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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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 작가의 [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를 읽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가 1일 생활권이 되었고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산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일이 언제든 제일 우선시되며, 지금 나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항상 따라붙는 적절한 핑계가 되는 말은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언제 다 신경쓰고 사느냐’이다. 사실 그렇다. 정말로  먹고 살기가 바쁜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고 그런 정보에 관심도 여유도 없는 이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전세계의 실상을 다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언론이 전해주는 내용을 통해서 걸러듣게 된다. 우리나라 언론은 그 나라 언론이 게재한 내용을 그대로 담거나 때로는 우리 입맛에 맛게 변형하기도 한다. 다른 사정 뿐만 아니라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상황 조차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팩트만을 전달하겠다는 뉴스 보도도 한정된 시간안에 보도할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에 때로는 정말로 대중들이 알아야할 내용들이 쏙 빠진 채 엉뚱한 내용이 보도되기도 한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범람하다 보니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가장 신뢰를 심어주어야 할 국가기관과 국제기구들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휩쓸려 상식적이지 않은 행보를 걷는 것이 드러날 때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속고 사는 게 맘편하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무관심은 결국 작금의 사태에 이르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버린다.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의 이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편재하지 않게큼 양심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사회적 구조를 바꿔나가야만 한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히어로가 나오는 판타지 영화 속에서 아무런 특별한 힘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괴수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린치를 당하는 것처럼, 국가와 민간기업을 이끄는 이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너무 순진한 말이지만, 아니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이토록 계획적으로 저지르는 것일까?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보화 사회에서 자기들의 기만적인 행동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뻔뻔한 거짓말을 일삼는다. 


‘1부 접점을 만든다’에서는 이미 멀티플렉스에 점령당한 우리나라 극장가의 현실을 더 비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멜리에스 공공영화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영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마치 천만 영화를 만들어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멀티플렉스에서도 영화 하나만 상영할 때가 있다. 당연히 영화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상업성을 가진 영화만 살아남게 된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비교 또한 대형인터넷 서점과 동네 독립서점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부동산 투기와 아파트 공화국에 되어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2부 발언한다’에서는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인 출산율에 대한 내용이다.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전만 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현상을 서구화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인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선진국이 되어 먹고 살만해지면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유럽에서 출산대국에 이르렀고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출산율이 높다. 해마다 정부에서는 각종 출산장려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미 헬조선이 시작된지 한참 지난 시기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선택은 마치 모험을 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출산 정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아이를 낳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못 낳은 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다.


‘3부 거리로 나선다’에서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노란 조끼’ 투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가끔씩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이 지금의 대통령 마크롱을 규탄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명백한 거짓말과 일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앞장선 이가 어떻게 재선에 성공했는지 의아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으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특정한 리더 없이 수년 동안 지속된 ‘노란 조끼’ 투쟁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4부 고발한다’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 팬데믹 전체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실려있다. 점점 뒤로 갈수록 분노게이지가 상승하고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를 이렇게 농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경악스러웠다. 팬데믹 초기에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WHO의 결정사항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뉴스에서는 명확한 팩트체크를 하지 않았지만 간혹가다 WHO 사무총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이나, 어디선가 압력을 받아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을 내비췄다. 당시만 해도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자, 그것을 쇄신하기 위한 중국의 압력이 WHO에 가해진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도 미국도 아닌 거대한 재벌과 제약회사의 어마어마한 로비의 결과로 국제기구와 대부분 힘있는 국가의 정부마저 WHO의 팬데믹 선언을 받아들이며 국민들을 공포로 선동하고 세계대전을 발발케 한 전체주의의 부활을 도모하여 수십조원의 이익을 거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특히나 많은 논란이 가중시킨 코로나 19 바이러스 치료제와 백신 개발과 백신 접종의 강요와 백신 패스 등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줄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악인들의 집합체가 이렇게 교묘하고 촘촘하게 엮여 전세계 사람들을 기만했다니 차라리 그냥 이런 주장이 소수의견에 불과하다면 다행일텐데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국제보건기구에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철하는 선두 주자처럼 포장된 빌 게이츠는 마치 유전자 조작 종자와 제초약으로 쓰이는 몬산토 기업에 투자해 얻은 배당금으로 자선 기부를 해온 것이다. 코로나 백신 개발이 시작될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많은 국가의 수장들에게 직접 기부를 종용하며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백신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취하게 된다. 책에서 거론된 ‘자선 자본주의’는 이렇다. 


