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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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적극이든 예금이든 평소에 아끼고 절약해서 노후를 위한 돈을 모은다 한들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병치레를 해야 한다거나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렇게 아끼고 절약한 시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반대로 이런 무상함에 대한 결론으로 어차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일단 지금의 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노후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사는 것.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양극단의 선택을 하기 보다는 마치 줄타기를 하듯이 나름대로 노후에 대한 준비도 하며 현재의 삶을 즐기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온 레이디는 우리의 전형적인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마치 일반적인 노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기만의 선택을 존중하며 이어간다. 


소설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이거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검색을 해보니 역시나 어느 방송사의 추적프로그램의 등장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트렌치 코트를 입은 할머니가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검색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 나온 블로그와 카페의 게시글은 대부분 레이디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듯해 자세히 읽지 않고 검색창을 닫아버렸다. 

레이디, 숙녀 김윤자 씨는 벤치에 앉아 죽은 채로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부고 소식을 전달받은 피디 신중호를 통해 레이디의 사연이 드러난다. 75세라는 고령의 여성이 밤 늦게 24시간 운영되는 맥도날드를 찾아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은 채로 새벽까지 머물다 떠난다는 얘기는 누구에게나 솔깃한 소재가 아닐까? 대체 뭐하는 사람이래? 아니 그럼 집이 없어서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하는 건가? 사람이 잠을 자야 할텐데 대체 그 할머니는 어디서 언제 잠을 자는 걸까? 이 추운 겨울에 얇은 트렌치 코트 하나 걸치고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신중호는 맥도날드에서 노숙하는 할머니를 취재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아무렇게 접근해서 사연을 캐물어서는 아무것도 방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멀찌감치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주일 동안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신중호에게 김윤자 씨가 먼저 말을 건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취재가 시작된다. 

신중호는 김윤자 씨의 사연을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바람처럼 할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숙녀, 레이디의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집이 어디인지? 가족은 없는지?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레이디는 ‘마이 시크릿’이라는 대답으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신중호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펼쳐질 때에는 단순히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그리고 교회를 오가는 모습만으로는 다음 편을 방송하기에는 부족했기에 좀 더 깊은 레이디의 사연을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신중호의 궁금증과 염려의 마음은 레이디가 방송으로 해갈해주기 보다는 김윤자 씨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그녀가 노숙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조금씩 알려주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집도 없고 레이디를 찾는 가족도 없고 심지어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상황은 젊은 시절의 허영심과 현실에 대한 무감각한 이상 때문으로 보인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어려운 시절에 좋은 대학을 나와 당시에는 아마도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왔을 레이디가 노후 준비가 전혀 안 된 채로 거리에 나 앉게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자업자득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실존인물이 소설과 비슷한 상황으로 삶을 마감했을 테지만, 실제로 레이디의 마음 속이 어떠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소설 속의 김윤자 씨가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신중호 피디의 촬영 제안에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아라카르트로 음식을 주문하고 즐기는 모습이나 방송 이후 학교 동창들이 찾아와 전해준 돈봉투로 호텔 사우나에서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는 모습은 레이디의 사치와 허영심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어떤 다른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고 그 고된 일정을 고수하는 레이디에게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레이디가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모습은 흡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비춰지다. 거리에서 7년 넘게 생활하며 레이디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혹사시킨 것일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던 레이디의 선택에 대한 의문은 신문에 나온 일본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기사를 보는 장면으로 극대화된다. 사실 레이디는 지난 과거의 자신의 삶과 행동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조금 더 친절할 수는 없었을까” “오타이 쇼헤이의 얼굴을 볼수록. 이 어린 남자아이는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자만심이 느껴지지 않았고, 이 정도의 칭찬은 정말이지 과분하여 자기는 그 정도로는 한 게 없다는 수줍음과 민망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훌륭한 애였다.(315)”


