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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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을 읽었다. 팬데믹이 시작되던 제작년 초에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그동안 왜 그렇게 SF장르 문학에 관심이 없었던가 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편식을 하듯이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놈의 개연성’에 몰입되어 장르 문학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도 유년 시절의 첫 번째 꿈은 과학자였고, [과학동아]라는 꽤 즐겨봤던 시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등학생 때 과학과목을 제일 싫어했던 게 SF장르를 외면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아주 오랜시간 모라또리움처럼 유예의 기간을 보낸 덕분에 거의 백지상태에서 흡수하듯 다가온 저자의 짧은 단편들이 만들어낸 시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서사들이 정말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지냈음을 일깨워 주었다. 


과학적 사실과 철학적 진리는 자연적 사실의 영역과 윤리적 가치의 영역의 거대한 단절처럼 인식과 증명이 가능한 존재의 문제냐, 아니면 추정할 뿐 증명할 수 없는 당위의 문제냐로 갈라진다. 이 거대한 단절은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측면의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 적용되는 많은 사안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나 힘과 권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실용성에 우선을 두고 소수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된다면 이 거대한 단절은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를 만들게 된다. 저자의 책 앞부분에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으며 ‘이 SF소설도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SF소설에 대한 나와 같은 편견을 갖고 있던 많은 이들이 시공간 이동, 우주이야기 등 정도일 것이라 단정지었지만, 막상 읽고 나니 그동안 읽었던 사실주의 소설과 유사한 감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번 책에서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지독히 인간 중심적인 이야기로만 가득한 내용에서 눈을 돌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주의 관점에서 티끌만도 못한 유한한 인간의 생로병사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사는 싶은 뭔가 초월하고 해탈한 듯한 가뿐해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을 이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입자 모양으로 우주의 먼지가 될 존재이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작은 바람의 시초가 되는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화학을 전공한 저자가 SF소설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하고 SF장르의 선구자들의 책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기나긴 고백은 마치 한편의 성장소설처럼 앞으로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자가 만났던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책들과의 만남에 우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전개한 내용들은 앞서 말한 거대한 단절을 좁히고 양립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우연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요행이나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존재의 우연성’을 알게 된 후,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원동력이 우연성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존재의 우연성을 인정하기 전에는 마치 짙은 안개가 덮인 것처럼 막연하게 자신의 삶을 그려볼 뿐 구체적인 경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에 반드시 찾아오는 우연적인 만남은 내가 가야할 길을 명확히 그려준다. 그리고 그 명확한 길을 감에 있어 저자의 SF소설은 그동안 자기만 바라봤던 ego의 시선에서 벗어나 ego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를 제공해준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혹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출렁이게 하고 확 쏟아버리게 하는 것. 뒤늦게 다시 주워 담아보지만,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은 것.(9)”


“어쩌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재미있는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아주 약간 열어놓는 것. 그것은 소설가로 살아가고 싶은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태도였다. 좋아하는 세계를 자꾸 의식적으로 넓혀나가지 않으면, 소설도 내가 편애하는 자그만 세계에 갇히고 말 테니까. ~~ 어느 쪽이든 그 책들은 언제나 우연성을 가득 품고 있어서 나의 좁은 세계에 작고 큰 균열을 낸다.(230-231)”


“카슨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제왕나비의 죽음을 예감했던 자신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슬픔에 잠기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끝도 불행한 사건이 아님을 카슨은 ‘그 반짝거리며 팔랑거리는 생명의 조각들’로부터 배운 것이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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