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는 
독일인들에게 자신을 헌납한 것도 
(그는 자신을 ‘독일인‘이라 지칭하기를 거부했다), 
유대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것도 아니었다. 

(...)

말러는 ‘아직 아님‘의 인간인 동시에 
‘더 이상 아님‘의 인간이었으며, 
당대의 유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기 인간"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대지에 박고 있는 뿌리는 공기 뿌리였던 것이다.  - P672

말러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오페라 하우스의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도달하면서 걸어간 길은 책략의 걸작이요, 
19세기 말 유럽 문화계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가장 노회한 간계였으며, 
이로써 한때 왜소하고 신경질적인 지방 지휘자였던 
이 사람이 이 분야에서
군계일학의 대가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 P699

1897년 4월 3일에 요하네스 브람스가 세상을 떴고 
그 이튿날 말러가 빈에서 빈 궁정 오페라 극장과의 
가계약에서 명을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래전부터 투병 중이었던 브람스는 
이미 말러의 초빙에 스스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음악계에서는 브람스가 부다페스트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모차르트를 직접 체험한 이래 
말러의 능력에 관해서 언제나 목소리를 높여 
말해 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빈에서 그동안 대단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던 브람스 역시 말러가 궁정 오페라 극장에 초빙되는 데에 말하자면 사후死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P703

말러는 아직까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두 가지 사실뿐이라는 점을 
날카로운 눈으로 짚어낸다. 

그것은 까다로운, 
심지어 "미친" 지휘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는 점과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 P713

말러식 지휘 감독의 전복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얀과 리히터가 
이른바 옛 독일식 지휘자 유형을 구현한 인물들이었다는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두 사람은 금발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키 크고 힘센 인물들로, 당대의 반유대주의자들이 보았다면 "아리안족" 지휘자라 불렀을 것이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리히터는 "멋쟁이 칼"이라 불리던 당시의 빈 시장칼루에거와 생김새가 아주 닮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유대인이라고 보고 있던 
키 작고, 마르고, 
"신경질적이고 "방정맞은" 
검은 머리의 말러가, 
바그너가 묘사한 니벨룽 족처럼 
"시커멓고 멍투성이에 유황 냄새 나는 난쟁이"같은 
자가 빈 오페라 극장과 이 극장의 지휘대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독일적, 민족적, 그리고 반유대주의적이기까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반유대인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농담으로 들렸다. - P730

이번에는 여태껏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빨리 
그만둬 버리지는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고, 
또한 그는 이 결의를 실현시켰다. 

한 도시에서의 활동 기간이 거의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직선을 그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바트 할에서는 3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류블랴나에서는 7개월, 
올뭐츠에서는 2개월, 
카셀에서는 2년, 
라이프치히에서는 2년, 
부다페스트에서는 2년 반, 
함부르크에서는 6년, 
빈에서는 10년 반을 보냈다. - P7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