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때다. 유대 작곡가라는 이러한 평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런 식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던 음악가로는 말러가 첫 번째였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경우에 원인 제공자, ‘악의 원리‘, ‘음악 속의 악마‘였다고 해야 할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다.
그동안 출판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다룬 문헌은 서가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결코 끝났다고 볼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그 논쟁이 결론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상황에 빠진 적은 예전에는 없었다. 이 책의범위 내에서 관건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말러를 겨냥했다가 다른 유대인 작곡가들에게까지 번진 이 모든 험담들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런 험담들은 <음악에 나타나는 유대 민족성>이라는 제목으로 바그너가 쓴 짧은 글에서 연유한다. (...) 바그너는 결코 이 분야에서 최초의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가 진 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 P643
마음속으로는 유대 정신에서 진작 멀어져 있었던 그는 빈 측과 한창 최종 협상을 벌이고 있던 1897년, 드디어 천주교 세례를받기로 결심이 섰다.
"말러라는 사내는 유대인이고, 나는 유대인은 절대로 붙여주지 않아."
당시 빈 측의 황실 고문관 에두아르트 블라삭은 나중에는 말러의 뒤를 봐주게 되지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궁내부 장관 리히텐슈타인 백작에 관한 내용의 편지에서 말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백작은 같은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은 우리 오스트리아가 반유대주의자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정도까지는 아니라오."
어쨌든 이 장애물은 제거해야만 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세례 받을 결심을 했다는 데에서 (말러는 어쨌든 벌써 만 37세였다) 그 일이 순전히 전략적인 이유에서 일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649
말러의 ‘사적 종교‘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괴테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범신론, 괴테와 구스타프 페히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엔텔레케이아에 대한- 즉 인간의 바깥에 있는 힘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되는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소명에 대한 믿음,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의미에서의 ‘측은지심‘의 종교,
니체와 같은 의미에서의 독자 사상가적사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 종교적 심성으로 이루어진 매우 개인적인 혼합물이었다.
말러가 ‘신‘이라는 낱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는 기독교의 신이나 유대교의 신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신들 모두로 이루어진, 그보다 훨씬 이상의 신들이 혼융된 그 무엇을 의미했다. - P650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별개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인간관계나 예술과 관련된 일에서 거절당했다고 느낄 때면, 경험상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것이라는 느낌을 번번이 받았다.
그런 만큼 그는 반유대주의가 아마도 전혀 작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 곳에서까지도,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반유대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유대적 색채를 내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유대인을 소재로 한 농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듯이 그것이 반유대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상관없이 혐오감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 P655
할라카에 의거한 잘 알려진 정의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도 이 정의는 논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유대인이란 분명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거나, (민족이나 종교가 서로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에는 어머니가 어느 쪽에 속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적 규정에 따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 세속적인 정의에 따르면, 유대인이란 자신을 유대 민족 및 유대 민족의 운명과 동일시하는사람이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판례로 남을 일련의 재판까지 열려, 대법원과 최고위 랍비의 결정이 내려져야하는 상황까지 갔었는데, 이런 상황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인지 이런 상황까지 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결론은 전혀 나지 않았다. - P656
한편에 할라카에 의거한 정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장 폴 사르트르가 내린 유명한 정의가 있다.
그것은
"유대인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여기는 자"라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말러는 평생 동안 유대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두 정의를 결합해 보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유대와 동일시하는 자 혹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오랫동안 유대인이라고 여겨져서 마침내는 스스로도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여기게 된 자‘이다. - P658
말년에 뉴욕에서 활동할 당시 한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말러를 "독일인"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이때 말러는 자신이 그렇게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고는 자기는 "보헤미아인"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전 세계에서는 유대인으로 취급받는다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 없는 사람이어서, 어디를 가든 불청객이고 어디서도 반겨 주지 않는다" 는 그동안 유명해진 말러의 진술은 알마의 회상록에서만 전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입증한 사람이 유일하게 알마밖에 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말 한마디가 말러가 했던 말 가운데 확실히 가장 유명한 말이라는사실에 대해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 P659
유대 음악에 대한 정의로는
음악 학자 쿠어트 작스가 1957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국제 유대 음악 회의에서 들고 나온
"유대 음악이란 유대인에 의해, 유대인을 위해, 유대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라는 정의가 오랜 기간 동안 떠받들어졌다.
간결함이 장점이었던 이 정의는 오랫동안 통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접할 수 있다. 작스의 정의는 말하자면 유대 음악에 대한 할라카식 정의였고, 그 협소함은 금방 감지되었다.
이 정의에 대한 ‘세속적‘ 보충이 곧장 등장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은 유대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특정한 음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유대인이란 어떠한 역할을 할 때의 유대인을 말하는가, 종교적 유대인으로서인가, 문화적 유대인으로서인가, 아니면 ‘순수한‘ 음악 애호가로서의 유대인인가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 P662
그러나 당시 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느냐 하는 것이지, 재료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점도 동시에 강조했다. 그의 음악이 그런 민속 음악을 암시하고 통합해 넣은 드문 경우에 속하는 한, 결코 그의 음악을 명백히 유대적이라고 판정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말러의 음악은 그의 고향 특유의 보헤미아적-모라비아적-독일적-유대적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적 · 문화적 혼합체에서 유래한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 이 요소들을 수술하듯 깔끔하게 서로 분리해 내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또한 그가 유대 민족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말한 것들을 모두 고려해 볼 때, 말러가 여기서 유대 음악의 요소를 아주 의식적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모두가 듣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골적으로 인용했다거나 심지어 패러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 P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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