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기리며
그의 작품을 다시 읽기로 했다.




나는 지금 아내가 아이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겠지. 
또한 내가 꽤 오래전부터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고 
그 여행 뒤에 <아프리카의 하늘>이라는 모험기를 
출판하는 것이 꿈속의 꿈이라는 것도 이야기하리라. 
그리고 일단 아내가 출산하고 
내가 가족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사실 결혼 후, 나는 그 감옥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감옥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가 
그 뚜껑을 꽉 하고 내리덮어 버릴 것이다.
나는 이제 아프리카를 혼자서 여행한다는 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 P14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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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2권 읽기 시작

표지를 펼치니 내가 평전을 찾아 읽는 이유를 써놨다.

[왜냐하면 인간을 시대 상황 속에 놓고 재현해 내는 것,
그리고 시대와 사회 전체가 
그를 얼마나 가로막았고 얼마나 밀어주었는지, 
그가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세계관과 인간관을 형성해 냈고
어떻게 -그가 예술가, 문학가, 작가라면 - 
그 세계관과 인간관을 
다시 바깥으로 비추었는지 보여 주는 것이
전기의 주된 과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 볼프강 괴테, <문학과 진리>의 서문 중에서




왜냐하면 인간을 시대 상황 속에 놓고 재현해 내는 것,
그리고 시대와 사회 전체가 그를 얼마나 가로막았고
얼마나 밀어주었는지, 
그가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세계관과 인간관을 형성해 냈고
어떻게 -그가 예술가, 문학가, 작가라면 - 
그 세계관과 인간관을 다시 바깥으로 비추었는지 
보여 주는 것이
전기의 주된 과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 볼프강 괴테, <문학과 진리>의 서문 중에서

사실 말러는 자신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드문 기회에 분리파 화가들과, 
예컨대 알마가 예전에 우상처럼 흠모했던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사람과 이따금 작은 모임에서 
만났을 뿐이다. - P12

빈 사람들이 말러에게 심술을 
(반유대주의적인 심술만이아니라) 부린 것, 
천재를 그가 아직 살아서 거의 매일 같이 고된
예술 노동을 완수해 내고 있을 때는 
참아내지 못하는 것, 
그 다음으로는 또한 말러가 
이 도시에서 수난을 겪다가 끝내는 사임한것 하며, 
그가 죽어 가는 몸으로 다시 돌아오자 
빈 사람들이 거짓으로 슬퍼한 것, 
이 모든 것은 헤르만 바가 내린 진단을 
단초 삼아 잘 설명할 수 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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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는 교향곡 1번부터 4번까지 작곡을 하며
겪은 여러 일들이 상세히 나온다.

온라인으로 감상하며 읽으니 일석이조.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을 또 했다.

어릴 때는 어른들께 질문을 하거나,
백과사전을 찾거나 그랬다면,
이젠 검색하면 다 나온다!

음악은 어른과의 대화나 백과사전 보다 감상이 답이다.

아직까지 말러 교향곡 5번이 제일 좋다.

2권까지 읽어 10번 교향곡까지 감상을 끝내면
좋아하는 작품이 바뀔까. 기대된다.

말러가 빈에 와서도 그 특유의 광풍을 일으키며 
일에 착수했다면, 
얼마 못 가 주연급 성악진과 청중의 반발을 사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거의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종종 과소평가되는 
그의 외교적 재능이 실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말해 준다. - P743

말러는 빈의 오페라 공연 업계를 개혁할 때에는 
철저히 일관되게 밀어붙였지만, 
결정적인 문제점을 처리할 때에는 
일을 외교적인 방식으로 진전시키기도 했다. 

그는 제대로 된 승산이 있다고 본 경우에는 
엄격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더 중요한 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이런 일에서는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물고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 P751

최근 수십 년 동안 등장했던 
위대한 바그너 지휘자들에 비유해 본다면, 

한스리히터는 
한스 크나퍼츠부쉬라는 인물로 환생했다고 할 수 있고,

말러는 
게오르크 숄티나 레너드 번스타인으로 환생했고 
할 수 있다. 