“기부사업은 세계화된 경제계에서 가장 번창하는 산업이라고, 게이츠의 마르지 않는 곳간의 비밀을 설명한다. 이들의 기부는 교육, 농업, 보건 분야의 정책 영역에서 억만장자들이 전대 미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데 직접 기여하고, 상위 1퍼센트 부자들은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 구조를 더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와 달리 국회의 논의를 거칠 필요도, 감사를 받을 필요도 없다. ‘내 돈 내가 쓰고 싶은 곳에 폼나게 쓴다’는 기부란 이름의 자유로운 행위는 그 모든 귀찮은 절차를 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영역의 질서를 개편하게 해주는 도구다. 정치인들처럼 시시때때로 표를 구걸할 필요도, 가진 권력을 하루아침에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는 그들은 유아독존의 존재다. 현명하게도 게이츠 재단은 학계와 주류 언론, NGO에도 넉넉하게 선의를 베풀어 온 덕에 웬만한 잡음들을 소거할 수 있었다.(295)”


마치 이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지난 팬데믹 시기를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가 널리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래본다. 


“진지한 하루의 일과인 듯, 마당을 공유하는 네 마리의 이웃집 고양이들은 오늘도 담장과 마당, 지붕 위를 빠짐없이 두루 산책하고 마당을 뒹굴며 뛰어논다. 메마른 나뭇가지들을 분주히 오가며 먹이를 찾던 새들도 종종 가지 위에 나란힌 앉아 다정한 스킨쉽을 나눈다. 이들에겐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백신도, 모임 제한 같은 우스운 지침도 필요치 않다. 그들에겐 그들의 신체에 대해 결정하는 WHO도, 공포를 전달하는 TV도, 방역규칙을 결정하는 질본도 없으니, 하늘을 날고 담을 넘기 위해 그 어떤 패스도 필요치 않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분명 같은 바이러스들과 공존하지만, 그들의 삶은 2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가 타고난 지혜라는 제 안의 버튼을 끄고 자본과 권력의 스피커인 주류 언론에 귀 기울이는 동안, 현생 인류는 사피엔스라는 학명게 걸맞지 않게, 심각하게, 매우 심각하게 퇴화하고 있다.(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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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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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그동안 '일간 이슬아'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얼핏 보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차에 저자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몇 페이지를 읽지도 않았는데, 왜 일간 이슬아가 화제성을 갖게 된 것인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뭔가 특이하다. 아주 간결하고 쉽게 읽히고 뒤끝이 없이 세상 쿨할 것 같아 한 마디로 글에서 간지(일본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간지만의 맛깔스러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가 난다. 아니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신선함이 마구마구 느껴졌다. 


저자의 이전 작품들을 전혀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부와 저자와의 관계가 마치 소설 속의 설정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화감이 제로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그냥 에세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가장 이유는 가녀장이라는 가정이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출판사의 직원으로 딸을 상사로 모신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센세이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녀장이라는 소설의 설정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가녀장들이 그리고 가족 기업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녀장과 가족 기업은 실제로 많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과 같은 관계는 본 적이 있는가? 


