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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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그동안 '일간 이슬아'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얼핏 보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차에 저자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몇 페이지를 읽지도 않았는데, 왜 일간 이슬아가 화제성을 갖게 된 것인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뭔가 특이하다. 아주 간결하고 쉽게 읽히고 뒤끝이 없이 세상 쿨할 것 같아 한 마디로 글에서 간지(일본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간지만의 맛깔스러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가 난다. 아니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신선함이 마구마구 느껴졌다. 


저자의 이전 작품들을 전혀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부와 저자와의 관계가 마치 소설 속의 설정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화감이 제로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그냥 에세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가장 이유는 가녀장이라는 가정이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출판사의 직원으로 딸을 상사로 모신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센세이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녀장이라는 소설의 설정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가녀장들이 그리고 가족 기업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녀장과 가족 기업은 실제로 많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과 같은 관계는 본 적이 있는가? 


우선 가정집과 출판사가 한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공간을 시간에 따라서 출판사와 보금자리라는 경계가 구분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부럽고 멋지게 보이는 것은 낮잠 출판사 사장인 슬아와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이가 일하는 관계 속에서는 철저하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부모가 아닌 모부라고 표현을 하니까 모부 자식 간에 일을 하며 더군다나 자식이 상사인 경우에 이렇게나 깍뜻한 경어의 사용이 가능할까? 부지불식간에 평소에 하던 말버릇이 튀어나오고 감정적으로 변하기 쉬운게 모부 자식 사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소설 속의 모부 자식 사이는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존중한다. 뭔가 딸 슬아가 상사이고 경제권을 갖고 있어서 엄마와 아빠가 이용당하는 것이 아닐까란 우려는 안방에서 부부가 내뱉는 말로 한 순간에 불식된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반복된 엄마와 아빠의 귓속말은 위트를 자아내며 소설 속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소설의 제목에 '가녀장'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 사이에 마치 종교와 신념처럼 달라붙은 가부장 시대의 부조리와 차별을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방법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소외토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보자는 제안이 아닐까 싶다. 성역할과 성별 구분의 답습으로 결정된 사회적 요인들이 가부장제라는 이름으로 고착화되어 온 역사를 보기좋게 한 방 날리는 낮잠 출판사의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소설의 중간에 아빠 웅이가 동창회에서 딸을 상사로 모시는 것을 약간은 빈정대는 말이 오갈 때 '다 내가 맞춰 주는 것'이라고 응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시간이 흐름만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가사 노동의 신성함과 자녀가 모부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과 완전히 다른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견고한 틀을 부수는 이들의 생각과 말에 경청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생채기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요한 들 타인은 내 생각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기 위한 발판이 되는 배려이듯이, 소설 속의 슬아와 복희와 웅이가 부럽다면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를 배려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잔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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