이런 비유는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P757

말러는 일을 할 때에는 
관대함이라고는 없이 엄격했고, 
일은 그에게는 창조적 충동의 생존 조건이었다. - P765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된 결정적인 시점은 
1897년 5,6월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이제 막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했던 말러는 목이 퉁퉁 부을 만큼 지독한 
인후염에 시달리는 바람에 
꼬박 일주일 동안을 앓아누웠다. 
심장 판막이상을 유발한 것은 
아마도 이때 발병한 편도선염이었던 것 같다. - P806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한 그 상의 모습은 
자못 충격적이다. 
즉, 이 남성은 평생 동안을 앓았던, 
그것도 심각하게 앓았고 만성적으로 앓던 
병자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전체적인 그림에서 출발하여 
랑에 - 아이히바움이 말한 의미에서의 
‘천재와 질병의 연관성‘에 대해 
극히 대담한 고찰을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말러의 경우를 놓고서 롬브로소가 말한 의미에서의 
‘천재와 광기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 P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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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는 
독일인들에게 자신을 헌납한 것도 
(그는 자신을 ‘독일인‘이라 지칭하기를 거부했다), 
유대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것도 아니었다. 

(...)

말러는 ‘아직 아님‘의 인간인 동시에 
‘더 이상 아님‘의 인간이었으며, 
당대의 유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기 인간"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대지에 박고 있는 뿌리는 공기 뿌리였던 것이다.  - P672

말러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오페라 하우스의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도달하면서 걸어간 길은 책략의 걸작이요, 
19세기 말 유럽 문화계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가장 노회한 간계였으며, 
이로써 한때 왜소하고 신경질적인 지방 지휘자였던 
이 사람이 이 분야에서
군계일학의 대가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 P699

1897년 4월 3일에 요하네스 브람스가 세상을 떴고 
그 이튿날 말러가 빈에서 빈 궁정 오페라 극장과의 
가계약에서 명을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래전부터 투병 중이었던 브람스는 
이미 말러의 초빙에 스스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음악계에서는 브람스가 부다페스트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모차르트를 직접 체험한 이래 
말러의 능력에 관해서 언제나 목소리를 높여 
말해 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빈에서 그동안 대단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던 브람스 역시 말러가 궁정 오페라 극장에 초빙되는 데에 말하자면 사후死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P703

말러는 아직까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두 가지 사실뿐이라는 점을 
날카로운 눈으로 짚어낸다. 

그것은 까다로운, 
심지어 "미친" 지휘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는 점과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 P713

말러식 지휘 감독의 전복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얀과 리히터가 
이른바 옛 독일식 지휘자 유형을 구현한 인물들이었다는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두 사람은 금발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키 크고 힘센 인물들로, 당대의 반유대주의자들이 보았다면 "아리안족" 지휘자라 불렀을 것이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리히터는 "멋쟁이 칼"이라 불리던 당시의 빈 시장칼루에거와 생김새가 아주 닮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유대인이라고 보고 있던 
키 작고, 마르고, 
"신경질적이고 "방정맞은" 
검은 머리의 말러가, 
바그너가 묘사한 니벨룽 족처럼 
"시커멓고 멍투성이에 유황 냄새 나는 난쟁이"같은 
자가 빈 오페라 극장과 이 극장의 지휘대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독일적, 민족적, 그리고 반유대주의적이기까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반유대인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농담으로 들렸다. - P730

이번에는 여태껏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빨리 
그만둬 버리지는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고, 
또한 그는 이 결의를 실현시켰다. 

한 도시에서의 활동 기간이 거의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직선을 그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바트 할에서는 3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류블랴나에서는 7개월, 
올뭐츠에서는 2개월, 
카셀에서는 2년, 
라이프치히에서는 2년, 
부다페스트에서는 2년 반, 
함부르크에서는 6년, 
빈에서는 10년 반을 보냈다. - 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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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때다. 
유대 작곡가라는 이러한 평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런 식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던 음악가로는 
말러가 첫 번째였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경우에 원인 제공자, 
‘악의 원리‘, ‘음악 속의 악마‘였다고 해야 할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다. 

그동안 출판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다룬 
문헌은 서가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결코 끝났다고 볼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그 논쟁이 결론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상황에 빠진 적은 예전에는 없었다. 
이 책의범위 내에서 관건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말러를 겨냥했다가 
다른 유대인 작곡가들에게까지 번진 
이 모든 험담들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런 험담들은 <음악에 나타나는 유대 민족성>이라는
제목으로 바그너가 쓴 짧은 글에서 연유한다.
(...)
바그너는 결코 이 분야에서 최초의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가 진 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 P643

마음속으로는 유대 정신에서 진작 멀어져 있었던 
그는 빈 측과 한창 최종 협상을 벌이고 있던 
1897년, 드디어 천주교 세례를받기로 결심이 섰다. 

"말러라는 사내는 유대인이고, 
나는 유대인은 절대로 붙여주지 않아." 