우선 가정집과 출판사가 한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공간을 시간에 따라서 출판사와 보금자리라는 경계가 구분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부럽고 멋지게 보이는 것은 낮잠 출판사 사장인 슬아와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이가 일하는 관계 속에서는 철저하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부모가 아닌 모부라고 표현을 하니까 모부 자식 간에 일을 하며 더군다나 자식이 상사인 경우에 이렇게나 깍뜻한 경어의 사용이 가능할까? 부지불식간에 평소에 하던 말버릇이 튀어나오고 감정적으로 변하기 쉬운게 모부 자식 사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소설 속의 모부 자식 사이는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존중한다. 뭔가 딸 슬아가 상사이고 경제권을 갖고 있어서 엄마와 아빠가 이용당하는 것이 아닐까란 우려는 안방에서 부부가 내뱉는 말로 한 순간에 불식된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반복된 엄마와 아빠의 귓속말은 위트를 자아내며 소설 속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소설의 제목에 '가녀장'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 사이에 마치 종교와 신념처럼 달라붙은 가부장 시대의 부조리와 차별을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방법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소외토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보자는 제안이 아닐까 싶다. 성역할과 성별 구분의 답습으로 결정된 사회적 요인들이 가부장제라는 이름으로 고착화되어 온 역사를 보기좋게 한 방 날리는 낮잠 출판사의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소설의 중간에 아빠 웅이가 동창회에서 딸을 상사로 모시는 것을 약간은 빈정대는 말이 오갈 때 '다 내가 맞춰 주는 것'이라고 응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시간이 흐름만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가사 노동의 신성함과 자녀가 모부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과 완전히 다른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견고한 틀을 부수는 이들의 생각과 말에 경청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생채기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요한 들 타인은 내 생각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기 위한 발판이 되는 배려이듯이, 소설 속의 슬아와 복희와 웅이가 부럽다면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를 배려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잔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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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9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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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작가의 [동화처럼]을 읽었다. 근래에 들어 어릴때 읽고 들었던 전래동화나 서구의 동화들의 숨겨진 내용을 낱낱이 드러내는 잔혹동화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의 일부분이 원래의 소설 일부를 각색해서 쉽게 쓴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원전은 그렇게 해피하지만은 않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낭만적이고 교훈적인 동화의 때론 추악하고 끔찍한 전말을 다 알게 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에 잔혹동화의 결과를 읽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동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가 잔혹동화가 그 자체이니 말이다. 요즘 아이들도 동화를 읽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더 이상 허접하게 각색된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부탁으로 덜컥 사버린 동화전집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동화작가들의 쓴 좋은 책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준비물은 충분한 셈이다. 하지만 동화책과 동네 아이들과의 흙장난이 재미의 전부였던 시절에서 단 10초도 안 걸려 대부분의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각종 영상과 게임이 넘쳐나는 시대로 전환되었기에 준비된 훌륭한 동화책들은 행여나 힘을 못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전보다 철드는 시기가 늦춰졌다고 한다. 이미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건가라는 생각도 든다. 환갑을 맞으면 동네 잔치를 벌였던 시대처럼 수명이 짧아 제2차 성징과 더불어 철이 들고 어른이 되었던 시대와는 다르게 그보다 몇십년은 더 살게 되었으니 너무 일찍 철이 들면 남겨진 시간들이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늦게 철이 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란 엉뚱한 추론을 해본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성인으로 인정받아 직업을 갖게 되는 나이대가 어느덧 20대에서 30대로 넘어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몸으로는 어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내적으로는 아직 어린 아이가 남겨져 있다. 


오랫만에 풋풋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0년대 초반 대학생활을 시작한 장미와 명제는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치하에서 화염병과 최루탄에 둘러싸여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당연시 받아들이는 개취와 서구문화에 흠뻑 빠져든 새로운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평범한 학생들이다. 노래패 동아리에 들어간 대학동기들은 MT에 가서 흠모하는 대상을 마음에 품게 되고 질투와 불확신의 소용돌이에서 분노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몇 년이 지난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재회하게 된 명제와 장미는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기막힌 확률을 계산하고, 공복과 계시 같은 엄마의 주문에 결을 맞춘 행운을 통해 연인이 된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명제와 장미의 결혼은 IMF라는 경제위기로 인해 여행사의 도산하며 신혼여행이 파토가 나며 불운이 시작된다. 때마침 결혼식장에 장미의 첫사랑인 치대생 서정우가 초대받은 것인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나타나 명제에게 불쾌감을 안기며 설상가상으로 취소된 신혼여행을 제주도에 있는 친구의 호텔을 예약해주는 구세주로 등장한다. 


