 효도를 몸도 못 가누는 시기에 다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옹알이를 하며 먹고 자고 싸는 일 밖에 안하는데도 부모들은 아기가 예뻐서 어쩔줄을 모른다. 


내가 일하는 곳에도 조만간 출산을 위해 휴직하는 분이 있다. 잠깐 얘기 나눌 시간이 있어서 언제가 출산 예정이냐고 휴직 기간은 얼마나 되냐고 묻자, 석달 후에 돌아오고 싶은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아이가 중요하지요’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인공수정과 관련되어 야기되는 문제 중에 대리모와의 계약을 인정하느냐가 있다. 극단적인 주장 중에 여성의 경력단절과 임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몸매를 유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대리모를 통해 유전적 결합을 유지한 자녀를 낳겠다는 내용도 있다. 아마도 이런 주장을 내뱉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경력단절이 얼마나 큰 삶의 위협으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기와의 9개월 동안 이어질 단독적이고 직접적인 연결의 시간을 포기할 정도의 위협이라면 저출산의 통계률을 들먹이며 자못 심각한 도표만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전면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표제작인 ‘돌보는 마음’에서도 주인공이 시터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 신경쓰는 모습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바쁜 와중에도 경험이 있는 친구의 조언을 듣고 면접을 하고 한 달 월급의 반을 쏟아부을 정도로 비용이 소요되는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만 경력단절이 되지 않고 원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팀장으로 승진한 이후 덜컥 아이를 갖게 되어 휴직을 하는 동안 입사한 사무적인 계약직 직원으로 인해 한차례의 소동을 겪게 된다. 주인공은 상사에게 불려가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말에 팀장을 맡겨준거라며 마치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된 것이 회사에 커다란 손해라도 끼친 것처럼 말한다. 불의하고 용납될 수 없는 말이지만 이렇게 비겁한 상황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닌 실제상황에서는 더욱 난감하고 비참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소낙비 같은 시련을 견뎌내는 것만이 자녀를 돌보는 길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용납할 수 있을까? 


“미연 씨, 힘들어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버텨야 해. 난. 쌍둥이라 시터 월급 빼면 진짜 남는 게 없었어. 회사 다니면서 내가 쓰는 돈까지 생각하면 마이너스였다니까. 그래도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연 씨도 아이 키우는 동안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버티면서 커리어 지켜.(158-159)”


“[돌보는 마음]은 남을 돌보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된 여자들의 삶에 주목한다. 가족로망스의 주인공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이 ‘평범한’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면서도 자기만의 집을 짓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로망스는 서늘하다. 어머니와 딸, 아내와 남편, 친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둘러싼다. 어머니가 집을 떠나지 않고 가족을 지키며 유지되었던 돌봄은 이제 대부분 경제적 비용으로 환산된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기꺼이 이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경력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길 위의 삶은 누구에게나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외된 삶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읽는다. 김유담의 ‘우리 집 이야기’가 여러 독자에게 가닿는 것은, 그 어떤 집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작품 해설 중에서(296-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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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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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외국에 나가서 살려는 사람이 긴장과 두려움에 휩싸이면 흔히 이런 말로 위로한다. “너무 걱정하지마.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해” 반은 맞는 말이면서도 반은 틀린 말 같다. 이 세상 어디든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응당 비슷한 인간 삶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에 언어와 문화와 음식이 다르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된다 하더라도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내 피의 원천에 대한 갈증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저자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엄마와의 이별과 회복의 시간을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에세이가 아니라 한 편의 성장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자가 묘사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엄마가 투병하는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내용들은 유사한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엄마의 병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은 눈물이 맺히지 않고서는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애절했다. 


암이란 병은 우리의 삶을 갈갈이 찢어놓아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까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주변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으며 변해가는 외모를 지켜봐야만 하는 시간을 견뎌내지만, 그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안고 산다. 행여나 가까운 사람의 가족 중 누군가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앞으로 펼쳐질 지인의 힘든 시간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가족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얄팍한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그런 일은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데 라며 순간적인 변명을 하지만 실상 그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저자가 엄마와 보낸 유년 시절은 우리나라처럼 작은 땅덩어리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좀처럼 겪기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주변에 집이 아무도 없는 마치 산골 깊숙한 곳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딸을 키우는 삶이란 어쩌면 가슴이 터져버릴 만큼 답답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집안일을 하고 자신을 먹이며 키워온 시간을 경멸한다. 애틋했던 모녀간의 관계는 저자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까지 극에 달하게 되고 사춘기를 극복한 저자가 다시 엄마와의 평온함을 되찾을 무렵 마치 누군가 그들 모녀 사이를 질투라도 하듯이 엄마에게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의 질병이 발견된다. 


엄마의 병세가 심해져 한국에서의 여행을 계획하지만 상태가 악화되어 간신히 오리건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며 저자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보여드리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피터와의 결혼식을 무사히 고향집에서 치뤄지고 마치 엄마는 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결혼식을 견뎌낸 것처럼 사위와 춤까지 추게 된다. 엄마에게 결혼식을 보여준 후 이제는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아프다는 말과 함께 의식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디 잠시라고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라지만 엄마는 그렇게 딸과 이별을 한다. 엄마의 몸을 사람들이 옮기기 전에 혼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힐때 얼마나 많은 격정의 울음을 토해냈을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럼에도 저자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는 가운데 상실에 대한 아픔을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음식을 재생하는 방법을 통해 조금씩 회복해 간다. 계씨 아주머니가 엄마를 돌보며 알려주지 않았던 잣죽을 망치 여사의 영상을 통해 만들어 맛보며 부드럽고 고소한 잣죽이 목으로 넘어가며 저자의 마음 속의 생채기를 따뜻이 감싸주지 않았을까 싶다. 감히 저자의 슬픔과 아픔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때밀이 아줌마에게 몸을 맡기고 찜질방에서 몸을 노곤하게 녹이며 받았던 치유의 시간이 앞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힘겨운 시간을 기억하며…


“진행자 제임스 립튼은 이 배우에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248)”


“이러나저러나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와닿은 부분은, 시종일관 어머니의 투병과 때 이른 죽음이라는 무거운 상실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추억하면서 부지런히 자기 치유와 타인과의 연결과 소통을 도모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저자의 건강한 삶의 태도였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막막한 순간이 오더라도 어디엔가는 반드시 당장의 숨구멍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고, 하루하루 그런 반짝이는 구멍들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라고 그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옮긴이의 말 중에서(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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