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아노 칠 줄 모르는구나? 그럼 어쩔 수 없네... 다른 애를 시켜야지.'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다. 그것이 열 두 살인가... 글 속의 진회와 비슷한 나이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맏딸 누가 보더라도 참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그래야만 했다. 동생도 둘이나 있었고, 맏이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관념을 그 나이에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지만 물론 학원을 보내달라고 이야기할 형편이 못 되었다. 급하게 문방구에서 50원짜리 종이 피아노를 들고 집으로 와서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아무리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멍텅구리 피아노... 결국엔 그 두꺼운 종이에서 먼지가 나기 시작하더니 검은건반이 터덜터덜해 졌다. 손가락 끝에 전해 오는 알싸한 아픔 종이 건반 위로 굵게 떨어진 것이 눈물이었던 것 같다.

성장 소설은 읽고 나면 아프다. 특히 여자 주인공 일 때는 더 그렇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커 간다는 것은 운명이나 자연의 섭리로만 설명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섬세하다. 산다는 것이 힘든다는 것을 배우는 것, 유년의 시간에 흘러간 것을 다시 꺼내 되새기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진희가 너무도 그리워하던 첫사랑. 제방에 묶여 있는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 불어주던 그 멋진 그림자같이 삶은 그렇게 크고 작은 오해와 착각으로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것을 알아가면서 아파하던 시절들이 고스란히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채우고 그렇게 서서히 성장한다. 그래서일까 진희의 작은 성장을 따라 이 소설을 쉽게 읽었는지도...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여전히 아프다.

난 지금도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에게 엉성하게 젓가락 행진곡을 배웠을 뿐인데도, 멋진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 괜히 설렌다. 피아노 학원 앞에서 들려오던 소리. 그때의 나에겐 왜 그 곱던 피아노의 음보다 그 속에서 배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렇게도 크게 들리던지... 종이 피아노 덕에 난 노래를 잘 부르게 되었고, 그 덕에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럴 것도 소리가 나지 않는 그 피아노 음계를 모두 내 목청으로 대신했으니 아마도 그 덕에 어설프게 득음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 CF에서 '맵다면서 왜 먹느냐고...' 하던데 아마도 나에게 유년은 적당하게 매운 고추장 같은가 보다. 맵지만 자꾸 기억하고, 그러고 나면 가슴 한편이 싸하다. 그 철없이 고집스럽고, 자존심 강하던 한 소녀 덕분에...

밖에 비가 온다. 청승맞게도 계속 온다. 오늘은 피아노 협주곡이라도 틀어놓고, 잠시 쉬어야겠다. 빛 바랜 졸업 앨범이라도 뒤척이면서. 지금도 종이 피아노를 팔까? 목청껏 음계를 외면서 그 굵은 종이를 한번 눌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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