서정우에 대한 오해와 다툼으로 신혼여행 첫날부터 위기를 맞이한 명제와 장미는 이후 신혼부부의 전형적인 다른 생활방식에 오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 위기를 맞게 된다. 소설의 도입부에 나온 눈물의 공주와 침묵의 왕자 동화 이야기처럼 장미는 눈물이 많은 여자였고, 명제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결핍이 있었다. 강유정 평론가의 작품해설에 나온 것처럼 이 세상 어떤 부모도 단 하나의 결핍없이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완벽하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서포트 해주면 모자람없이 자랄 것 같지만 오히려 결핍이 없는 환경이 아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결핍에서 오는 무능함과 무력함의 이유를 제3자에게서 찾지 않는 것이다. 장미가 오랜시간 계모와도 같이 자신을 대한 엄마에게서 눈물의 이유를 찾은 것처럼, 명제가 엄마의 부재와 더불어 아버지의 한결같은 과묵함으로 인해 침묵의 이유를 찾은 것처럼 그들은 결혼을 하고 헤어지고 다시 재회하기까지 여전히 숲속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의 동화속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남들의 눈에 비춰졌을 때 두 번 째 헤어짐이라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반등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다. 별거와 이혼이라는 과정에서 우울의 긴 시간을 보낸 장미는 홀로서기를 통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찾아나가게 되고, 동화작가로 등단한 소식을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명제는 장미의 병든 아버지가 찾는 말에 서둘러 달려가며 재회하게 된다. 이미 상실의 큰 아픔을 겪은 명제와 장미는 더 이상 동화의 결말을 믿는 철부지 소년 소녀가 아니며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기원해 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들의 성장사는 장미가 더 이상 엄마를 계모처럼 여기지 않고 엄마 또한 아빠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절정에 달하고 되고, 명제 또한 아버지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미안하다'는 말을 통해 침묵이 해제된 넉살 좋은 말을 늘어놓는 살가운 사위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동화의 결말이 항상 그렇듯이 명제와 장미의 동화도 해피엔딩을 예감케 한다. 살다보면 또 어찌될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잔혹동화가 난립하는 시대에 한 번쯤은 꿈꿔 볼 새콤달콤한 연애사가 아닌가 싶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볕이 좋으면 볕이 좋다고 건네는 인사는 죄의식과 무관했다. 비와 눈과 볕에게는 죄가 없다. 죄는 비와 눈과 볕을 핑계 삼는 마음에게 있는 법. 비가 와서 그립다고, 눈이 내려 심란하다고, 볕이 좋아 쓸쓸하다는 마음들에게.(206)"


"깨달음은 언제 찾아오는가. 깨달음은 찾아오는 게 아닐 것이다. 빛이 그러하듯 깨달음 또한 우리 안에 있으니 어둠이 깊을 대로 깊어져 바깥에 목매던 시선이 내면을 향할 때 비로소 깨달음을 알아보게 되리라. 늘 그곳에 있어 온 깨달음을. 어떤 이는 수술대에 누워서, 어떤 이는 산꼭대기를 눈앞에 두고, 또 어떤 이는 철 지난 팝송 가사를 받아 적다가.(249)"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인류는 언제부터 시간을 강물에 비유했을까?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그리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한 철학자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금언을 남겼으니까. 흐르는 강물과 같은 시간은 모래톱의 모양을 바꾸듯 세상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하늘의 높이를 바꾸고 구름의 모양을 바꾸고 나뭇잎의 색깔을 바꾸고 사람들의 얼굴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깊고 넓은 강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듯, 매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을 바라보고 나뭇잎을 들여다보고 얼굴을 쳐다본다면 시간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고 넓으니까.(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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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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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을 읽었다. 팬데믹이 시작되던 제작년 초에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그동안 왜 그렇게 SF장르 문학에 관심이 없었던가 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편식을 하듯이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놈의 개연성’에 몰입되어 장르 문학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도 유년 시절의 첫 번째 꿈은 과학자였고, [과학동아]라는 꽤 즐겨봤던 시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등학생 때 과학과목을 제일 싫어했던 게 SF장르를 외면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아주 오랜시간 모라또리움처럼 유예의 기간을 보낸 덕분에 거의 백지상태에서 흡수하듯 다가온 저자의 짧은 단편들이 만들어낸 시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서사들이 정말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지냈음을 일깨워 주었다. 


