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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 전2권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보니 가머스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LESSONS In CHEMISTRY)] 1-2를 읽었다. 1950년대의 미국 사회의 한 가운데에 서서 엘리자베스의 고군분투하는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과 100년도 안된 과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뤘고 나라가 반토막이 난 후 피폐해진 국민의 삶은 오로지 경제적 재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야말로 혼란과 수습의 반복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배고픔의 극복이라는 가장 큰 화두는 어쩌면 당시 미국의 엘리제베스와 같은 여성들이 겪었던 불평등과 수모의 시간을 아예 저 밑바닥에 감춰두고 감히 인권과 차별에 대한 말 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그거 한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였다. 배고픔과 경제적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다 쓸데없는 짓이었고, 행여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또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선택하는 행동들은 다 부질없는 허황된 짓으로 여겨졌다. 어쩌면 익명의 엘리자베스 조트와도 같은 인물이 1cm씩 우리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해 온 것은 아닐까?
새학기가 되면 소설 속의 선생님이 매드에게 가계도를 제출하는 과제를 내준 것처럼, 가족들의 신상에 대한 내용을 적어내라며 규격화된 서류를 나줘주곤 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없이 왜 해마다 똑같은 내용을 적어서 내야 하는지 귀찮은 일로만 여겼었는데, 개인신상정보가 가득 담긴 그 서류는 학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부모와 가족들의 교육, 경제 수준을 한 눈에 알아보기 위한 심각한 침해행위였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나 부모님 중의 한 분이 돌아가시거나, 이혼했거나, 미혼모, 미혼부의 자녀일 경우에는 매번 부모님이 신상에 대한 내용을 적을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그런 가정의 상황을 가정조차 해보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대수롭지 않게 소수의 쓰라린 아픔을 헤아리기 보다 정상적인 가족의 구성이라는 잣대를 일방적으로 들이대곤 해왔다.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그의 영혼의 단짝인 캘빈의 어머니 에이버리 파커는 미혼모이다. 엘리자베스는 당시에는 통용되지 않던 동거의 삶을 선택하고 갑작스럽게 캘빈이 사망한 후 매드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캘빈의 어머니 에이버리 또한 17살의 풋사랑으로 아이를 갖게 되고 저명하고 부자였던 부모는 명예가 실추될 까 두려워 에이버리의 아이가 사산되었다며 진실을 감추게 된다. 매드가 가계도의 과제를 억지로 해내며 서서히 드러나는 캘빈의 과거는 엘리자베스가 당시의 억압된 여성들의 해방을 위한 기폭제 같은 말과 행동으로 정점에 달하게 되고, 엘리자베스와 캘빈 주위의 돈과 자기 밖에 모르는 팔염치한 인물들의 몰락도 함께 그려진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성폭력을 휘둘렀던 교수나 엘리자베스의 연구물을 가로채 자신의 업적으로 삼은 도나티 교수, 그리고 캘빈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기부금을 받으려 혈안이 된 주교와 같은 인물들은 혈압을 상승시키는 분노를 자아내게 했으며, 이런 극악무도한 인물이 실제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엘리자베스의 상황을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미혼모가 된 엘리자베스가 갓난아기를 키우는 데에 좌절할까봐 염려하며 친구와 동반자가 되어준 해리엇, 조트가 첫 방송부터 전형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상관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만한 진행을 했음에도 끝임없이 조트를 지원하고 지켜준 월터 파인PD, 캘빈과 펜팔 친구였으며 캘빈의 편지와 죽음으로 인해 신과 과학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 후 캘빈의 딸 매드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 웨이클리 목사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고 염치 조차 없는 이들에게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또한 비록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온갖 추잡한 소문을 만들어 조트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결국 해고되도록 일조한 프래스크는 조트가 자신과 같은 강간을 당하는 억울한 일로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조트가 윌슨 변호사와 에이버리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조력자가 된다. 이렇게 상반된 인물들이 조트와 매드의 삶을 줄다리기 하는 동안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캘빈이 사고로 죽는 원인이 된 실패한 폭탄 탐지견 여섯시-삼십 분이다. 이 개의 독특한 이름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인간과는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하더라도 조트와 매드를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조트와 매드가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여섯시-삼십 분의 존재는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평소 과학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요리는 화학입니다'라는 엘리자베스 조트의 말과 '6시 저녁 식사'라는 요리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오는 화학식들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실제로 이런 방송이 인기를 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트의 파격적인 시도는 분명 거대한 나비효과를 가져왔을거라고 생각된다. 어찌보면 시대마다 이렇게 전형적으로 용납되는 행태들을 과감히 깨부수고 튀는 행동들을 거침없이 해온 이들을 통해서 우리사회는 변화해온 것이다. 조트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이 다섯을 가진 엄마가 의사가 되고자 공부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예들은 단지 소설 속의 가공할 만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시도해야 할 자기 자신을 찾는 길임을 알려준다.
또한 조트와 캘빈의 달콤한 시기에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조정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생소한 운동에 해당되는 조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고, 이야기게 조정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보트가 뒤집어져서 수영을 못하는 조트가 조정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조트의 삶을 무너뜨리기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다가온 불운한 일들을 겪었음에도 삶이 지속되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조트와 캘빈과 매드가 살아온 시대와견주어 지금은 꽤나 많은 변화가 생기고 나아진 것 같음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조트와 같은 이유로 힘겨워하고 고통에 늪에 빠진 이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저자는 분명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조트의 조력자와 같은 역할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이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다. 자신이 이룬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다라 규정되는 삶을 이어온 것이다. 과거 그녀는 방화범의 자식, 남편을 갈아치우는 여자의 딸, 목매달아 죽은 동성애자의 동생 아니면 호색한으로 유명한 교수 밑에 있던 대학원생일 뿐이었다. 지금은 유명한 화학자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오롯이 엘리자베스 조트로 받아들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1권 85)"
"부모가 되는 일은 공부하지 않은 영역의 시험을 치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매일 들었다. 너무나 어려워서 주눅이 드는데 선택지도 없는 주관식이 대부분이다. 때로 그녀는 담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깨어난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지 모를 인물이 빈 아기 바구니를 들고서 권위적으로 <우리가 당신의 최근 부모 수행 능력을 평가한 결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해고입니다.>라고 통보하는 꿈이었다.(1권 268-269)"
"제가 경험한 바로는 아내와 어머니, 여자로 살아가는 데 드는 희생과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음, 저는 그 희생과 노고를 잘 알아요. 우리가 함께 30분을 보낸 뒤에는 그럴 가치가 있는 결과물을 얻게 될 겁니다. 눈에 확 띄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만들 겁니다. 참 중요한 것이죠.(2권 16)"
"반면 '6시 저녁 식사'는 인간의 공통적인 화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시청자들이 이제껏 배워온 사회 규범, 즉 '남자는 이렇게 여자는 저렇다' 식의 케케묵은 관념에 저도 모르게 얽매여 있더라도, 우리 방송은 문화적 단일성을 넘어서 생각하도록 격려해주는 겁니다. 분별력을 갖추고 과학자처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2권 105)"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여러분의 재능을 잠재우지 마십시오. 숙녀분들. 여러분의 미래를 직접 그려보십시오. 오늘 집에 가시면 본인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시작하십시오.(2권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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