젊은 날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나의 인생길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란 막연한 기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레이디의 완벽무결한 삶을 꿈꾸었던 젊음의 시절도 여느 젊은이들보다 조금 유난한 정도였을 것이다. 혹자는 남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기 싫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일반 목욕탕의 몇십배에 해당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호텔 사우나를 이용했던 그녀의 철없던 젊은 시절을 비난할 것이다. 그깟 프라이버시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남들도 다 자기 분수에 맞춰서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레이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맞게 프라이버시나 우아함을 애저녁에 저 멀리 던저버린다 하더라도 레이디와 같은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녀만의 권리가 아닐까. 그래서 레이디는 집사가 주는 20만원으로 한달을 살아내며 매일이 아니라 며칠에 한 번씩 스타벅스에서 오늘의 커피에 버터 한 덩어리를 녹인 방탄 커피로 하루를 며칠을 견뎌냈다. 그녀가 설문 조사원에게 삶의 질에 대한 질문지 작성을 위해 대화를 나누며 블루베리 케이크를 사게 된 것은 레이디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며칠을 굶게 되더라도 자신이 정한 삶의 영역을 지켜나가겠노라는 진심 그리고 확고한 의지. 그래서 레이디는 어느 곳에서도 눕지 않고 그나마 교회에서 졸며 지나간 삶에서 후회되는 일과 사건들을 위한 보속의 시간을 보낸게 아닌가 싶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도와줄테니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야기 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상식과 일상을 벗어난 레이디의 선택을 조롱하고 동정해 온 이들에게 그녀의 선택은 어리석은 포기로 보이지 않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레이디의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이 때로는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아등바등거려도 내 삶에 진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언젠가는 보속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라는 삶의 법칙에서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스타벅스를 좋아하시나봐요?>

<좋아한다기보다는 뭐랄까… 거슬리는 게 그다지 없다고 할까요. 직접조명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고. 블라인드 내려서 이렇게 채광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좋고요. 파트너들도 교육을 잘 받아서 어떤 손님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합리적이죠. 음악도 요상한 댄스 가요 같은 거 틀지 않고, 정해진 매뉴얼이 있잖아. 미국 본사에서 세팅해서 보내는 규범 있는 리스트라는 게 느껴지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레이디가 동의를 구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신중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이어서 말한다. 

<계절을 느낄 수 있어. 연말에는 캐럴을 틀어주고 그런거 말이에요. 이렇게 잡지도 있고, 신문도 볼 수 있고. 나처럼 생활이 단조로운 사람들은 너무 지루하면 또 못 살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면 숨이라도 쉴 수 있어. 젊은 사람들이 차려입고 다니는 거 보면 얼마나 기운이 나는지 몰라. 새 옷 냄새, 바로 빨아서 입은 냄새, 향수 냄새 같은 게 나. 매일매일 자기를 아끼면서 살아가려는 의욕의 냄새가 나거든. 나는 그런 걸 맡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아주, 아주요.>(165-166)”


“더 이상 집을 살 수가 없는 시대다. 혼자 힘으로는 말이다. 부모가 도와줘야 하거나 대단히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끝내주는 걸 한 방 터뜨리거나.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일부러 돈을 모으지 않는다. 모아봤자 이자도 거의 붙지 않는다. 보람도, 성취도 없다. 월급의 대부분은 월세로 나간다. 그렇게 얻은 집은 좁기만 하다. 그래서 휴일에 집에 있고 싶지가 않다. 처지가 답답하고, 미래가 걱정이다. 

밖으로 나간다. 하다못해 카페라도.

그러니 카페마다 젊은 사람들이 죽치고 있는 거다.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하거나 방송을 보거나 웹툰을 보거나 한다. 집을 놔두고 뭐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뻔뻔하거나 무식한 사람이다. 

기성세대다. 

사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아주 심하게 이상한 게 아니라면 표가 나지 않는다. 섬세하게 보지 않으면 그렇다.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건 세상 때문이고, 앞으로 그런 이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신중호는 생각한다. 맥 레이디와 헝그리 보이 같은 이들이.(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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