과학적 사실과 철학적 진리는 자연적 사실의 영역과 윤리적 가치의 영역의 거대한 단절처럼 인식과 증명이 가능한 존재의 문제냐, 아니면 추정할 뿐 증명할 수 없는 당위의 문제냐로 갈라진다. 이 거대한 단절은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측면의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 적용되는 많은 사안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나 힘과 권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실용성에 우선을 두고 소수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된다면 이 거대한 단절은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를 만들게 된다. 저자의 책 앞부분에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으며 ‘이 SF소설도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SF소설에 대한 나와 같은 편견을 갖고 있던 많은 이들이 시공간 이동, 우주이야기 등 정도일 것이라 단정지었지만, 막상 읽고 나니 그동안 읽었던 사실주의 소설과 유사한 감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번 책에서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지독히 인간 중심적인 이야기로만 가득한 내용에서 눈을 돌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주의 관점에서 티끌만도 못한 유한한 인간의 생로병사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사는 싶은 뭔가 초월하고 해탈한 듯한 가뿐해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을 이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입자 모양으로 우주의 먼지가 될 존재이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작은 바람의 시초가 되는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화학을 전공한 저자가 SF소설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하고 SF장르의 선구자들의 책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기나긴 고백은 마치 한편의 성장소설처럼 앞으로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자가 만났던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책들과의 만남에 우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전개한 내용들은 앞서 말한 거대한 단절을 좁히고 양립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우연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요행이나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존재의 우연성’을 알게 된 후,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원동력이 우연성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존재의 우연성을 인정하기 전에는 마치 짙은 안개가 덮인 것처럼 막연하게 자신의 삶을 그려볼 뿐 구체적인 경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에 반드시 찾아오는 우연적인 만남은 내가 가야할 길을 명확히 그려준다. 그리고 그 명확한 길을 감에 있어 저자의 SF소설은 그동안 자기만 바라봤던 ego의 시선에서 벗어나 ego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를 제공해준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혹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출렁이게 하고 확 쏟아버리게 하는 것. 뒤늦게 다시 주워 담아보지만,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은 것.(9)”


“어쩌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재미있는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아주 약간 열어놓는 것. 그것은 소설가로 살아가고 싶은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태도였다. 좋아하는 세계를 자꾸 의식적으로 넓혀나가지 않으면, 소설도 내가 편애하는 자그만 세계에 갇히고 말 테니까. ~~ 어느 쪽이든 그 책들은 언제나 우연성을 가득 품고 있어서 나의 좁은 세계에 작고 큰 균열을 낸다.(230-231)”