당시 빈 측의 황실 고문관 에두아르트 블라삭은 
나중에는 말러의 뒤를 봐주게 되지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궁내부 장관 리히텐슈타인 백작에 관한 
내용의 편지에서 말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백작은 같은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은 우리 오스트리아가 반유대주의자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정도까지는 아니라오."

어쨌든 이 장애물은 제거해야만 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세례 받을 결심을 했다는 데에서
(말러는 어쨌든 벌써 만 37세였다)
그 일이 순전히 전략적인 이유에서 
일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649

말러의 ‘사적 종교‘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괴테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범신론, 
괴테와 구스타프 페히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엔텔레케이아에 대한-
즉 인간의 바깥에 있는 힘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되는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소명에 대한 믿음,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의미에서의 ‘측은지심‘의 종교, 

니체와 같은 의미에서의 독자 사상가적사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 종교적 심성으로 이루어진 
매우 개인적인 혼합물이었다. 

말러가 ‘신‘이라는 낱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는 
기독교의 신이나 유대교의 신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신들 모두로 이루어진, 
그보다 훨씬 이상의 신들이 혼융된 그 무엇을 의미했다. - P650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별개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인간관계나 예술과 관련된 일에서
거절당했다고 느낄 때면, 
경험상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것이라는 
느낌을 번번이 받았다. 

그런 만큼 그는 반유대주의가 
아마도 전혀 작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 곳에서까지도,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반유대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유대적 색채를 내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유대인을 소재로 한 농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듯이
그것이 반유대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상관없이 
혐오감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 P655

할라카에 의거한 잘 알려진 정의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도 이 정의는 논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유대인이란 
분명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거나,
(민족이나 종교가 서로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에는 어머니가 어느 쪽에 속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적 규정에 따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 세속적인 정의에 따르면, 
유대인이란 자신을 유대 민족 및 유대 민족의 운명과 
동일시하는사람이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판례로 남을 일련의 재판까지 열려, 
대법원과 최고위 랍비의 결정이 내려져야하는 
상황까지 갔었는데, 이런 상황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인지 이런 상황까지 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결론은 전혀 나지 않았다. - P656

한편에 할라카에 의거한 정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장 폴 사르트르가 내린 
유명한 정의가 있다. 

그것은 

"유대인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여기는 자"라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말러는 평생 동안 유대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두 정의를 결합해 보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유대와 동일시하는 자 
혹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오랫동안 유대인이라고
여겨져서 마침내는 스스로도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여기게 된 자‘이다. - P658

말년에 뉴욕에서 활동할 당시 
한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말러를 "독일인"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이때 말러는 자신이 그렇게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고는 
자기는 "보헤미아인"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전 세계에서는 유대인으로 취급받는다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 없는 사람이어서, 
어디를 가든 불청객이고 어디서도 반겨 주지 않는다"
는 그동안 유명해진 말러의 진술은 
알마의 회상록에서만 전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입증한 사람이 
유일하게 알마밖에 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말 한마디가 말러가 했던 말 가운데 확실히 가장 유명한 말이라는사실에 대해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 P659

유대 음악에 대한 정의로는

음악 학자 쿠어트 작스가 1957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국제 유대 음악 회의에서 들고 나온 

"유대 음악이란 
유대인에 의해,
유대인을 위해, 
유대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라는 정의가 오랜 기간 동안 떠받들어졌다. 

간결함이 장점이었던 이 정의는 오랫동안 통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접할 수 있다. 
작스의 정의는 말하자면 
유대 음악에 대한 할라카식 정의였고, 
그 협소함은 금방 감지되었다. 

이 정의에 대한 ‘세속적‘ 보충이 곧장 등장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은 유대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특정한 음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유대인이란 어떠한 역할을 할 때의 유대인을 말하는가, 
종교적 유대인으로서인가, 
문화적 유대인으로서인가, 
아니면 ‘순수한‘ 음악 애호가로서의 유대인인가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 P662

그러나 당시 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느냐 하는 것이지, 
재료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점도 동시에 강조했다. 
그의 음악이 그런 민속 음악을 암시하고 
통합해 넣은 드문 경우에 속하는 한, 
결코 그의 음악을 명백히 유대적이라고 
판정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말러의 음악은 그의 고향 특유의
보헤미아적-모라비아적-독일적-유대적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적 · 문화적 혼합체에서 유래한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 이 요소들을 
수술하듯 깔끔하게 서로 분리해 내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또한 그가 유대 민족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말한 것들을 모두 고려해 볼 때, 
말러가 여기서 유대 음악의 요소를 
아주 의식적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모두가 듣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골적으로 인용했다거나
심지어 패러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 P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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