“카슨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제왕나비의 죽음을 예감했던 자신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슬픔에 잠기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끝도 불행한 사건이 아님을 카슨은 ‘그 반짝거리며 팔랑거리는 생명의 조각들’로부터 배운 것이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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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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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의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읽었다. 부제는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이다. 어릴때에는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전문성을 가진 직업을 갖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부와 명예를 가져오는 업적까지 쌓게 된다면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괜찮은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겉으로 보여지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처럼 정보 공유가 쉽고 빠른 시대를 살지 않았다면 어릴때의 생각이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의 추문과 심지어 내가 알고 지냈던 존경받았던 누군가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면서 성공한 삶이란, 잘 살아온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시쳇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어?’가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심지어 패륜아 같은 악질적인 사람도 1대1 만남이 아닌 대중적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면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거나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180도 돌변하여 금수만도 못한 말과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CCTV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힘든 첨단 사회가 되어갈수록 공적인 증거가 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는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진짜 존경하고 추앙받아 마땅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사각지대에서도 한결같은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선택적으로 ‘나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함께 할 때의 소속감과 공감대 형성이 주는 따뜻함과는 반대로 혼자 일 때는 나른함, 게으름, 무기력함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다. 이런 피상적인 모습 말고 앞서 말한 사각지대의 한결같은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시간을 잘 마주해야 한다.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내놓은 위대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일상적인 모습은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요즘은 SNS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일상의 자세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도 하지만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멋지고 예쁘고 힙하고 쿨하고 뭔가 그럴싸한 일상들만 공개할 뿐이다. 


인간은 언제 가장 뿌듯한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일까? 명품으로 제 몸을 도배한다 한들 또 다른 신제품이 나오게 되고 자기보다 누군가가 앞서 레어템을 얻게 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누군가의 칭찬도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잘했는데, 내가 이렇게 성실했는데, 내가 너에게 이렇게 잘해줬는데,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의 칭찬과 고마움의 말들을 금방 휘발되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때 가장 큰 기쁨과 충만함을 얻게 된다. 나 자신이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은 금방 소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기특한 행동을 위해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너무나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나 혼자’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의 명화 속에 담겨진 화가와 얽힌 속내들을 읽으며 놀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애써 감추려고 지하 창고의 먼지가 가득쌓인 두툼한 열쇠로 봉인된 상자를 열어젖힌 것처럼 차라리 몰랐다면 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이렇기 긴 시간을 너무나도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일까?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하니까 되던데’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쌓아왔던 시간들이 갑작스러운 쓰나미처럼 우리의 일상을 덥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특히나 이 책은 아주 오랜시간 견고하게 쌓아온 가부장제의 처절한 민낯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느냐고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하라며 경종을 울린다. 특히나 저자의 글 속에서 드러난 가부장제로 인해 벌어진 지난한 역사의 반복은 어느 국가의, 어느 공동체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바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자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과연 가부장제의 이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나? 성별에 지정된 역할과 행위를 지지하며 우위를 점하고 발판으로 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는가? 


책 속에 등장한 유명한 화가들이 뮤즈라는 미명하에 너무니없는 나이차를 넘어서는 결혼을 하고 어린 배우자를 모델로 수십년간 세운 일들과 충분한 교육과 지원이 있었다면 배우자 못지 않게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저 남편의 내조자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의 역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저자의 강렬한 표현 중의 하나인 ‘인생을 갈아넣었다’라는 말을 통해 한 명의 화가가 한 평생 그림에 올곳이 집중할 수 있기 위한 아내의 헌신적인 가사 노동을 비롯한 제반 관련 일들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그럼에도 온 삶을 갈아넣은 아내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잔혹한 현실을 드러나게 해 준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모든 여자들은 샤프롱(chaperon)이라고 불렸던 동반자 없이는 아예 이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여자에게는 집 밖에서 혼자 있을 권리도, 혼자서는 이동할 자유도 없었던 것이다.(194-195)”


“21세기 한국에 사는 블루 스타킹의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인기가 없다’ ‘너무 잘난 여자는 적을 만들고 남자들도 피곤해한다’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사회의 악평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쿠션어’를 사용한다. 쿠션어란 틀린 내용 하나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들릴까봐 애교와 이모티콘 같은 ‘쿠션’을 이어붙여 문장을 맺는 어법을 말한다. 쿠션어를 쓰면 적어도 ‘드세 보인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어법이 오히려 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듣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어 결과적으로 발화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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